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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 17화 (104/513)

5권 - 17화

특실이란 명칭대로 방은 꽤 화려했다.

솔직히 아랍의 부호들이 사용한다는 어마어마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문 오른쪽으로 서재 느낌의 책장과 소파를 두었고, 전면 창 앞으로 두 개의 식탁이 늘어섰으며, 왼편으로는 거실과 소파, 그 안쪽에 침실 두 개를 가지고 있었다.

강성태는 조태완을 문 왼쪽의 가장 안쪽 소파로 데려갔다.

“치곤아. 식탁 의자 하나만 가져와.”

“예, 형님.”

회칼을 식탁에 내려놓은 최치곤이 의자를 번쩍 들고 빠르게 다가왔다.

조태완을 의자에 앉힌 뒤에야 강성태는 목을 조르고 있던 오른팔을 풀었다. 그러나 턱 아래에 찔러 넣은 회칼은 아직 그대로 붙여두었다.

“커튼 걸이에 줄 보이지? 저거 두 개 다 가져다줘.”

“알겠습니다, 형님.”

대답한 최치곤이 거실 창의 양 끝에 걸어둔 커튼 줄을 가져왔다. 굵은 원단을 다섯 가닥으로 꼰 형태여서 어지간해서는 칼로 자르기도 버거운 두께였다.

“팔 뒤로 빼.”

회칼의 압력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조태완은 순순히 팔을 의자 뒤로 늘어트렸다.

강성태는 받아든 커튼 줄로 능숙하게 조태완의 손목을 묶었다. 일반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어서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최치곤이 아차 하는 얼굴로 회칼을 가져왔다.

남은 줄을 마저 집은 강성태는 조태완의 허리를 감았고, 그대로 돌려서 묶어둔 손목과 의자의 다리를 연결해 매듭지었다. 이렇게 묶으면 일어서겠답시고 다리를 펴는 순간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지게 된다.

포박을 마친 강성태는 들고 있던 회칼을 최치곤에게 건네고 시선을 돌렸다.

이병렬과 김진용은 아직 문앞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려면 시간이 걸려. 안쪽 걸쇠를 걸었으면 차라리 여기와 앉아 있어. 만약 창이든, 문이든 부수고 들어오면 어차피 끝장을 보겠다는 뜻이니까 그때는 무조건 조태완의 목을 뚫어버려.”

워낙 살벌한 지시였다.

당황스러울 법도 했는데 이병렬과 김진용은 충직한 부하처럼 눈으로 답하고 바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본 강성태는 식탁 의자의 끝을 붙들어서 끌고 와 조태완의 맞은편에 놓았다. 그리고는 먼저 재킷을 벗어 등받이에 걸었다.

강성태의 셔츠 곳곳에도 피가 배어 나와 있었는데 특히 옆구리는 아예 흥건하게 젖을 정도였다.

의자에 앉은 강성태는 최치곤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치곤아. 커피 좀 찾아서 끓여주라. 생수병에 약을 탔을지 모르니까 욕실에서 나오는 물을 사용해.”

“예, 형님.”

지시를 하는 동안 의자 두 개를 들고 온 이병렬과 김진용이 조태완의 좌우 뒤편에 앉았다. 의지를 품은 얼굴의 이병렬도 그렇지만, 손에 붕대를 감은 김진용도 회칼을 다부지게 움켜쥐고 있었다.

팔꿈치에 맞은 볼이 여러 갈래로 찢어진 데다 입술이 커다랗게 부풀어서 조태완은 흉한 몰골이었다. 거기에 회칼의 길이만큼 갈라진 턱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목을 타고 셔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마주 보는 거 불편하니까 빨리 끝내자. 지용호는 어떻게 넘겨줄 건지 말해.”

“담배 있으면 하나만 주라.”

강성태의 말을 무시하는 요구였다. 게다가 강성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픽 웃은 강성태는 이병렬과 김진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직후에 김진용이 일어섰다. 담배를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의미처럼 보였다.

‘하나 줘.’

강성태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진용은 재킷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위로 흔들었다. 세 개비쯤 올라온 담배 중 하나를 집은 김진용이 조태완의 입에 물려주고는 다시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다.

라이터를 켜줄 때 붕대를 감은 손에 들린 회칼이 조태완의 입 바로 앞에서 번득이고 있어서 마치 이 이상은 까불지 말라는 경고처럼 보였다.

“후-.”

퉁퉁 부은 입술 안쪽의 이로 필터를 꽉 깨문 조태완이 연기를 길게 뿜었다.

“지용호를 넘겨주면 날 풀어주나?”

강성태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 뒤에 내가 영등포를 밀고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때도 내가 이런 꼴을 당할 것 같아?”

일리 있는 질문이었다.

대답에 앞서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그 웃음은 또 뭐냐?

절반쯤 타들어 간 담뱃재를 아슬아슬하게 매단 조태완의 눈빛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런 짓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을 생각인데?”

“내가 약속을 어기면?”

“영등포가 박살나겠지. 대신 조태완은 죽는 거고.”

부어오른 입술 대신 조태완은 눈 끝을 묘하게 뒤틀었다.

“내가 왜 아까 일을 급하게 덮었는지 짐작이나 하냐?”

엉뚱한 질문을 꺼내놓은 조태완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깡패끼리는 알아차리는 건지, 아니면 흡연자들끼리만 아는 신호인지는 모른다. 시선을 받은 김진용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태완의 입에 물린 담배를 빼냈다.

툭 하고 떨어진 재가 바지에 걸쳤다가 바닥에서 부서졌는데 김진용은 담배의 불을 끄기 위해 움직였고, 조태완은 상관없다는 투로 고개를 돌렸다.

“진짜 힘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그저 이용하기 좋은 꼬리에 불과해. 그들이 버리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나는 말할 것 없고, 태완이파는 한순간에 사라진다.”

“이쯤에서 적당히 물러나라는 거냐?”

“머리는 좀 돌아가네.”

붙들려 매달린 상태에서도 조태완은 강남 삼대장 중 하나의 여유를 잃지 않았다.

“너나 나나 이미 권력자의 눈에 걸렸다. 여기에서 더 시끄럽게 하면 우리 둘, 태완이파, 그리고 네가 죽고 못 사는 저기 세 명과 영등포 새마을 모두 방송 시원하게 탄 다음에 교도소에 들어가게 돼.”

“지용호를 내놓으면 끝나.”

“후우.”

들으라는 듯 숨을 토해낸 조태완이 갑갑한 눈으로 강성태를 보았다. 그러면서도 여유롭게 앉아 있는 강성태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눈빛도 보였다.

“그 새끼가 나한테 모사친 바람에 이렇게까지 된 거니까 차라리 내가 지용호, 그 새끼의 발목 두 개를 끊는 거로 마무리하자.”

“헛소리 말고, 지용호를 내놔야 끝난다는 것만 알아.”

“지용호를 건드리면 광룡이 움직일 텐데 그건 어떻게 감당하려고? 너하고 영등포가 죽는 건 상관없어. 나는 지용호를 넘겨줬다는 이유로 광룡과 붙어야 해. 그 새끼한테 모사까지 당했는데!”

조태완의 말이 떨어진 직후였다.

커다란 쟁반에 달랑 커피 한 잔을 올린 최치곤이 다가와 강성태 뒤편의 식탁에 올려놓았다.

“여기는 나한테 맡기고 가서 커피를 마시고 와. 커피가 싫으면 끓여놓은 물이라도 한 컵씩 마셔. 그래야 덜 지쳐.”

강성태의 눈을 보았던 이병렬이 몸을 일으켰다.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이병렬을 따라 몸을 일으킨 김진용이 고개를 숙인 뒤에 최치곤과 함께 뒤쪽 방으로 움직였다.

강성태는 커피잔을 들어 뜨거운 커피를 조심스럽게 삼켰다.

제 딴에는 성의를 보인답시고 양껏 부어 넣은 모양이었다. 최치곤이 가져다준 인스턴트커피는 징그러울 정도로 진했다. 그래도 뜨거운 커피 한 모금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의아한 점도 있었다.

싸우는 동안은 몰라도 이렇게 앉게 되면 뻑뻑해졌어야 할 몸이 커피잔을 드는 데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조태완의 주먹에 옆구리를 얻어맞은 뒤였는데도 말이다.

강성태는 상체를 돌려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지용호를 내놓는 게 조건이었다. 태완이파가 광룡과 싸워서 죽든, 무너지든,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냐.”

“광룡이라니까. 삼합회의 하부조직.”

“지용호를 안 내놓으면 영상이 풀릴 텐데 그건 감당할 수 있겠어?”

“그럼 너는 무사할 것 같아?”

협박 같은 조태완의 질문에 강성태는 픽 웃었다.

“장담하는데 영상을 풀어도 나는 무사해. 하나 더 말하자면 너는 절대 이번처럼 못 덮을 거고.”

설마, 하는 눈초리를 하고서 조태완은 대꾸를 내놓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강성태의 말이 허풍이 아닌지를 알고자 눈알을 굴렸다.

“30분 준다. 그 안에도 지용호를 넘겨받지 못하면 나하고 영등포로 가야 하니까 알아서 판단해.”

말을 마친 강성태는 몸을 돌려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조태완은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

스위트룸의 창가에 선 김동팔은 스마트폰으로 이세종과 통화 중이었다.

“김종수 프로덕션 대표가 태완이 형님 동생입니다. 연락해 뒀으니까 하라고만 하면 바로 사과문 띄울 겁니다.”

- 벌써 말이 돌아. 뉴스보다는 차라리 인터넷에 속보로 올리는 게 더 좋겠는데? 그게 반응도 빨라.

“그쪽은 형님이 잘 아시니까 알아서 해주십시오.”

한번 인사했다고 김동팔은 이세종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 그럼 내가 속보 올리고, 김종수 프로덕션에 연락할게. 이왕이면 심려를 끼쳐서 죄송하다는 인터뷰를 한 거로 처리하고 싶은데 동생이 그렇게 말해줄 수 있어?

“그런 정도는 직접 말씀하시면 됩니다. 태완이 형님이 시키셨다고 말씀하십시오, 형님.”

창가에 붙어서 답을 건넨 김동팔이 방 안쪽으로 고개를 슬며시 돌렸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왼쪽 입술이 부어오른 고영주가 이쪽을 보던 시선을 급하게 문 쪽으로 틀었다.

-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참! 그리고 말이지. 오늘 우리 애들 몇 명하고 클럽에 갈까 하는데 괜찮아?

일이 이렇게 급한 판국에!

에라, 이 개 쓰레기 새끼야.

불끈했던 김동팔은 수화기 너머로 들리지 않도록 천천히 숨을 뱉어냈다.

“시간 정해지면 알려주십시오. 아닙니다. 제가 지금 연락해 둘 테니까 입구에 있는 가드에게 제 이름을 대십시오. 그럼 알아서 해드릴 겁니다.”

- 기자 애들도 데려가는 거니까 체면 좀 확실히 세워줘.

“안심하십시오, 형님. 대신 속보부터 제대로 처리해주십시오.”

- 알았어.

통화를 마친 김동팔은 창을 향해 이를 잘근잘근 씹었다.

공짜가 없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하여간 이세종 같은 부류는 얻어먹을 게 있다면 김동팔의 팬티라도 내놓으라고 할 종자들이었다.

분을 삭인 김동팔은 고개를 돌렸다.

“트와일라잇에 연락해서 이세종 국장이 오면 나를 대하는 것처럼 하라고 해. 계산 받지 말고.”

“예, 형님.”

고개를 숙인 덩치가 스마트폰을 꺼내 번호를 찾았다. 그 덩치가 지시 사항을 전하는 동안 김동팔은 소파 구석에 앉아 있는 고영주를 향해 움직였다.

위협적인 표정으로 고영주의 맞은편에 앉은 김동팔은 다리를 꼬고는 상체를 소파의 등받이에 기댔다.

“김종수 프로덕션 알지?”

고영주의 눈에 스친 욕망을 본 김동팔이 이죽거리는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통화 들은 대로 김종수가 우리 형님 말씀이라면 껌벅 죽거든. 드라마에 너 하나 꽂아 넣는 건 일도 아니야. 어떻게 할래? 여기서 주사 한 방 시원하게 맞고 섬으로 몸 팔러 갈래? 다음 드라마 주연 할래?”

“내가 바보인 줄 알아요?”

앉아 있는 동안 고영주는 성깔의 일부분을 되찾았다. 쓰러진 그녀를 세우라는 지시를 기억해냈고, 김동팔이 뭔가 아쉬운 게 있다는 눈치를 알아차린 덕분이었다. 거기에 이세종이 이쪽에 붙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하여간 계집애치고 깡다구 하나는 인정이다. 김종수랑 직접 통화하면 되지?”

또다시 욕망이 스쳐 지나가는 고영주를 보며 김동팔이 히죽 웃었다.

“어떻게 할 거야?”

“주연을 하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건데요?”

“특실에 갈 건데 그 안에 강성태가 있거든.”

“강성태 씨가요?”

“씨발! 씨는 무슨 씨? 아무튼, 너랑 트와일라잇에서 진상친 강성태 그 새끼가 지금 특실에 있어. 영등포 똘마니 새끼들 셋하고. 거기 들어가서 한 가지만 해주면 바로 드라마 주연시켜주마.”

“통화했다가 나중에 말 바꾸면요?”

욱 성질이 올라와 인상을 찌푸렸던 김동팔이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는 투로 재킷을 쓸어내렸다.

“우리 바닥은 말이 법이야. 그리고 오해하나 본데 거절하면 그냥 섬에다 팔아버리면 끝나. 뭘 알고 조건을 걸어.”

대꾸 대신 고영주는 눈치를 보며 시간을 끌었다.

“못 하겠어? 그럼 섬에 가야지.”

김동팔이 덩치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주연 약속 꼭 지켜요.”

고영주가 급한 음성으로 김동팔의 고개를 붙들었다.

“뭘 하면 돼요?”

돌아온 김동팔의 시선 앞에서 고영주는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는 듯 굳게 각오한 얼굴이었다.

**

커피를 마셨는지 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병렬과 김진용, 최치곤이 안쪽에서 나와 조태완의 뒤에 둘이 앉았고, 최치곤이 좀 더 뒤에 섰다.

강성태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손 좀 씻고 올게. 혹시 문제가 생기면 바로 목을 뚫어버려. 노크 소리가 나도 마찬가지야. 고민하거나 망설이지 마.”

‘노크 소리에도 목을 찌르는 건 좀 심한 거 아니냐?’

이병렬이 당황한 눈으로 일어선 강성태를 보았다.

“조태완이 죽으면 내가 해결할 수 있지만, 살아서 날뛰면 수습하기 어려워. 그러니까 일이 벌어지기 전에 죽여버리는 게 좋아.”

분명하게 답을 건넨 강성태는 걸음을 옮겨 안쪽으로 들어갔다.

묵직하고 뻑뻑한 침묵이 흐를 때였다.

“이병렬.”

“예, 형님.”

조태완이 지친 음성으로 불렀고, 이병렬이 나직하게 답했다.

“네 보스 말이다. 너도 네 보스가 광룡하고 붙어서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하냐?”

“그렇습니다, 형님.”

이제는 턱 아래의 피가 꾸덕하게 굳은 조태완이 확인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럼 너나 함께 있는 두 놈은?”

강성태는 살아도 너희들은 무조건 죽는다.

조태완이 던진 질문의 의미는 분명했다.

이죽거리는 줄 알았다. 그러나 조태완은 진심으로 답이 궁금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경찰서에 있는 저와 치곤이를 빼내기 위해 혼자 트와일라잇에 달려간 보스입니다. 저는 그렇게 못 합니다, 형님.”

“광룡은 경찰하고 달라. 너도 알잖아. 혼자서 너희까지 못 지킨다니까.”

“광룡에게 당한다면 보스가 지켜주지 못해서가 아니라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단호한 이병렬의 답을 들은 조태완의 볼이 씰룩하고 움직였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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