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 15화
강성태가 걷기 시작하자 이병렬이 반걸음쯤 뒤에서 움직였다. 자존심 강한 이병렬이 태완이파 백여 명과 김진용, 최치곤이 있는 자리에서 2인자를 자처한 모양새였다.
이런 순간에 강성태가 어설프게 굴면 스스로 내려앉은 이병렬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강성태는 굳은 얼굴로 커피숍 입구까지 곧장 걸었다.
“조태완이다.”
조태완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리고는 인사를 기다리는 조직 형님처럼 단호한 눈으로 강성태를 지켜보았다.
“강성태다.”
“대화를 하고 싶으면 예의부터 지켜.”
눈알과 볼을 꿈틀하면서도 조태완은 강성태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예의는 김동팔이 사과한 뒤에 찾아. 그리고 잊었나 본데 나는 아쉬울 거 없어.”
신음처럼 숨을 뱉은 조태완이 당장이라도 씹어먹고 남을 듯한 눈초리로 강성태를 노려보았다.
언제 주먹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은 대치였다.
밀리면 죽는다.
숫자에 밀려도 죽고, 기세에 밀려도 죽고, 눈빛에 밀려도 결과는 같다.
뒷일을 어디까지 수습할 수 있을까?
분노한 눈알 깊숙한 곳에서 조태완은 복잡한 계산을 하며 망설이고 있었다.
그의 눈이 덩치들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일어서는 김동팔을 향했다가 돌아왔다.
김동팔이 무너졌지만, 숫자를 믿고 해볼까, 아니면 적당하게 넘어갈까.
계산이 끝난 모양이었다.
뭐냐, 조태완?
강성태가 이를 지그시 깨무는 순간이었다.
조태완이 고개를 왼편으로 돌렸다.
“이 친구하고 둘이 있겠다. 너도 거기 있다가 누구라도 커피숍 안으로 들어오면 목을 갈라버려.”
“예, 형님.”
강성태와 똑같은 지시를 내린 조태완이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비록 기 싸움에서 밀렸지만, 조태완의 뒷모습에서는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밀리기는커녕 심지어 강성태쯤 언제고 무너트릴 수 있다는 여유가 그의 몸에서 진하게 풍겼다.
분명 달려들 거 같았는데?
조태완의 뒤에서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며 강성태는 안쪽을 빠르게 살폈다.
덩치들은 없었다.
지배인, 남자 직원 셋, 여직원 둘이 전부였다.
입구를 통하지 않아도 밀고 들어오려면 얼마든지 나무로 만든 화단 따위는 뛰어넘을 수 있는 구조였다. 그렇더라도 조태완은 지나치게 방심하는 태도였다.
뭔가 믿는 게 있는데?
커피숍 중앙에 자리한 조태완이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들었다. 둥그런 나무 테이블에 하얀 천을 깔았고,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나무의자였다.
강성태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뭔가 마뜩찮은 표정으로 조태완이 입구를 향해 눈알을 굴렸다. 긴장한 듯한 느낌을 주기 싫어서 강성태는 느긋한 태도로 입구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역시.
누군가 신고했던 모양이었다.
정복 경찰 두 명이 호텔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
백 명에 달하는 덩치, 눈 안쪽이 찢어져 피를 흘리는 놈들, 덩치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서 있는 김동팔까지, 모른 척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별거 아니오. 호텔 직원한테 물어보고 가쇼.”
그러나 그 불가능한 일을 정복 경찰이 해냈다.
덩치의 대꾸를 받은 경찰 둘이 곤란한 표정으로 리셉션 쪽을 향해 움직였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호텔에서 그 난리를 피웠는데도 경찰은 리셉션으로 향해 상황을 들었고,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걸어 신고한 사람에게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다.
어쩐지 조태완의 능력을 보는 것 같은 심정으로 강성태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커피 장사를 한다던데 여기 커피가 제법 괜찮아.”
간단하게 말을 건넨 조태완이 공손하게 서 있는 매니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라 호텔이 태완이파의 숙소처럼 사용된다더니 고갯짓으로 커피를 주문할 정도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겼으면 차라리 방송이나 영화 쪽 일을 하지, 뭐하러 이런 거친 바닥에 뛰어들어?”
“조 회장?”
“그래. 말해 봐라.”
“영상이 걸려서 부른 걸 테니까 빨리 끝내자. 내가 원하는 건 지용호다. 그놈을 넘겨주면 영상은 깔끔하게 없앤다.”
“흠흐. 말은 쉽게 하는데 그걸 어떻게 믿지?”
“영상을 터트려 봐야 한동안 시끄럽기는 하겠지만, 클럽에서의 일을 덮은 것처럼 눌러버리면 또 그럭저럭 끝나겠지?”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는 투로 조태완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영상을 터트리면 나는 가진 무기가 없어. 숫자도 그렇고, 능력도 그렇고, 조 회장이 밀고 들어오면 나는 물론이고 영등포 업소가 쑥대밭이 될 게 빤한데 굳이 내가 영상을 터트릴 일이 있을까?”
“후.”
조태완이 고민하는 척 숨을 내쉴 때였다.
쟁반에 은색 커피포트와 흰색 도자기 잔을 얹은 여직원이 다가왔다. 생머리를 말아서 뒤통수에 토끼 꼬리처럼 묶은 여직원이었다. 매력적인 인상에 무릎에서 끝나는 제복의 치마 아래로 다리도 매끈했다.
강성태는 대놓고 여직원의 종아리 아래로 시선을 주었다.
훈련받은 걸음걸이였다.
이걸 믿었던 거냐, 조태완?
“마음에 들어?”
원하면 하룻밤쯤 만들어 주겠다는 투의 말투였다.
픽 웃은 강성태는 여직원의 다리에서 시선을 들었다.
“거기 서!”
그리고는 테이블에서 다섯 걸음쯤 남은 여직원을 향해 날카롭게 외쳤다.
멈칫, 걸음을 멈춘 여직원이 눈치를 살폈고, 입구에 있던 이병렬 일행과 덩치들의 시선이 단박에 강성태를 향해 달려왔다.
강성태는 천천히 조태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직원이 나를 덮치는 것과 내가 네 목을 움켜쥐는 거, 둘 중 누가 빠를 거 같아?”
어떻게 그걸……?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조태완의 눈이 흔들렸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조태완은 호텔 입구로 시선을 짧게 돌렸다.
그의 오른팔 김동팔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게 분명했다.
오늘 김동팔은 안 된다니까, 조태완.
어설프게 대들다가 이미 망가졌거든.
조태완이 이번에는 아직 그 자리에 서 있는 여직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뭔가 정한 신호가 있는데 그걸 쓸지 아니면 조용하게 넘어갈지를 고민하는 눈치였다. 지금 조태완의 꼴을 봐서는 협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예 없애기 위해 강성태를 부른 게 확실했다.
이런 거, 여러 번 경험해 봤지.
이런 순간에 생각할 시간을 길게 주는 건 불리한 짓이라는 것도 잘 알고.
“조태완.”
강성태는 나직한 음성으로 조태완의 시선을 가져왔다.
“태완이파는 내가 접수한다.”
뭐라는 거야……?
놀란 조태완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강성태는 테이블을 힘껏 앞으로 밀었다.
퍼억!
테이블에 가슴을 맞은 조태완이 뒤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휘이익!
커피포트와 잔이 올려진 쟁반이 강성태를 향해 날아왔다.
카앙!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쟁반을 왼손으로 쳐낸 강성태는 곧장 여직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짧은 순간에 여직원의 오른발이 강성태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터억!
왼손 팔뚝으로 발을 막은 강성태는 뾰족하게 세운 오른손 주먹으로 여직원이 무릎 위쪽을 세차게 찍었다.
무서운 여자였다.
다리를 찍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왼손 주먹을 제대로 날리고 있었다.
시간을 끌면 조태완이 일어선다.
지켜보던 놈들이 달려들 수도 있었다.
강성태는 구부러지는 여직원의 발을 밀치며 앞으로 뛰어들었다.
퍼억!
여직원의 주먹이 왼쪽 머리에 꽂혔는데 다리가 들리는 바람에 위력은 크게 없었다.
그 직후에 강성태는 달려드는 힘을 이용해 휘청이는 여직원의 턱에 오른손 팔꿈치를 힘껏 찍어 넣었다.
콰자작!
달려드는 힘에 체중까지 실어서 날린 팔꿈치였다.
머리부터 뒤로 튕겨 나가는 여직원을 두고 강성태는 조태완에게 달려들었다.
“비켜! 이 새끼들아!”
이병렬과 김진용, 최치곤이 회칼을 뽑아 들고 강성태의 뒤로 뛰어왔고, 그 주변을 다시 회칼을 든 덩치들이 둘러쌌다.
강성태가 테이블 넘어 조태완에게 달려드는 순간이었다.
휙!
조태완이 휘두른 손끝에서 회칼이 번득였다.
쓰러진 상태여서 힘을 제대로 싣지 못했고, 길게 뻗지 못했다.
태클을 하듯 몸을 날린 강성태는 떨어지는 힘을 이용해 팔꿈치를 세차게 아래로 내리찍었다.
얼굴을 노렸다.
퍼어억!
그러나 조태완이 상체를 비틀면서 팔꿈치가 뒤통수에 꽂히고 말았다.
뒤통수를 맞는 바람에 로비 바닥에 얼굴을 세차게 찍힌 조태완, 단단한 머리통을 찍은 탓에 왼팔에 힘이 빠진 강성태, 상황은 비슷했다.
“들어와, 이 씨발놈들아! 자신 있으면 들어오라고!”
휙! 휘익! 휙!
다가서는 덩치들을 이병렬과 김진용, 최치곤이 회칼로 밀쳐내는 가운데 강성태와 조태완은 바닥에서 뒤엉켰다.
휘익! 턱!
조태완이 휘두르는 오른손목을 붙든 강성태는 뾰족하게 세운 엄지로 그의 목덜미 부근을 연속해서 세차게 찔렀다.
퍽! 퍽! 퍽! 퍽! 퍽!
이 정도 맞으면 뻗는 게 정상인데 조태완의 맷집은 상당했다. 단순히 버티는 게 아니라 얻어맞으면서도 연신 회칼을 휘두르기 위해 힘을 썼고, 강성태를 타고 오르기 위해 버둥거렸다.
콰악! 콱! 콱!
몸통이 큰 만큼 힘도 좋아서 왼손 주먹으로 연신 강성태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이 개새끼!
콰작!
몸을 뒤튼 강성태가 팔꿈치로 턱을 갈긴 직후였다.
“뒤로 돌아가, 이 새끼들아!”
커피숍 입구에서 고함이 터졌다.
덩치들이 커피숍 뒤편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며 강성태는 이를 악물었다.
저놈들이 조태완을 둘러싸면 지는 싸움이었다.
숫자도 그렇지만, 태완이파 숙소와 같다는 아우라 호텔이라 다시 경찰이 달려오면 강성태 일행만 체포될 확률이 높았다.
이번에 잡혀가면 이병렬과 최치곤을 빼낼 방법이 없다고 봐야 했다.
아니, 그전에 달려드는 놈들에게 휩싸이면 살아있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콰작! 콰작! 콰작! 콰작!
함께 넘어진 상태에서 강성태는 연달아 조태완의 볼을 갈겼다.
우르르르!
커피숍 뒤편에서 달려든 놈들이 바로 앞까지 왔을 때, 강성태는 조태완의 목을 끌어안은 체 상체를 세웠다.
“허억. 헉.”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강성태는 옆에 떨어진 회칼을 집어 조태완의 목에 바싹 붙였다.
백 명이나 되는 덩치들이 커피숍 안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데 그 한가운데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강성태가 조태완의 목을 조르고, 뒤를 이병렬과 김진용, 최치곤이 지켜주고 있었다.
강성태는 어쩔 줄 모르고 멈춰서 있는 덩치들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김동팔.”
조태완의 목에 회칼이 걸린 상황이라 당장 달려드는 놈들은 없었다.
“김동팔!”
강성태가 두 번째 부를 때 찢어진 눈가를 누르며 김동팔이 덩치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조태완은 내가 데려간다. 여기 알아서 수습해.”
“너, 이 새끼. 진짜 뒈져.”
“양아치 새끼야. 자신 있으면 나중에 따로 찾아와.”
기가 막히는지 김동팔은 “하흐!” 하는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어떻게 할래? 여기서 조태완 목 딸까, 아니면 지용호 데려와서 찾아갈래?”
“어떻게 나가려고? 보는 사람 눈이 한둘이 아냐!”
“이대로 둘러싸고 나가. 여기 호텔은 아까 경찰 해결한 것처럼 알아서 하고.”
“하아, 씨발 진짜!”
김동팔이 욕을 내뱉은 직후에 강성태는 회칼을 움직여 조태완의 턱 아래를 바싹 당겼다.
“크르륵.”
막 정신이 들었던 조태완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 신음을 토해내면서 김동팔의 반응이 확실히 달라졌다.
“차는? 차는 어떻게 할래?”
“최치곤. 차를 불러!”
“예, 형님.”
질문을 던졌던 김동팔은 강성태의 지시와 최치곤의 답을 들으며 아예 질린 얼굴이었다.
“보내줄 테니까 그 씨발! 회칼 좀 아래로 내려!”
김동팔의 요구를 들으며 강성태는 회칼을 느슨하게 내려주었다.
“차 내려온답니다, 형님.”
최치곤의 답이 떨어진 직후였다.
“크륵. 큭.”
조태완이 오른손을 겨우 들어 손끝을 앞으로 흔들었다.
“밖에 나가면……. 우리 다 엮어서 죽는다. 크륵. 그러지 말고. 여기…… 특실로 가. 지용호를 줄 테니까…….”
어떻게 하면 좋지?
강성태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였다.
이병렬이 짧게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