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 14화
앞차를 따라 유턴으로 방향을 바꾼 최치곤은 도로를 잠시 달려 아우라 호텔의 진입로에 들어섰다. 이면도로 형태로 만들어진 진입로를 지난 김진용이 도어맨 앞에 차를 세웠고, 그 뒤에 최치곤이 멈췄다.
조태완이 만나자고 했던 장소였다.
바라는 것이 서로 맞아 떨어진다면 더할 수 없이 좋겠지만, 오늘은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자리였다.
도어맨이 앞차의 문을 열어줄 때였다.
“태완이파 애들이 볼 거야. 내가 뒷문을 열어줄 테니까 먼저 내리지 마.”
최치곤이 나직한 음성으로 당부했다. 말뿐이 아니었다. 시동을 켠 채 운전석에서 내린 최치곤은 빠르게 뒤로 돌아서 강성태가 내릴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두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멈춘 뒤에 강하게 생긴 이병렬이 내렸고, 이어 깡패가 분명한 인상의 최치곤이 뒷문을 열어주는 상황이었다. 당연하게 택시나 승용차를 타기 위해 기다리던 이들의 시선이 강성태에게 쏠렸다.
깡패 아니었어?
입구에 서 있던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강성태를 살필 때였다. 이병렬이 다가왔고, 발렛티켓 두 장을 받은 김진용이 그 뒤에서 움직였다.
로비에 새카맣게 서 있는 덩치들과 그 너머로 텅 빈 커피숍의 테이블까지, 고개 한번 돌리는 것으로 호텔 안쪽의 상황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새끼들. 준비 많이 했네.”
유리 안쪽에서 시선을 돌린 이병렬이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들어가야지?”
주눅 들지 않은 이병렬의 권유였다.
옅게 웃은 강성태가 걸음을 옮기자 최치곤이 앞으로 움직여 회전문 옆의 문을 밀었다.
깡패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도 백 명은 확실히 많은 숫자였다. 얌전히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적대감 가득한 눈빛을 날리는 상황이라 위압감은 더 심했다.
최치곤과 김진용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커피숍 입구를 향해 걸었고, 그나마 이병렬이 독한 미소를 입가에 달았는데 강성태가 보기에는 어색한 느낌이었다.
로비를 가로질러 정면 끝에 있는 커피숍 입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최치곤과 김진용의 앞을 덩치 하나가 막았다.
최치곤만 덩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서들 오셔.”
“김동팔. 형님 오신 거 안 보여?”
“오늘은 인사하기 부담스러운 날 아냐?”
김진용이 건넨 다부진 질문을 느물거리는 음성으로 받은 김동팔이 시선을 돌렸다.
“병렬이 형님은 들어가십시오.”
“오늘 태완이 형님을 만나기로 한 사람은 내가 아닌데?”
“아! 강성태라는 꼬마를 보기로 하셨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얼굴을 몰라서요. 혹시 뒤에 있는 애가 강성태입니까?”
영상을 보았을 테니 알아볼 거고, 분위기로 봐서도 짐작할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의도적인 무시였고, 완벽한 시비였다. 어쩌면 강성태와의 통화에서 밟혔던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게 깡패들의 방식인가?
김동팔의 눈을 마주 본 상태에서 강성태는 픽 웃었다.
“웃음이 나와?”
김동팔은 작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대놓고 시비조로 나왔다.
뜨거운 숨을 훅 내쉬는 이병렬의 반응으로 봐서 바로 주먹이 날아가기 좋았다. 반응을 살피던 최치곤과 김진용도 벌어질 일에 대비하는 눈치였다.
“태완이파라고 소문이 요란하길래 뭔가 있을 줄 알았더니 양아치 새끼들이었네. 가자.”
“양아치? 이게 어디서……?”
김동팔의 눈과 볼이 꿈틀하는데도 강성태는 미련 없이 발을 돌렸다.
“지금 가면 고영주라는 계집애가 힘들어져.”
그런 뒤에 걸음을 걷는 강성태의 뒷덜미를 김동팔의 야비한 음성이 붙들었다. 자존심이 팍 상한 순간에 저런 거짓말을 하기는 어렵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른다. 그러나 고영주가 김동팔의 손아귀에 잡힌 건 분명해 보였다.
걸음을 멈춘 강성태는 나직하게 숨을 내쉰 뒤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고영주는 너희들이 알아서 하고. 이런 대접을 받았으니까 그 보답으로 오늘 밤에 트와일라잇에 한 번 더 찾아가마. 오늘은 서운하지 않게 잘 준비하고 있어.”
김동팔의 눈이 또다시 꿈틀하는 것을 보며 강성태는 바로 걸음을 옮겼다.
“가자.”
강성태의 태도를 확인한 이병렬이 지시하면서 김진용과 최치곤까지 모두 뒤따라 움직였다.
그 직후였다.
“거기서!”
김동팔의 고함이 버럭 터졌다.
손님들이 놀라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강성태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커피숍 입구에서 나와 로비의 중간으로 향했을 때였다.
“야! 막아!”
김동팔의 고함이 또다시 터져 나왔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로비에 줄줄이 서 있던 덩치들이 우르르 움직여 로비로 나가는 방향을 막았다.
병신아. 사람 잘못 봤어.
손님들이 있다고 주저할 것 같았으면 여기 안 왔다니까.
앞을 막아선 덩치들 본 강성태는 분명하게 고개를 돌렸다.
“시작한다.”
앞뒤 없는 말이었다.
‘뭐든 해. 무조건 따를 테니까.’
그러나 말을 듣기 무섭게 이병렬이 묘한 미소를 그렸고,
‘알겠습니다, 형님.’
최치곤과 김진용이 볼을 씰룩이며 눈빛을 빛냈다.
강남에서도 고급 호텔에 꼽히는 아우라의 로비를 깡패들이 막아선 것은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거기에 커피숍을 텅 비워둔 것으로 모자라 대놓고 강성태 일행의 앞을 막는 건 설명조차 어려운 행동이었다.
협상할 때 한 가지만 명심하면 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밀리면 안 된다.
김동팔처럼 멍청한 인간을 상대할 때는 더욱 더 그렇다.
상대방이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고 나오면, 이쪽은 그보다 더한 반응을 보여줘야 한다.
이병렬과 최치곤, 김진용을 차례로 돌아본 강성태는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부터 보여줄게.
조태완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거든.
마음을 굳힌 강성태는 앞을 막아선 덩치들을 향해 바로 주먹을 날렸다.
휘익! 쩌어억! 쩌억! 쩌어어억!
“어머!”
“꺄악!”
강성태가 주먹을 날리기 무섭게 놀란 여자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직후에 세 명의 덩치가 흐물거리며 호텔 로비에 무너져 내렸다.
강남 조태완? 김동팔?
각오했다고. 오늘은.
쩌어억! 쩌어억! 쩌억!
여섯 놈을 쓰러트리자 바로 앞이 비었다.
강성태가 걸음을 옮긴 다음이었다.
다시 덩치들이 달려와 앞을 막았다.
이번에 막은 놈들은 반격할 준비를 해서 자세를 잔뜩 웅크린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얼마든지 해봐.
주먹질 백 번 날리면 끝나는 거, 시원하게 날려준다!
쩌어어억! 쩌억! 쩌어어어억!
강성태는 좀 더 힘을 실어 주먹을 날려 앞을 막은 덩치들을 바닥에 쓰러트렸다.
세 번의 주먹을 날린 직후였다.
“어딜 와, 이 새끼야!”
퍼억! 퍽! 퍼어억!
뒤에서 덩치들이 달려들었던 모양이었다.
이병렬의 고함과 함께 둔탁한 소리가 연속해서 들렸고, 손님들의 비명이 좀 더 크게 터져 나왔다.
퍼억! 퍽! 퍽! 퍼억!
강성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병렬이 원하던 일이었다.
최치곤이 바라던 역할이기도 했다.
견뎌주라.
나는 앞을 뚫을게.
이대로 가면 신고하는 손님들이 반드시 나온다. 경찰이 달려온다는 의미였다.
어디까지 가나 보자.
쩌어어억! 쩌억! 쩌억! 쩌어억!
강성태가 다시 덩치 넷을 쓰러트린 다음이었다.
멀찍이 돌아서 뛰어온 김동팔이 강성태의 앞을 막아섰다.
“죽고 싶어?”
놈의 눈알에 독기가 잔뜩 올라와 있었다.
분을 참지 못하는 놈, 꼭지가 돌면 이성이 날아가 뒤를 생각하지 못하는 놈이 보이는 전형적인 독기였다.
이런 놈을 어설프게 상대하면 정말 누구 하나 죽어 나가야 끝난다.
원하는 게 그거냐?
강성태는 고개를 좌우로 비틀었다.
“야, 이 양아치 새끼야. 누가 죽는지 볼래?”
이전에는 보인 적 없던 강성태의 거친 대꾸였다. 뒤를 막고 있던 이병렬까지 시선을 힐끔 돌리며 강성태를 보았다.
“최치곤. 회칼 가져온 거 있어?”
“예, 형님.”
강성태가 질문을 던지자 최치곤이 재킷 안쪽에서 날이 하얗게 빛나는 회칼을 꺼냈다.
“뭐 하자는 거야, 이 새끼야?”
단숨에 회칼까지 나오자 김동팔은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었다.
“병신.”
김동팔의 눈을 보며 욕을 뱉은 강성태는 오른손을 옆으로 내밀고 손바닥을 위로 펼쳤다. 회칼의 날을 잡은 최치곤이 손잡이를 강성태의 손바닥 위에 공손하게 놓아주었다.
“김동팔? 누가 죽는지 해보자. 내가 널 죽이는지, 여기 개떼들이 날 죽이는지?”
말을 마친 강성태는 회칼을 거꾸로 들고 김동팔을 향해 걸었다.
“야, 이 씨발 도라이……?”
강성태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놀란 김동팔을 향해 강성태는 단박에 달려들었다.
쩌어억!
김동팔은 쉽지 않았다.
회칼을 거꾸로 든 강성태의 주먹이 날아가는 그 짧은 틈에 상체를 비틀어서 왼쪽 눈가로 비켜 맞았다.
이 개새끼가!
거기까지였다.
쩌어어어억!
독이 오른 강성태의 왼손 주먹이 김동팔의 오른쪽 눈 안쪽에 제대로 꽂혔고,
쩌어어어억!
다시 회칼을 든 오른손 주먹이 왼쪽 눈 안쪽에 깊숙하게 박혔다.
김동팔은 뻣뻣하게 굳은 모습으로 넘어갔다.
살벌한 장면에 가뜩이나 조용한 로비였다.
털썩.
“꺅!”
딱딱한 호텔 로비에 딱딱하게 굳은 김동팔이 비참하게 널브러졌다. 비명을 질렀던 여자 손님이 급하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면서 로비는 설명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 정적에 휩싸였다.
“위아래도 모르는 개 양아치 새끼들. 보스가 만나자고 해서 왔더니 엉뚱한 새끼가 나와서 주접을 떨어? 주먹으로 해결하는 건 여기까지다. 누구든 앞을 막으면 목줄을 따 버릴 테니까 어디 한번 나와 봐.”
침묵이 깊은 만큼 강성태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로비에 선 태완이파 덩치들을 완벽하게 제압한 강성태가 둘러선 놈들을 천천히 돌아볼 때, 이병렬은 이를 지그시 깨물었고, 최치곤은 몸에 돋는 소름을 누르기 위해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현관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빛살을 받은 강성태가 걸음을 옮길 때였다.
“애들이 거칠게 나올 수 있지. 내가 늦은 바람에 그런 거니까 그만하고 들어와.”
뒤편에서 쇳소리 가득한 음성이 강성태를 붙들었다.
비척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키던 놈들을 제외하고 서 있던 놈들 전부 그쪽을 향해 고개 숙이는 것으로 봐서 조태완이 나타난 모양이었다.
강성태가 뒤를 돌아볼 때, 이병렬과 김진용, 최치곤이 고개를 짧게 숙였다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커피숍의 앞에 선 조태완과 강성태의 눈이 로비의 중간에서 부딪쳤다.
강하다.
조태완의 첫인상은 그랬다.
싸움 실력은 어떤지 모르지만, 커다란 조직을 끌고 있는 인간답게 강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정도의 위엄은 갖추고 있었다.
몸을 돌린 강성태를 보며 조태완 역시 놀라는 눈치였다.
등 뒤에 햇살을 받아 윤곽만 보이는 강성태의 눈을 보며 이를 지그시 깨무는 모습을 보며 짐작할 수 있었다.
“뭐 해? 차나 한잔 마시자니까.”
“태완이파 보스면 보스답게 굴어.”
“허허, 씨발. 오늘 개망신 톡톡히 당하네! 애들이 그럴 수 있다니까!”
“고영주를 인질로 잡은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아! 그년은 제 발로 걸어왔고, 내 이름 팔아먹었다고 해서 스위트룸에 챙겨놨다고 들었다. 그거 때문이면 그냥 보내주지.”
강성태에게 말을 건넨 조태완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스위트룸에 넣어뒀던 계집애. 앞으로는 어디 가서 내 이름 떠들지 못하게 단단히 가르쳐서 내보내.”
“예, 형님.”
덩치 하나가 상체를 허리까지 숙인 뒤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복도로 급하게 움직였다.
고영주는 해결했고.
조태완이 고개를 돌리기 전이었다.
강성태는 빠르게 이병렬에게 시선을 주었다.
‘괜찮지?’
‘원하는 대로 해. 무슨 일이 있든 따라간다.’
이병렬의 뜻을 확인한 강성태는 회칼을 돌려 최치곤에게 내밀었다.
덩치들은 물론이고, 조태완까지 지켜보는 앞이었다.
“커피숍 입구를 지키고 있다가 어떤 놈이든 안으로 들어오면 목줄을 따버려.”
“예, 형님.”
상체를 숙인 최치곤이 공손하게 두 손으로 회칼을 받고는 다부진 눈으로 커피숍 앞을 노려보았다.
다분히 의도적인 지시였다.
“커피 한잔 마시는 데 절차 참 길다!”
조태완이 뱉어낸 혼잣말이었다.
입구를 막으라고 했다. 그런데도 조태완이 강성태를 기다린다는 건 단 둘이 앉겠다는 의미였다.
김동팔은 무너졌고, 고영주도 풀려날 테니까.
5미터 안에서 단둘이 보자, 조태완.
강성태는 커피숍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