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4화
(25)
백색의 공간은 검게 물드는 것과 백색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했다.
애덤의 공세가 강해질 때에는 그의 주위가 흑색으로.
영의의 공세가 강해질 때에는 주위가 백색으로.
마치 줄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기운과 공격이 모두 공간에 반영되었다.
“크윽……!”
“흐아아아!”
두 사람 모두, 서로의 기운을 공격에 쓰는 대신 방어에 사용했다.
애덤은 검은 기운으로 영의의 뇌기를 빨아들였고, 영의는 백색의 뇌기로 애덤의 기운을 태워 버렸다.
영의는 그와 계속하여 맞붙는 동안, 그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매번 목격했었다.
뉴욕에서는 냉철한 눈빛을.
그 이후, 이성을 잃었을 때에는 분노와 증오를.
여기 오기 직전의 검은 공간에서는 열망과 호승심을.
그리고 지금은…… 광기에 불타오르는 눈빛만이 보였다.
“흐하하, 흐하하하!”
눈빛만 광기에 절여진 것이 아닌지, 애덤은 줄곧 괴성과 웃음소리를 내며 영의에게 덤볐다.
싸움의 방식도 계산이나 다른 수를 쓰는 대신, 몸에 있는 습관과 본능적인 움직임, 그리고 그동안 수련한 기술의 정수만이 나왔다.
그렇게 그저 광인처럼 계속 소리치기만 할 뿐이던 애덤.
그러나 그는 영의에게 공세를 가하던 어느 순간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차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군. 온몸이 삐걱거리고 있어.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야. 그리고…… 저기, 아직 검은색이군……?”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영의의 발아래에 있지만 흰색으로 변한 주변과 달리 여전히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바닥이 있었다.
애덤은 영문 모를 말을 한 직후, 광기에 불타오르던 눈 대신 차분하고 냉정해진 눈으로 영의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그에게 말을 걸던 존재가 갑자기 사라졌고, 그 덕분에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영의를 적대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너를 파멸시키고 싶어졌다.”
“뭐……?”
“나는 나의 소중한 이를 구하지 못했지만, 너는 구했으니까. 너에게도…… 아니, 최소한 네 여자에게도 누군가를 다른 공간에서 잃는 슬픔을 안겨 주고 싶어졌어.”
애덤은 영의의 과거를 봤을 때, 그가 게이트로 들어가 화연을 구하는 모습을 보았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애덤은 그런 용기를 내지 못했던 본인에 대한 자책감과 지금까지 쌓인 영의에 대한 적대감이 합쳐져 다시금 그를 공격하려 든 것이다.
“무슨 미친……!”
“너 혼자 여기서 죽어 줘야겠다.”
애덤은 최후의 발악을 하려는 모습을 보이다가…… 갑작스럽게 자신의 오른손으로 왼쪽의 손목을 그어 냈다.
투두둑.
그의 손목은 반쯤 잘린 채 덜렁거리고 있었고, 애덤은 완전히 잘려 나가지는 않았지만 검은색과 검붉은 피가 섞여서 뿜어져 나오는 손목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잘라 내려고 했는데, 잘리질 않는군. 처음에 가슴을 찌르려던 생각을 고친 게 정답이었어…….”
후두둑!
그는 팔을 휘둘러 주변에 피를 흩뿌렸고, 주변 공간에 그의 피가 튀어 흰색이 검붉은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팔을 계속해서 휘둘렀고, 그 움직임에 따라 그의 피가 점점 더 많은 공간에 튀었다.
“무슨 짓이지……?”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공간…… 거기서도 검은 힘으로 물들어 섞인 공간은 특수해서 내 힘이 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단순히 힘으로 물들이는 게 아니라 촉매가 있다면 네 힘으로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방을 전부 그렇게 물들인다면, 너도 여기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지……!”
최후의 순간, 애덤은 본인의 승리 대신 영의의 파멸과 패배를 택했다.
‘나도 갈 수 없으니, 너도 갈 수 없겠지……!’
애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이빨을 드러내며 그의 최후의 광기를 영의에게 선보였다.
“이런 미친……?”
영의는 다급하게 주위의 오염을 막기 위해 뇌기를 뿜으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의 주변에는 피가 수도 없이 튀어 있었고, 그 피들은 모이면 모일수록 오염을 더 빠르게 가속시키는 듯 주변 일대를 모두 물들여 놓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래도 천장 같은 데는 아직 흰색이니까……!’
영의는 그 말을 듣고 곧바로 어디로든 다른 세계로 향하려 했지만, 머지않아 애덤의 말이 사실인 것을 깨달았다.
‘이동이 안 돼……!’
‘알림아?’
알림이에게서도 대답이 없는 상황.
영의가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하자, 어느새 바닥에 쓰러진 애덤이 그를 올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크흐, 흐흐…… 표정을 보니 정답이었나 보군. 마지막 광경으로는…… 참 좋은 광경이야…….”
애덤은 영의의 당황한 표정을 마지막으로, 희미해져 가는 의식의 끈을 놓았다.
“이 미친놈이……!”
영의와 애덤이 이 장소에 오게 된 것은 우연에 가까웠지만, 애덤은 영의가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최후의 수단을 썼다.
그 최후의 수단은 그의 목적에 걸맞게 제대로 작용했다.
“하아, 망했네.”
영의는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아 의식을 잃은 애덤을 쳐다보았다.
“이 미친놈 하나 때문에 지금 내가…….”
지금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이곳에서 나갈 수도 없는 상황.
만약 용신이 자신의 부재를 눈치채고 구해 주러 온다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내가 어딜 가도 살아남을 거란 걸 알고 있으니까 어지간해서는 안 오겠지…….’
용신이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알고 있던 영의는 우선 애덤이 죽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상처를 뇌기로 지졌다.
애덤은 지금 의식을 잃은 상황이었기에, 뇌기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의 상처 부위를 태워 출혈을 막았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영의는 검게 물든 바닥과 대비되는 새하얀 허공을 바라보았다.
“하아…… 거지 같네. 친구도, 가족도 없이 혼자…… 아니 이렇게 쓸쓸하게 죽어야 한다니.”
‘그러고 보니 내 인생이 갑자기 바뀐 게 대충 언제쯤이었더라……?’
죽음을 앞에 두고 있으니, 갑작스럽게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한 영의.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가족과의 추억 대신 지금 이 상황과 가장 밀접한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아마 번개 맞은 후에 배달을 하려고 했을 때였지. 헬멧도 없는데 디스플레이가 눈에 들어왔던…….’
과거, 낙뢰 사고 이후 통장 잔고를 모두 탕진해 낙담하며 호찬의 가게에서 푸념하던 때.
영의는 과거의 때를 떠올리며, 지금 상황과 비교하자 작게 웃음이 나왔다.
“……푸흣.”
‘지금이랑 비슷하네. 꿈도 희망도 없는 건. 번개를 맞은 뒤가 아니라 뿜어낸 뒤고, 불평불만을 들어 줄 상대가 없는 것만 빼면. 그때도 아무런 생각 없이 있다가 갑자기 알림이한테 메시지가 왔었지.’
그때 당시와 지금을 비교하던 영의는 문득 눈앞에 메시지 창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새로운 주문이 있습니다.]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말투지만 그 당시에는 일거리였고 조금 지났을 시기에는 기쁨과 흥미를 유발하는 메시지가 된 주문 메시지.
‘그래, 이렇게 생겼었지.’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려는 목적 3, 어차피 죽을 게 뻔한데 못할 게 뭐 있냐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 7의 비율로 영의는 눈앞의 메시지에 손을 갖다 댔다.
영의의 손이 메시지 창이 떠 있는 공간에 닿은 그 순간, 메시지 창이 사라졌다.
‘……역시 헛것이었나? 그보다, 알림이한테는 신세 많이 졌었는데 고맙다는 말도 못 했네.’
그러나, 메시지 창이 사라진 직후 또 다른 메시지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주문인: 제가, 알림이가 사용자에게 요청하겠습니다.]
[주소지: 집으로 돌아와 주십시오, 사용자.]
[주문 물품: 몸 건강히, 웃으면서 와 주시길 바랍니다.]
알림이가 그에게 보낸 메시지로 추정되었다.
영의는 바깥과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여기서 죽을 일이 없다는 사실에 기뻤지만, 메시지 창의 내용에 감동했다.
‘……보상은?’
[보상: 그런 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서비스로 안 될까요? 라고 요청해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런 보상은 내가 해 줘야겠지. 길을 모르는데, 자동 안내 좀 해 줄래?’
[찾아오는 길: 자동 안내를 따라오십시오.]
영의는 격전 후 앉아 있는 바람에 힘이 조금 풀린 다리를 억지로 일으킨 뒤, 비틀거리면서도 눈앞의 메시지 창이 알려 주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금 이 길 안내를 받는 것과 차원 간의 배달 일은,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 * *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한 공간.
그 공간에서 용신이 누군가를 짓밟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 다 했냐?”
-어떻게…… 어떻게 이 나를……!
용신의 발아래에 깔린 누군가는 몸에서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거, 힘 찔끔찔끔 모은 거로 강해졌다고 생각한 게 멍청하지. 망하기 직전인 세상에서 힘을 모아 봐야 그게 얼마나 된다고.”
-나, 나는 분명 관리자로서의 힘과 심연의 힘까지 합하여 누구보다 강한 힘을 손에 넣었을 텐데……!
지금 용신의 발아래에 패배하여 쓰러진 이는 다름 아닌 차원의 관리자들 중 하나였다.
그는 본인의 힘을 키우기 위해 과거로 회귀하는 힘을 가진 애덤에게 폐기된 차원의 심부름꾼들의 능력인 시간 이동을 일부 주었다.
그 능력의 근원은 그를 포함한 다른 관리자들로부터 조금씩 나오고 있었기에, 애덤이 과거로 회귀할 때 쓰는 힘의 부담도 적고 쓰지만 않을 뿐 정식으로 인가된 힘이었으니 수상하게 여겨질 염려도 없었다.
거기다가, 애덤이 과거로 회귀함에 따라 버려진 기존의 차원을 독식했고 이내 그 힘을 심연에 오염시켜 더욱 증폭시키기까지 했다.
그렇게 다른 관리자들과 비교해도 적수가 없었을 그였을 테지만, 거짓말처럼 용신에게 패배했다.
“그러니까 그 얼마 안 되는 거 심연에 푹 담가서 적셔 봐야 얼마나 나오겠냐고. 아무튼 가끔가다 이런 멍청이가 나와서 문제라니까?”
-이럴 리가 없다, 불멸이어야 할 내가 어째서……!
“미안한데, 나도 불멸이란다. 자, 가자.”
용신은 관리자의 머리를 붙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고, 관리자는 그가 자신을 장난감 다루듯 한 것이 각인되었기에 공포에 질려 그를 쳐다보았다.
-어, 어딜 가는 거냐!
“너 잡아 가두고 교정시켜 줄 양반들한테. 일손 하나가 아쉬워서 살려 두는 거야. 옛날엔 죽였어. 아…… 하긴, 그렇게 다 죽였으니까 모를 만도 하겠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된다. 어째서……!
“니예, 니예. 그런 사소한 건 나중에 말해야 착한 어린이예요.”
용신은 이 사태의 근원인 관리자를 유폐시킨 뒤, 그가 일으킨 일들을 수습하다 누군가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
“쓰읍…… 일단 이걸 끊어야 하는데. 어디서 잘못됐지?”
관리자가 빼돌렸던 힘들을 복구하기 위해 살펴보고 있던 그때, 그의 귓가에 목소리가 울렸다.
[여행자 님? 사용자와의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알림이의 목소리와 그 말의 내용에, 용신은 의문을 표했다.
“거의 대부분은 연결 가능하지 않았나……? 걔가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어서 다른 데로 가겠냐? 다른 곳이랑 연결된 건 다 끊어 놨는데.”
용신은 영의의 안전에 대해 별걱정을 하지 않았다.
어디 가서 혼자 객사할 실력도 아니었고, 차원 간 이동 능력이 괜히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뭘 해도 자기 몸 하나는 뺄 텐데. 뭐 멍청한 짓만 안 하면…….’
[맞습니다. 하지만 방금 전 사용자가 있던 ‘심연’ 공간에서 나오던 미약한 신호마저도 끊기고 말았습니다. 사용자의 안전이 염려됩니다.]
하지만 알림이의 말을 들은 용신은 복구 작업을 하던 손길을 멈췄다.
“잠깐, 심연에서도 신호가 간다고? 근데 그것도 끊겨? 싹 고립시켜 놓지 않는 이상 그럴 장소가 몇 개 없는데.”
[그렇기에 안전이 염려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불러 주는 좌표들로 전부 통신 연결해.”
[내용은 어떻게 할까요?]
“네가 제일 잘하는 거. 그놈이 보면 이거다 할 만한 그런 거로.”
[……알겠습니다. 사용자와 제가 가장 먼저 나눈 대화로 하겠습니다.]
* * *
알림이가 일하는 백색의 공간.
원래는 책상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상당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책상은 갈색의 나무 책상으로 바뀌어 있었고, 책상의 옆에는 스탠드와 책, 인형 등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책상 앞에는 백색으로 가득한 주변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고급 사무용 의자가 놓여 있었다.
알림이는 그 의자에 앉은 뒤 영의에게 보낼 메시지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이 말이겠지요.”
타다닥, 타닥.
그녀는 타이핑을 시작하며 작게 미소 지었고, 메시지의 내용이 완성되자 곧바로 발신했다.
[새로운 주문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