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2화
(23)
영의와 애덤의 싸움은 다른 세계에서도 이어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의는 과거에 갔던 다른 세계의 장소를 번갈아 이동했다.
한곳에 계속 두었다가는 지구에서처럼 균열을 발생시킬 게 뻔했으니,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가능하면 한쪽 세계에서만 방치시켜 두고 그대로 죽을 때까지 패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니까.’
무림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애덤은 힘을 공급받지 않아도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재생력이 있었다.
거기다가 시간이 오래 지체된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균열을 만들기까지 했으니, 성가시고 귀찮아도 이만큼 본격적인 상대가 따로 없었다.
‘아, 진짜. 똑같이 망하기 직전의 세상으로 갔으면 좋은데.’
마음 같아서는 멸망 직전의 무림 같은 세계로 가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선택지에 없었다.
‘하필이면 그 아저씨가 다른 세계랑 연결된 부분을 다 끊어 놔서…….’
용신이 예전에 그를 데리고 다른 차원과 지구와의 접점을 끊는 것을 옆에서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영의는 자신이 다녀온 세계로밖에 갈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도움이 되었다.
무림에서 벗어나 가장 먼저 도달한 세계는 베키와 일라이저가 있는 곳, 아리안델이었다.
“영감님! 도움!”
영의는 마탑 쪽에서 냅다 소리 질러 일라이저를 불렀고, 일라이저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뜻밖의 상황을 마주했다.
“음? 뭐가? 아니…… 무슨?”
검은색의 무언가와 맞서 싸우고 있는 영의와, 둘이 하늘에서 땅으로 추락하고 있는 상황.
일라이저는 대마도사답게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어도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딥 프리즈>, <레비테이션>.”
그는 검은 물체를 얼음 속에 가둔 뒤, 영의와 얼려 버린 물체를 서로 떼어 놓고 공중 부양을 시켰다.
“후우, 고마워요. 영감님.”
“그래……. 일단 상황이 진정됐으니 이야기를 좀 들어도 되겠는가?”
“그 전에, 저것 좀 확실하게 얼려 주세요. 그럼 얘기해 드릴게요. 그리 짧진 않겠지만.”
영의는 그 덕분에 한숨 돌릴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일라이저의 도움을 받았다.
“계속 얼려 주고만 있으면 되는 건가? 일단 한세월 기다려도 안 녹게 만들어 주겠네.”
일라이저는 얼음에 손을 대고 마력을 불어 넣었고, 그가 얼음에 손을 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얼음의 크기가 커져 갔다.
“네, 아주 그냥 꼼짝도 못 하게 이대로…….”
그러나, 점점 더 크기를 키워 가던 얼음은 갑작스럽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쩌저적.
“아니, 비록 간단한 마법이라고는 해도 내가 얼렸는데?!”
일라이저는 얼음이 갈라지기 시작하고, 거기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오자 당황하여 그것을 메우려 했다.
“손대면 안 돼요!”
영의가 얼음과 일라이저의 사이로 끼어들며, 그를 도로 밀어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얼음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듯 왜곡되는 것이 보였다.
‘얼려진 상태로도 저런다고? 아니, 오히려 죽을 것 같으니까 발악하는 건가?!’
“영감님! 급하니까 번개 아무거나 쏴 줘요!”
영의는 지금 이 얼음덩이와 그 안의 애덤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동시에 휴식을 할 수 없으니 일라이저의 마법으로 힘이라도 보충하려 했다.
“아, 알겠네! 떨어지게!”
예전에 영의에게 마법진으로 시술해 주었던 마법, 썬더 캐논.
일라이저는 양손에 그것을 캐스팅하며 금방이라도 발사하려 했고 영의가 비켜 주기만 하면 저 얼음과 그 안의 검은 것을 동시에 태워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영의는 얼음을 붙잡은 채, 번개를 자신에게 쏘라고 소리쳤다.
“아니, 저한테요!”
일라이저는 영의가 한 말에 잠시 멈칫했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와 영의의 적성을 떠올리고는 곧바로 그의 등으로 양손을 내밀었다.
“……그래, 자네는 그쪽이 특기였지. 알겠네!”
콰릉!
영의는 자신의 등에 뜨거운 창이 두 개 꽂히는 느낌을 받으며, 온몸에 힘이 차오르는 고양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렇게 발악할 거면 딴 데로 가자고……!”
영의와 애덤, 둘은 이곳에 나타났을 때처럼 순식간에 허공으로 사라졌고 일라이저는 둘이 사라진 장소를 잠시 살펴보다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방금 전 보았던 광경을 머리에서 계속 되뇌며, 새로운 마도의 길을 열어 볼 궁리를 시작했다.
“공간에 간섭하는 힘으로 절대적인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흠.”
맑은 하늘에 있을 수 없는 천둥소리가 울려 퍼진 뒤, 그 소리에 놀란 이들이 바깥으로 나왔을 때에는 살짝 젖은 잔디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잔디밭만이 남아 있었다.
* * *
영원의 숲 상공.
영의는 이곳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나는 곳이 이곳밖에 없었기에 여기로 애덤을 데리고 왔다.
‘시라나 미딜한테는 미안하지만, 정령들을 동원해서 처리하면……!’
영의가 애덤을 처리할 방법을 궁리하며 하늘에서 지상으로 수직 낙하를 하고 있던 그때, 얼음의 일부가 깨지며 그 안에서 손이 튀어나와 영의의 손목을 붙잡았다.
“거기, 까지……다!”
“?!”
의식 없이 괴성만 질러 대던 애덤은 얼음에 갇혔을 때 의식을 회복한 듯, 그 안에서 눈을 똑바로 뜨고 영의를 노려보고 있었다.
뿌드득, 파앙!
이성을 되찾은 것과 동시에 힘도 더욱 회복한 것인지, 애덤은 얼음을 부수며 영의를 잡고 자신에게 끌어당겨 꽉 안았다.
“여행 고마웠다. 이젠 내가 초대할 때야.”
영의를 붙잡은 애덤의 팔은 마치 바이스처럼 단단히 조여진 상태였고, 힘이 채워진 상태의 영의도 그것을 풀 수 없었다.
뿌드득, 뚜둑.
애덤이 관절이 뽑히든 뼈가 부러지든, 개의치 않고 그를 끌어안고 있었으니까.
“심연 속으로……!”
애덤이 그렇게 말한 직후, 영의는 울창하고 푸르르던 영원의 숲이 아닌 칠흑에 가까운 공간으로 이동되었다.
어째서 칠흑에 가까운 공간인가 하면, 주위가 모두 검은 가운데 지금 영의와 애덤이 발을 딛고 서 있는 부분만이 비교적 밝았기 때문이다.
마치 머리 위에서 은은하게 밝은 조명이라도 비치는 듯, 그와 애덤이 서있는 네 평 남짓한 짙은 회색의 공간만 존재를 식별할 수 있었다.
주변에 대한 파악을 끝낸 영의가 애덤을 쳐다봤을 때, 애덤은 양팔을 축 늘어뜨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크으으…… 아프군.”
지금까지 보여 줬던 모습과 달리, 그의 팔은 축 늘어지고 피멍이 든 상태에서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는 피멍이 조금씩 사라지고 모양이 어긋난 팔이 천천히 본모습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엄청나게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다.
“망할, 이제 드디어 몸이 한계인 건가? 후우…….”
애덤은 자신의 양팔을 내려다보며 자조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무한 재생은 아닌가 본데.”
“수명을 대가로 하는 힘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마지막 여력은 남아 있다.”
애덤은 피멍이 들고 축 늘어져 있는 팔을 들어 올려 주먹을 쥐었고, 그의 양팔은 부들거리긴 해도 마지막 싸울 힘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영의도 그에 맞서기 위해 뇌기를 끌어 올렸지만, 어째선지 몸에 넘쳐야 할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평소라면 스파크가 튀고 힘이 넘쳐야 할 몸이었지만, 어째선지 힘을 끌어 올려도 어느 지점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영의가 자신의 손을 보며 의문을 품자, 애덤이 그 의문에 대답해 주었다.
“여기는 심연이다. 아까 와 봐서 알겠지만, 그 어떤 힘도 다 집어삼켜지지. 내가 심연에서 받았던 힘마저도. 준 것을 뺏을 정도로 탐욕스러운 공간인데, 다른 힘이라고 안 삼켜질 것 같아?”
“결국…… 개싸움이네.”
영의는 싸움을 대비해 양손을 들어 올려 주먹을 쥐었고, 애덤도 어느 정도 회복된 팔로 그와 맞서기 시작했다.
“그래…… 결국 개싸움이지! 결과는 누구 하나가 죽는 거겠지만!”
애덤과 영의의 싸움은 지독하면서도 치열했다.
서로 주먹을 치고받으면서도 망설임이나 주저함은 없었고, 오히려 본인이 맞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상대를 때리는 데에 집중했다.
애덤은 지금까지의 싸움 방식에서 기인한 야만적이면서도 호전적인 전투였고.
“흐으아아아!”
영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애덤을 여기서 쓰러뜨려야 한다는 필사적인 마음에서 나온 전투였다.
“제발 여기서 끝내자!”
누군가 하나가 얼굴을 맞으면 다음 차례에 얼굴을 때렸고, 뼈를 맞으면 뼈를 때렸고, 피가 터지면 피가 터질 때까지 때려 댔다.
그야말로 누가 먼저 포기하느냐가 승부를 좌우하는, 유혈이 낭자한 치킨 게임.
둘 모두 몸에 극한으로 밴 기술과 전투 감각이 있었지만 그 둘의 마지막 싸움은 원시적이고 기술 따위 없는 힘과 배짱의 싸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끝은…… 다름 아닌 영의의 패배였다.
“장소만…… 달랐어도…….”
털썩.
‘여기가 심연이니 뭐니 하는 곳이 아니라 다른 곳…… 하다못해 절벽에서 싸웠더라도 이렇게 끝나진 않았을 텐데. 마지막 수가 이걸…….’
영의는 자신의 우세가 마지막 한 수로 뒤집혔다는 것을 후회하는 생각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애덤도 그리 멀쩡하지만은 않았다.
영의가 비록 무릎 꿇고 쓰러졌다고는 해도, 애덤도 그와 비슷하게 만신창이가 된 데다가 휘청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겼다……! 흐, 흐하…… 아…… 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애덤도, 이내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무릎을 박은 뒤 영의의 옆으로 엎어졌다.
쓰러진 둘은 그렇게 짙은 회색 바닥 위에서 조금씩 의식과 기력을 잃어 갔고, 회색 바닥이 그런 둘의 몸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회색의 바닥은 모양을 바꾸고 이리저리 뒤집히더니 구체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구체는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수축하기 시작했고 그 크기가 처음의 절반 정도가 되었을 때 공기 중에 녹아들듯 희미해지며 공간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둘의 싸움이 벌어졌던 심연은, 언제나처럼 검은 상태로 남아 아무런 변화를 보여 주지 않고 있었다.
* * *
처음에 느낀 것은 허공에서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마치 파도에 몸을 맡겼을 때처럼, 공중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0.1층 간격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는 기분.
금방이라도 잠에 들 것만 같은, 몽롱하고도 신비한 기분.
‘으, 으으…….’
영의는 그런 몽롱한 정신 속에서 흐릿해져 가는 이성을 부여잡으려 하고 있었다.
“……핫.”
그가 마침내 이성을 찾고 눈을 제대로 떠 주변을 파악하고 있을 때, 그는 방금 전 느낀 감각 그대로 허공에 떠 있었다.
“여긴…… 어디?”
영의가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그는 이곳이 한국이 아니라고 직감했다.
아무리 한국이 영어를 많이 쓰더라도, 간판을 모두 영어로 해 놓고 다니지는 않으니까.
“……여긴 대체 어디야. 그보다, 집은 어디지?”
그는 아직까지 자신이 애덤과의 싸움 끝에 다른 곳으로 튕겨 나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의식중에, 그는 자신이 집으로 금방 돌아갈 수 있고 이곳이 어딘지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공중에 둥둥 떠다니면서, 영의는 주변을 살펴보며 상황을 파악하려 하고 있었으나 그의 귀에 갑작스럽게 크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빠앙!
“윽?!”
지나가는 차에서 나는, 경적 소리.
하지만 길에서 나는 수많은 차량들의 소리는 귀마개를 끼고 듣는 듯 작게 들렸지만 방금 전 들렸던 경적 소리는 마치 바로 앞에서 듣는 것처럼 선명했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누군가의 성난 목소리.
-똑바로 보고 다녀!
한 나이 든 남성의 목소리에, 그보다 더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나 똑바로 보고 다니시지!
어떤 소녀가 차의 운전자와 신경전을 벌이는 듯한 대화의 내용.
그리고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앨리스, 그냥 사과하고 가자.
-안 돼, 물러날 줄 알고?
영의는 이 목소리들이 뭔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고, 그 소리들이 들려오는 곳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