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6화
(17)
한 남자가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크윽, 크헉…….”
온몸에 기력이 사라진 듯, 바닥에서 비틀거리는 남자.
“으웁!”
남자는 비틀거리면서도 갑작스레 몰려오는 구토감에 곧바로 변기로 향해 몸에서 역류하는 것들을 모두 게워 내었다.
촤아아아.
“큭, 어윽. 후웁.”
그저 몸 안에 있는 것들을 최대한 빨리 내보내어 살아나려 하는 신체의 작용이었음에도, 남자는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죽인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한번 토하려고 할 때마다 뼈마디가 쑤시고, 상체 근육이 죄다 꼬이는 것 같군……. 더군다나…….’
남자는 자신이 토해 놓은 것들이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는 변기를 쳐다보았다.
물 아래로 조금씩 내려가는 검은 진흙덩이 같은 물체와, 그 위에서 변기의 물을 조금씩 붉게 물들이고 있는 혈액.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지금 배치 중인 병력들만 모두 쓴다면…… 그땐, 그때는 완전했던 때로 돌아가는 거야…….”
콰르르르-
남자는 변기의 물을 내린 뒤,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키고는 입을 헹구고 화장실에서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그는 곧바로 자신과 오랜 세월 함께해 왔던 태블릿을 들었고, 거기에 표시된 지도를 살펴보았다.
[유럽: 80%]
[아프리카: 60%]
[아시아: 70%]
[북아메리카: 100%]
[남아메리카: 90%]
[오세아니아: 95%]
전 세계의 대륙과 국가, 그리고 주요 도시가 표시되어 있고 무언가 진행되고 있다는 진행률이 표시되어 있었다.
“앞으로 대략…… 일주일인가.”
지금까지의 진행 속도와 앞으로의 계획을 고려했을 때, 남자는 일주일만 있으면 자신의 계획과 꿈이 이뤄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행복한 생각도 잠시.
운명은 그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게 둘 수 없다는 듯, 그에게 전화가 왔다.
-방으로 연락했는데 안 받아서 전화를 걸었는데! 지금 큰일이 터졌습니다!
그는 조금 전까지 화장실에 있었으니, 인터폰이 아니라 태블릿이나 전화기로 연락을 했어도 못 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무슨 볼일이지?”
-습격이 왔어요! 선지자 양반, 이건 예상 범주 내에 없던 일이잖아!
“……습격?”
선지자는 자신에게 전화를 건 부하, 닷지에게 뜻밖의 말을 전해 들었다.
‘습격이라니, 은신처의 위치를 알아낸 건가? 물론 철저하게 숨기지는 않았다지만 그래도 쉽게 알아낼 곳은 아닌데.’
그때, 선지자는 얼마 전 연락이 끊긴 또 다른 부하에 대해 떠올렸다.
‘스콧 밀러인가. 붙잡혔나? 하지만 나름대로 프라이드도 있고 한 단체의 수장인 만큼 그렇게 입을 싸게 놀릴 리가 없을 텐데.’
은신처의 정보를 알 만한 인물 중 그나마 의심 가는 게 밀러였지만, 선지자는 밀러의 몸 상태와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인물에 대해 몰랐기에 의문을 풀 수 없었다.
선지자는 의문도 의문대로 궁금하긴 했지만 그걸 생각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현재 상황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말해 봐라, 누가 쳐들어왔지? 일단 의심되는 건 그 5인조인데.”
-5인조는 맞지만…… 두 명뿐입니다. CCTV에 지금 나오고 있을 겁니다.
“……뭐?”
선지자는 다급히 방 안에 있는 모니터들 중 하나로 달려갔고, 거기에서는 흰색과 은색 옷을 입은 2인조가 건물을 종횡무진하는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탐구자들>의 프로젝트 진행 상황은?”
-예?
“개조 실험! 다 끝났냐고!”
-거의 다 끝나 가고 있습니다. 다른 실험장에서 진행 중인 것도 있고…….
“지금 진행 중인 것들만 빠르게 마무리하라고 해. 그리고, 남은 인원들은 전부 지정 위치로 이동시킨다.”
-아, 알겠습니다.
선지자는 닷지와의 통화를 끊은 뒤, 곧바로 방 밖으로 나섰다.
터엉!
그가 다급하게 문을 닫은 순간, 그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바빠 보이는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중후하면서도, 듣는 사람의 마음을 이끌리게 하는 달콤한 목소리.
성우나 아나운서였다면 엄청난 인기를 끌고도 남았을 목소리였겠지만, 선지자는 목소리의 주인에 대해 알고 있었다.
“……별것 아니다. 네가 필요하다고 한 일들은 모두 계획대로 진행 중이니까, 신경 쓰지 마라.”
-글쎄, 그렇게 순탄하게 풀리진 않을 것 같은데. 네가 진행시킨 일들로도 목표치에는 아주 조금 모자랄 것 같단 말이지.
“그땐 내가 알아서 하겠다! 끼어들지 마!”
-이런…… 그래도 되는 건가?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살려 줄 희망한테?
“이미 계약은 맺어졌다. 그리고 네가 원하는 요구 사항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이러는 것일 뿐이라고……!”
-그래…… 그러고 보니 너도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살았었군. 까칠해질 만도 하지. 그래도 걱정하지 마. 네가 원하는 것은 이루어질 테니까. 행운을 빌어, 애덤.
달콤한 목소리와 아주 잠깐의 대화만 나누었을 뿐인데도, 선지자 애덤은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본래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서였는지…… 아니면 저 목소리 때문인지……. 아무튼, 중요한 건 지금 상황을 해결하는 거다.’
애덤은 머리가 어지럽다고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도를 걸어 나가는 그의 발걸음은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더욱 굳건하고 힘찬 발걸음으로 변해 나갔다.
그 시각, 현재 습격당하고 있는 은신처는 그야말로 비상 상황이었다.
은신처의 본거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이런저런 물품을 반입하는 목적을 겸하는 대형 창고에서 섬광과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번쩍!
“으아아악!”
번쩍!
“살-!”
한 번의 섬광에 한 명의 피해자.
빛이 한 번 보일 때마다 누군가 한 명은 비명을 질러 대며 나가떨어졌다.
그야말로 압도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광경의 중심에는 은색 옷차림으로 주위에서 달려드는 이들을 전부 때려눕히고 있는 영의와 화연이 있었다.
“죽어라!”
대검을 휘두르며 잽싸게 돌진해 온 남자의 목에 있는 울대를 그대로 발로 차며 뒤로 날려 버리는 영의.
콰앙!
남자는 벽으로 날아가 충돌한 뒤 정신을 잃었지만, 영의는 남자의 생사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근데, 우리 진짜 이래도 되는 건가? 너무 뒷일 생각 안 하고 날뛰는 것 같은데.”
“다 엎어 버리다 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냐고 생각한 건 선배가 먼저 아니에요?”
영의의 옆에는 갑옷 위에 얼음으로 된 갑주를 추가적으로 덧대어 장비 중인 화연이 덤벼드는 이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둘 다, 당하는 상대방의 목숨이나 안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강경한 대응이었다.
“아니, 뭐 그 말도 틀린 건 아닌데. 과격한 것도 정도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글쎄요? 저기서 대응하는 걸 보면 적당한 것 같은데…….”
화연은 그 말을 하며 천장 부분을 가리켰고, 영화에서 나오는 함정처럼 천장의 한 부분이 열리고는 그곳에서 기관총이 튀어나와 그들을 조준하기 시작했다.
철컥, 위이잉-
총알 한두 발 정도 맞는다고 아파하거나 큰 부상을 입을 상태의 둘이 아니었지만, 기관총에서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는 건 얘기가 조금 달랐다.
“저건 적당하지가 않은데!”
파지직!
영의는 천장을 향해 뇌창을 던졌고, 다행히 기관총이 불을 뿜기 전에 그것들을 멈출 수 있었다.
피픽, 퍼엉!
그가 날린 뇌창에 기관총에 탑재된 총알의 화약이 자극받은 것인지, 기관총은 불꽃을 일으키더니 일부가 폭발하며 망가졌다.
“후우, 전자식 기계라서 다행이네.”
“선배? 저기 문이 열리는데요?”
둘이 창고의 내부를 비우고 있을 때, 창고 안쪽에서 육중한 철문이 열리는 것과 함께 안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시아-백인계 혼혈과도 같은 외모를 가진 한 남자가 여유로우면서도 힘찬 발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화연은 그 얼굴을 어디서 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잠깐 생각에 빠질 뻔했지만, 이내 싸움에 집중하기로 했다.
“……응? 어디서 본 사람 같기도……. 아니, 나중에.”
이미 창고 내부에서 저항하던 이들은 대부분 쓰러지거나 무력화된 상태.
지금 이 자리에서 멀쩡히 서서 움직이는 사람은 영의와 화연, 그리고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낸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반갑군. 그동안 내 계획을 아주 사사건건 방해해 준 인물과 만나게 되니까 참 감회가 새로워.”
영의는 남자의 말을 듣고, 그의 정체를 곧바로 짐작했다.
“그렇다면 네가 선지자……?”
“그래, 한때는 그렇게 불렸지. 나도 처음에는 그 별명이 정말 좋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별로 재미가 없었고……. 아니지. 이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닌데. 이봐, 나는 왜 도중에 잡담을 나누고 있는 거지?”
선지자, 애덤은 스스로 말을 꺼냈으면서 그 이유를 영의에게 묻는 기행을 보였다.
“네가 먼저 떠들기 시작했으면서 우리한테 묻는 건가?”
“아아, 그래. 내가 먼저 얘기했지. 미안해. 내 이름은 애덤이야.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도 안했군. 자네 이름은?”
이내, 자신의 이름까지 밝히며 마치 업무 자리에서 영업 사원끼리 처음 만나기라도 한 듯 서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려는 모습까지 보였다.
“얘기해 줄 이유가 없는데.”
“유감인걸! 사람이 기껏 이름을 밝혔는데도 밝히기 싫다니. 그건 예의가 없다는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우리가 이럴 사이는 아니군? 이유는 모르겠지만 친근감이 들어서, 실례.”
애덤의 횡설수설하는 행동과 앞뒤가 안 맞는 말에, 영의는 그가 미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을 했다.
“……조금 미친 것 같은데.”
“지금까지 한 짓을 보면 미친 사람은 맞죠.”
거기다가, 그 행동들은 지금까지 그와 다른 이들을 귀찮고 고생하게 했던 선지자란 인물이 맞는지도 의문이 들게 했다.
“진짜 선지자는 맞나?”
그렇게 영의가 애덤을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 애덤의 눈 흰자가 일순간 검은색으로 변했다가 다시 흰색으로 돌아왔다.
“아아, 으음.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더라……. 아하, 그래. 으음.”
애덤은 흰자가 검어졌던 사이에 제대로 정신을 차린 건지, 영의와 화연을 번갈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이상한 모습을 봐서 당황했겠지만, 나는 너희가 아는 선지자가 맞다. 부하로 텐징과 파드레를 부렸고, 네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서울에서의 아카데미 습격도 내가 지시했었지.”
자신이 저질렀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 애덤은 양손을 들어 올렸고, 그의 양손에서 검은색 기운이 배어 나오는 것을 본 영의는 곧바로 전투태세를 취했다.
“진짜 선지자인지는 둘째 치고, 그 모습을 보면 일단 싸워야 되겠네.”
지난번, 밀러와 싸웠을 때에도 저 알 수 없는 검은색의 힘…… 용신에게 듣기로는 심연의 힘이 나오는 순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었다.
‘단순한 힘 싸움에서 아주 잠깐 힘을 써도 그 정도였는데, 본격적으로 쓰면 어떻게 될지…….’
“선배, 같이할게요.”
“그래.”
“2:1이라! 좋지. 어디 한번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싸워 보자고!”
영의와 화연은 애덤에게 2:1의 싸움을 시도했고, 애덤은 그런 둘의 협공에도 개의치 않고 웃으며 둘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가 꺼낸 말에 담긴 뜻을 알아채지도 못하게 시작된 애덤의 선공으로, 영의와 화연은 그가 이곳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이유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 * *
그 시각, 맨해튼의 뒷골목.
“으으…… 으어어…….”
한 남자가 몸이 불편한 듯 비틀거리며 골목의 벽에 몸을 부딪혀 가며 걸어갔다.
“으, 크윽.”
남자는 이내 바닥에 쓰러져 힘없이 숨을 내쉬었고, 뒷골목과 길거리를 오가는 노숙자 중 한 명이 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이봐, 괜찮아요? 정신 차려 봐.”
노숙자는 남자의 몸을 흔들었지만, 남자가 몸을 떠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바로 그의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뭐…… 구급차 정도는 불러 줄게.”
오늘 술을 사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약간의 수고비를 받는 대신 남자를 살려 주려는 생각을 한 노숙자는 그의 품에서 무언가 질척한 것을 느꼈다.
“으우, 뭐야 이건?”
따뜻하면서도 질척한 느낌에 노숙자는 손을 꺼내어 쳐다보았고, 그의 손에 검은색의 무언가가 묻어 있자 그는 불쾌감에 손을 털어 버리려 했다.
“지저분하게.”
그러나 손을 힘차게 털어도 검은색의 무언가는 떨어지지 않았고, 자신의 낡고 해진 코트에 문질러도 검은 액체는 없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노숙자가 검은색 액체의 정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려 할 때, 검은 액체가 그의 몸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푸욱.
“으앗, 으아악!”
노숙자는 손을 부여잡고 제자리에서 뛰어오르거나 여기저기 부딪히며 난리를 피우고 있었지만, 맨해튼 뒷골목에서 마약이나 알코올 금단증상으로 난리를 피우는 노숙인은 한둘이 아니었기에 그는 금방 무시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