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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 배달은 나만 가능하다-315화 (315/325)

제315화

(16)

밀러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낯선 곳에서 눈을 떴다.

‘……응? 어두운데…….’

처음 느낀 것은 자신이 본 적 없는 장소의 풍경이 보인다는 것에 대한 의문과, 어둡다는 무의식적인 생각이었다.

해 봐야 두 평 남짓한 직사각형의 방 안에는 낡아서 끝부분이 검게 변색되기 시작한 형광등 하나만이 켜져 있었고, 구석에 있는 환기구를 제외하면 강철 문과 회색 콘크리트로 거의 완전히 밀폐되어 있는 구조였다.

그러나 형광등 하나 정도라면 이 정도 넓이는 밝게 비추고도 남았겠지만, 불이 켜져 있음에도 방이 어두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의 눈앞이, 마치 선글라스를 쓴 것처럼 어둡게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야가…… 윽.’

그는 어둡게 보이는 자신의 눈앞을 확인하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려다가, 팔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감각에 움찔했다.

밀러는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떠올렸다.

교외의 한적한 시체 안치소.

어둠 속에서 만난, 의문의 남자.

은색 슈트와 헬멧을 착용한 의문의 남자와의 결투.

몸을 저리게 만드는 전격과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든 공방.

마지막 순간에 모든 힘을 끌어모아 준비한 카운터.

그리고…… 눈앞에서 번쩍였던 섬광.

‘그래…… 나는 그때 패배한 건가.’

그는 쓰러지기 직전에 인질이란 말을 들었으니, 자신이 잡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본인부터가 은색 차림의 남자…… <은기사단>의 일원을 잡아가려고 했었으니까.

‘정보는 들었지만, 정말 규격 외의 강자였다.’

밀러가 마지막 싸움을 떠올리며 자신의 몸 상태를 체크하고 있을 때, 강철 문에서 뭔가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철컹.

“……!”

아직 욱신거리고 뻐근한 몸이었지만, 밀러는 본능적으로 문 옆의 벽으로 다가가 숨기로 했다.

싸움에 패배하고 끌려왔다고는 해도, 자신은 순순히 이런 데에 잡혀 있어 줄 마음이 없었으니까.

‘누구든 간에 기습해서 인질로 잡으면…….’

그렇게 문 뒤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터엉!

마치 누가 발로 차기라도 한 듯, 문이 엄청난 속도로 열렸다.

쾅.

“크헉!”

문이 적당히 살살 열릴 거라 생각해 벽 쪽에 숨어 있던 밀러는 경첩을 축으로 고속으로 회전해 온 강철 문에 얻어맞았다.

“문 좀 살살 열……. 뭐야, 없네?”

“방금 얻어맞는 소리가 들렸잖아. 괜한 수작 한번 부려 보겠다고 숨어 있었나 보지.”

밀러가 철문에 얻어맞은 충격으로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그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뚜벅, 뚜벅.

고통에 못 이겨 그만 질끈 감은 눈으로 인해 안 그래도 어두웠던 시야는 아예 사라졌고, 마치 감기에라도 걸린 듯 코에서 새어 나오기 시작하는 뜨끈한 액체와 그 액체의 틈새에서 조금씩 올라오는 비릿한 혈향, 그리고 아직도 고통을 사방팔방으로 쏘아 대며 비명을 질러 대는 전신.

시각과 후각과 촉각이 마비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멀쩡했던 청각은 그에게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정확하게 잡아내었다.

“크으윽……!”

밀러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방금 전 문에 얻어맞고 풀려 버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역시 문을 열 때는 호쾌하게 여는 게 제맛이란 말이지.”

“매너란 건 어디로 간 거죠?”

“여긴 그딴 거 지키는 곳이 아니잖아?”

그러나 다른 감각들이 모두 마비되었고 고통도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하자, 그는 익숙한 목소리를 구별해 냈다.

“이 목소리는…….”

그가 무언가 말하려 했을 때, 모르는 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질문은 나부터 하지.”

밀러는 알 수 없는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고, 눈물과 어두운 시야로 겨우 흐릿하게 앞을 확인할 수 있게 되자 한 중년인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희 대가리 어디 있냐.”

중년인은 밀러에게 무미건조하면서도 냉랭한 목소리로 질문해 왔고, 밀러는 그 목소리에서 엄청난 숙련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미래가 그다지 좋지 못할 것이라는 것까지 직감했다.

* * *

밀러에 대한 심문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심문에 비협조적인 태도와 반쯤 비웃는 듯한 말투, 여유 있는 분위기를 보여 주며 나갔던 밀러.

-대장이 누구냐고? 눈앞에 있지 않나? 내가 바로 <신인류>의 대장이다.

그는 단순히 겉멋이나 자존심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었다.

‘하, 나도 괜히 이런 일을 하는 건 아니다. 내가 행방불명됐으니 다른 동지들도 눈치채고 몸을 피하겠지.’

그도 사람인 만큼 영원히 입을 열지 않을 거란 보장은 못 했지만, 적어도 <신인류>의 다른 인원들이 몸을 숨길 시간은 벌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정보를 얻어 내기 위한 주먹이나 발길질, 고문을 위한 도구들이 아니었다.

그저, 딱한 사람을 보는 듯한 반응만이 돌아왔다.

-음…… 자기 상황을 모르나 본데요. 의외로 불쌍한데.

-그런가……. 그러고 보니 여긴 거울이 없었지.

어제 싸웠던 상대인 방 밖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문과 눈앞에 있는 중년인의 몸에 시선이 가려지기도 했고, 문밖에서 비치는 역광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더니 거울에 대한 얘기를 꺼냈고, 이내 중년인이 휴대폰을 꺼내 셀프 카메라 모드를 켜 주고 밀러의 눈앞에 들이댔다.

-이건……! 뭐…… 무슨……!

휴대폰의 화면에는 밀러 자신이 볼 수 있는 방의 벽과 똑같은 타일 벽과 그 앞에서 무릎 꿇은 채 앉아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다만, 그 사람의 얼굴 절반 이상이 검은 페인트를 부어 버린 것처럼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고, 눈도 흰자위가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차마 눈앞의 사람이 멀쩡한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에 자신의 모습이 아닐 거라 믿고 싶었지만, 살면서 가장 많이 봐 온 얼굴 중 하나였으니 그 익숙한 이목구비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아아……!

물론 밀러도 이 검은색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비스트>에게 행한 실험의 결과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고, 자기 자신도 힘을 시험해 본 적 있었으니 검은색 기운이 나온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모습은 마치 그 정체불명의 검은 무언가에 잡아먹히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밀러가 절망하고 있을 때, 그의 얼굴을 보여 주었던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그게 너희한테 이뤄진 개조다. 양만 잘 조절해서 넣어 주면 뛰어난 병사가 되는 거고, 시간이 지나면 폭주하면서 돌격병이 되는 거고, 결국은…… 힘과 함께 몸이 터져 나가서 죽겠지.

중년인의 말에, 밀러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자신의 미래가 마약을 주입받은 것처럼 세뇌된 돌격병에 자폭병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밀러는 머릿속 한구석에서 남자의 말과 관련된 장면이 떠올랐다.

시술 실패로 온몸에서 검은 액체를 분출하며 죽던 <혁명군>의 실험체와, 반절의 성공으로 인해 아무런 이성도 감정도 없어 보이는 기계처럼 변한 <비스트>의 각성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러는 눈앞의 남자에 대한 불신이 조금 더 컸던 데다가 그 기억을 떠올리며 생각난 다른 기억이 있었기에 중년인에게 소리쳤다.

-그…… 그래도! 힘을 얻기 위해서 대가는 필요한 거다! 나는 그 검은 힘을 부여받는 것도, 회수하는 것도 모두 봤어! 힘을 잃게 되더라도 회수를 부탁하면 죽을 일은 없겠지!

밀러는 마치 자백제를 맞은 듯 술술 입 밖으로 이런저런 말을 꺼내는 자신의 모습에 놀랐지만, 그래도 말하는 것을 멈출 마음은 없었다.

여기서 얕보일 수도 없었고, 시간을 조금 더 끌기 위해서는 흥미로울만한 소재를 하나씩 던져 줘야 하니까.

하지만 밀러가 던진 말에도 불구하고, 중년인은 여전히 무미건조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글쎄……? 원래 풀이나 접착제 같은 것도, 사람한테 붙이는 것보다 떼는 게 더 어렵거든? 근데 단순히 피부에만 붙는 게 아니라 파고 들어가기까지 하는 걸 어떻게 뗄까? 그것도 원래 몸을 멀쩡하게 놔두면서 말이야. 그거 치료할 방법은 없을걸?

중년인의 말에 밀러는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검은 힘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탐구자들>의 연구 결과 중 검은 힘에 대한 조사 내용이 있었지만, 거기에는 [정체불명]이라는 말밖에 없었다.

밀러는 그들의 지독한 탐구심과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는 광기에 가까운 집착성을 알았기에 [정체불명]은 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연구했음에도 진짜로 아무것도 못 알아냈다는 뜻이었다.

‘그런 알 수 없는 물질을 몸에서 떼어 놓는 방법을 알 만한 사람은…… 선지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수장이라면 나를 살려 줄 것이다. 틀림없이. 나는 그의 충실한 수족이 되어 있으니까.

-글쎄? 그 수장이 널 살려 줄까?

-틀림없다.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겠다고 약속했고, 수장은 그러기 위해 전 세계를 한번 엎어 버리겠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수장의 명에 따라 전 세계에 테러가 일어나며 약속을 지켜 주고 있으니 그 사람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흐음, 살린다면 이런저런 귀찮은 절차를 거치고 너 하나에 상당히 오랜 시간을 매달려 있어야 하고…… 거기다가 살려 봐야 메리트가 없는데.

밀러는 자신이 선지자에게 상당히 도움이 되기 때문에 살아남을 거란 믿음이 있었지만, 그 믿음은 머지않아 깨졌다.

-만약에 안 살린다면…… 그냥 아무 대도시에나 풀어 주고 폭주시킨 다음에, 마지막에 폭탄으로 써서 성대하게 터트리면 되겠지. 얼마나 효율적이고 좋아? 곧 죽어 갈 놈 하나만 던져 놓으면 도시 하나를 손 안 대고 부술 수 있는데.

-무슨 개소리를…….

밀러는 중년인의 말을 부정하려 했지만, 마음속 한구석에 그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기에 강하게 부정할 수 없었다.

‘과연 선지자가 나를 살려 줄까? <비스트>도, <혁명군>의 간부도 모두 아무렇지 않게 쓰고 버리는데……? 굳이 신경을 써서 살릴 필요가 있나?’

그때, 밀러가 흔들리는 것을 알았던 건지 아니면 일부러 흔들었던 것인지 중년인이 밀러를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거래를 제안하지.

-거래?

-일단, 선수금이다.

중년인은 밀러의 한쪽 눈 위에 손을 얹었고, 밀러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마치 눈을 생으로 뽑은 뒤에 거기다가 소금과 고춧가루를 레몬즙과 섞은 뒤 뿌리는 듯한 느낌.

염산 같은 화학물질이나 불에 타는 것 같은 느낌으로 생각하지 않은 이유는 눈에서 열기보다는 시원한 냉기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크으윽, 크악!

몸을 뒤틀던 밀러는 이게 대체 무슨 선수금이냐는 생각에 중년인을 노려보려 눈을 치켜떴고, 그때 그는 이상한 풍경을 보았다.

과거, 선글라스를 쓰고 바이크를 타다가 넘어져 한쪽의 렌즈가 박살 났을 때와 비슷한 시야.

좌측의 끝은 어둡게 보였고, 우측의 끝은 밝게 보였고, 중앙은 어두움과 밝음이 번갈아 보이는 듯한 시야였다.

-이건……!

-눈 하나는 멀쩡하게 만들어 줬지. 거기다가…… 한번 봐라.

중년인은 휴대폰을 꺼내 다시 그의 얼굴을 비춰 주기 시작했고, 밀러는 그 휴대폰 화면을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검게 물든 얼굴 중 일부가, 마치 물감을 지워 내기라도 한 듯 말끔하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눈앞의 중년인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그의 몸 상태를 낫게 해 줄 수 있는 힘이 있었고, 그것을 거래의 대가로 삼겠다고 했다.

물론 중년인이 자신의 몸을 이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것 같지 않다는 직감이 들었고, 무엇보다 현재의 생존이 더욱 중요했다.

-……무엇을 알고 싶으십니까.

새로운 세계를 열고 각성자들만의 세상을 만들겠단 원대한 포부가 있었지만, 정작 본인이 그 세상의 구성원이 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한 <신인류>의 지도자 스콧 밀러는 입을 열기로 했다.

-좋아, 협조적으로 나오는군. 네 대가리 어디 있냐.

중년인은 밀러의 대답에 미소를 지으며 그를 흡족하게 바라보았고, 밀러는 그 시선에 순간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을 했지만 이왕 배신하기로 한 거 확실히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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