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4화
(5)
미국의 뒷세계 유명 해커이자, ‘닷지’라고 불리는 인물이 있었다.
국제적 은행 강도 머니메이커들의 배후이기도 했고,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극비 정보들을 수집해 정치인들의 약점을 잡았던 범죄자.
정보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아는 수준은 아닐지라도 가장 치명적인 정보를 아는 인물이었고, 그가 약점을 잡고 있는 정치인들과 유명인들을 방패로 삼아 자신의 안전을 추구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면서도 절대 자신의 정체나 약점을 드러내지 않는 용의주도함과 겁쟁이 기질로, 자신이 앞에 나서는 일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와 비슷하게 행동하면서도, 역으로 호전적이고 급진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마스크드 갱>이었다.
언제나 가면을 쓰고 정체를 숨긴 채, 뒷세계에서 해킹으로 활동하는 것까지는 같았지만 단순 정보 수집에서 끝난 닷지와 달리 <마스크드 갱>은 조직적으로 그 정보를 탈취하고 파괴 행위를 일삼았다.
크래킹과 랜섬웨어, 기타 사이버 테러를 주로 벌이며 활동했던 명백한 범죄 집단.
그들은 자신들의 성명과 정보를 인질로 금품을 뜯어내는 등의 행위를 종종 벌였기에 사람들에게도 나름의 인지도가 있었다.
그리고 모든 소속원이 익명인 만큼, 기밀 유지를 선호했던 선지자도 그들의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기용했었고.
그러나 패트리어트를 필두로 대대적인 미국 내 범죄 조직 소탕 작전이 시작되자, 모든 인력들이 동원되어 그들을 추적해 본거지를 일일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위기감을 느낀 <마스크드 갱>과 닷지는 서로 연합하여, 비밀 셸터를 확보해 그곳으로 숨어들었다.
십수 년 전 멕시코 마약 카르텔이 미국에 숨어들어 활동할 때 장만했던, 은행 금고에 맞먹는 방어력을 가진 패닉 룸이 자랑인 셸터였다.
해당 카르텔은 몇 년 전 본거지의 궤멸로 인해 마약을 수급할 수 없어 철수했지만, 그 건물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런 건물이라 안심하고 내부의 패닉 룸에 몸을 숨겼던 닷지와 <마스크드 갱>의 주요 인물들.
-은행 금고처럼 사방을 철근으로 도배하는 수준의 방어력은 아니지만 정문과 패닉 룸의 문만큼은 금고에 사용되는 것과 같은 걸 쓰고 있으니 누가 와도 비밀 통로로 빠져나갈 시간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완벽히 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이 장소의 은밀함과 도망칠 시간만큼은 확실히 벌 수 있을 거라는 판단하에 패닉 룸에 숨은 것이었다.
하지만 배신자들의 밀고로 인해 위치가 발각되었고, 패트리어트의 저력은 그들이 관측하고 얻은 정보와, 혹시나 싶어서 계산한 결과보다 더 뛰어났다.
그런 패트리어트가 건물에 달려들어 정문을 뚫기 전, 누군가가 패닉 룸에 쳐들어왔다.
쾅, 쾅!
콰드드드득- 뻐엉!
두꺼운 외장 부분과, 약간의 파손만 발생해도 전체가 잠기게끔 되어 있는 강철 문을 잘라 내고 뚫어 낸 다음 들어온 의문의 인물.
선지자는 검게 물든 손을 털며 패닉 룸 내부로 느긋하게 걸어 들어왔다.
강철을 마치 창호지라도 되는 것처럼 뚫고, 두꺼운 문을 육포 찢듯이 찢어 내고 들어온 선지자는 주위를 둘러보며 뭔가를 평하듯 말했다.
“……전부 도망쳐서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다니. 아니, 한 명은 아닌가.”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다양한 체형과 인종의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단 한 사람만이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옆에 있는 권총을 그대로 뽑아다가 쏠 자세를 취하고, 눈치를 보는 닷지.
닷지를 제외한 다른 <마스크드 갱>의 인원들은 실제로 싸워 본 경험이 없어서인지 총을 갖고 있어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강철 문을 석고보드로 만들어진 벽을 뚫는 것보다 쉽게 부수고 들어오는 모습을 직접 봤기 때문이다.
“……닷지. 그리고 나머지는…… <마스크드 갱>의 겁쟁이들인가? 둘이 손을 잡다니 생각 외인데.”
“당신은…… 누구지? 내 얼굴을 알다니.”
“긴말은 필요 없겠지. 나중에 말하자고.”
선지자는 닷지에게 다가가 목을 붙잡았고, 그의 뒷목을 순간적으로 강하게 압박했다.
뚝.
닷지의 목에서 아주 잠깐 뭔가 불길한 소리가 들렸지만, 그런 불길한 소리가 났음에도 닷지는 사망하지 않고 단순히 기절만 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선지자는 닷지를 바닥에 눕혀 둔 채, 곧바로 방 안으로 달려들어 <마스크드 갱>의 구성원들을 모두 사살했다.
뿌득. 추욱.
갈비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고기를 쥐어짜는 듯한 소리.
한 명당 한 번.
선지자는 단 한 번의 주먹질만으로 사람의 가슴을 뚫은 뒤 심장을 뭉개는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행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단순히 종이에 스테이플러를 찍는다거나 펀칭기로 구멍을 뚫는 단순 작업을 하듯이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행하였다.
패닉 룸 내부의 <마스크드 갱>들을 모두 무참히 살해한 선지자.
그는 과거에 부하로 부리던 이들을 죽였음에도 무덤덤한 모습을 보이며, 방 안에 설치된 CCTV 화면을 보았다.
-으아아아아!
-진입! 진입!
CCTV 화면에는 바깥에서 항전 중인 <마스크드 갱>의 일원들과 동네 갱단들, 그리고 돈으로 고용한 자잘한 각성자들이 패트리어트에게 박살 나고 있었다.
“……패트리어트. 가능하면 지금이라도 싸워 보고 싶지만…… 나중을 기약하지.”
선지자는 CCTV가 연결된 서버의 위에 금방 죽은 시체를 올렸다.
시신에서 흘러내리는 혈액이 서버의 회로 기판에 흘러 들어가 스파크가 튀기 시작하자, 선지자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닷지를 챙겨 든 뒤 자신이 만들어 낸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방에 있는 다른 문이 벽째로 뜯겨 나가며 패트리어트가 방으로 들어왔다.
* * *
소탕 작전이 끝난 후, 미국 어딘가의 모텔방.
침대에 눕혀져 있던 닷지가 다급히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몸을 일으켰다.
“허엇! 으극?!”
그러나 그의 몸부림도 잠깐일 뿐, 닷지는 이내 목을 부여잡으며 다시 드러누웠다.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다. 목을 조금 잘못 잡은 것 같아서.”
“……누구지?”
자신을 기절시켰던 선지자의 얼굴을 보자, 무기가 될 법한 물건을 찾으며 경계하기 시작하는 닷지.
그는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눈앞에 두더라도, 저항을 포기하지 않는 사내였다.
“상대를 알아보려는 자세는 좋지만, 자기소개부터 해야지?”
선지자는 자신의 정체를 묻는 닷지에게 다소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내 얼굴을 아는 그 순간 이미 정체도 다 알 텐데, 굳이 할 필요가 있나?”
닷지는 자신의 얼굴과 정체를 아는 이들에 대한 명단을 가지고 있었고, 정보가 없거나 멍청한 인물도 아니었기에 상대의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군.”
“나한테 보내던 부하는 어쩌고…… 직접 오신 거지? 높으신 분일 텐데.”
선지자는 닷지가 자신에 대한 대략적인 추측만으로도 정체를 짐작해 낸 것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나에 대해서는 아는 모양인데. 그럼 내 상황도 알지 않나?”
“……휘하 조직들이 모두 등을 돌렸고, 간부들은 체포되거나 행동할 수 없는 상태…… 아닌가?”
닷지는 언제나 귀를 열어 두고 살았기 때문에 선지자의 휘하 조직들의 와해와 독립, 텐징과 샤오롱의 수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역시 살려 두길 잘했어.”
“그럼…… 나한테 자리를 제안하러 온 건가? 나는 머리 굴리는 데엔 나름 자신 있고 몸 쓰는 게 서툴진 않은 편이라도 각성자는 아닌데. 다시 재편성을 시키기 위해서는 차라리 수감 중인 녀석들을 탈옥시키는 게 낫지 않나?”
선지자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조직의 재편성을 위해서라고 추측한 닷지는 그의 제안을 거부하려 했다.
전투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컴퓨터 앞에 앉아서 살아온 세월이 길어 그의 육체 능력은 약해진 지 오래였다.
“아니, 내게 필요한 건 새로운 집단이야. 내 명령은 듣건 말건 상관없고, 내게 충성을 바칠 필요도 없어. 단순히 어딘가에서 날뛰어 줄 융통성만 있어 주면 돼.”
“그렇다면…… 용병?”
“용병도 아니야. 단순히…… 미치광이 집단 정도면 돼.”
선지자의 인원 선정 기준에, 닷지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려다가 목의 통증 때문에 움찔했다.
“……당신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명확한 용도가 있다면 대략적으로 추측이라도 가능하지만…… 그런 조건이면 그냥 단순히 난장판을 만들고 싶다고밖에는 생각이 되지 않는군.”
“정확해.”
닷지는 정확하다는 선지자의 대답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이내 자신이 관여할 부분이 아니란 생각에 더 이상의 질문은 그만두기로 했다.
“<혁명군>은 본보기로 처형하지. 최소한 내 지시를 들을 정도의 움직임은 보여 줘야 하니까. <포트패스>의 몇 명, <비스트> 전원, <탐구자들> 일부, <신인류>는…… 생각을 해 봐야겠군.”
“내가 알기로…… 당신 부하들 중에 남아 있는 이들도 있는데, 그들은?”
“은퇴시켰어. 수용소에 얌전히 박혀 있어서 더 이상 활동하기 힘든 사람이 한 명 있고, 목적에 어울리지 않으니까.”
선지자와 닷지가 인원 편성을 위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모텔방 한구석에서 조용히 뉴스만을 내보내던 TV의 화면이 바뀌었다.
[러시아에서 발생한 수용소 탈출 사건이 현 시각…….]
러시아의 흑상어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각성자들이 탈출한 사건에 대한 보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 저 녀석들도 있군.”
“러시아의 불곰과 보리스? 내가 죽인 소콜로프는 몰라도, 저 둘은 나름 쓸 만한데.”
선지자는 그들 중에도 나름 눈여겨본 이들이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는 숲속에서 소콜로프를 죽였었지만, 그가 특유의 신체 능력으로 빠져나왔다고만 생각했지 단체로 탈출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빠져나온 이후, 곧바로 미국으로 향해 소집을 걸었기 때문이다.
소집에서 메리에게 은퇴를 허락해 준 이후, 패트리어트에게 습격받는다는 메시지를 내건 <마스크드 갱>의 셸터로 향한 것이었다.
본격적인 소탕이 시작되고 메시지를 남겼던 것이 그가 소집을 내리기 이틀 전이었고, 마지막으로 본거지인 패닉 룸이 소탕되기 직전에 선지자가 그곳에 도달한 것이었다.
즉, 러시아에서 일어난 수용소 탈주 사건을 자세히 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그는 화면에 나오는 사람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저건……?”
흔들리는 화면 속에서, 몸에 불이 붙은 로시코프와 정면 싸움 끝에 그를 패퇴시키는 백색과 은색의 옷을 입은 거한.
백색 갑주를 입고, 유려한 움직임으로 검을 휘둘러 아나스타샤를 제압하는 갑주의 기사.
“새로운 세력인 것 같던데, 아마 저렇게 인지도를 좀 쌓은 다음 길드 하나 만들려는 각성자 모임일지도.”
닷지는 화면 속의 인물들을 길드 홍보용으로 영웅 활동을 하려는 각성자 집단으로 봤지만, 선지자는 생각을 다르게 가졌다.
“……히어로인가. 그래, 저런 게 있어야 보람이 있겠지. 공허하지는 않겠어.”
선지자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화면을 보며 즐거운 듯 손가락을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새로 만들 조직 이름은, <흑기사들>로 하지. 흰색에 은색에…… 저렇게 빛나는 영웅들과는 정반대니까.”
“<흑기사들>? 조금 이상하다고 받아들여질 것 같은데…….”
“이름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지. 거기에 담긴 뜻이 중요할 뿐.”
선지자는 뉴스에서 나오는 영상에서, 은색 헬멧과 복장을 입은 누군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영상을 보는 선지자의 손끝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검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