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2화
(3)
은기사단이 본격적으로 결성되기 이전, 용신은 영의를 불러냈었다.
“잠깐 이리 와서 앉아 봐라.”
용신은 마치 성적표 온 날의 부모님처럼, 아무런 맥락도 전조도 없이 대뜸 영의에게 앉으라는 말을 했다.
“꼭 그쪽으로 가서 앉아야 하나요?”
까딱까딱.
영의는 용신이 오라며 손짓을 하고 있음에도 낯선 사람을 만난 것처럼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주저했다.
그리고 그 태도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용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영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내 말에 토 다는 거냐? 네가…… 말대꾸를?”
“아니, 굳이 그쪽으로 가야 하냐는…… 말이죠. 그게, 옆에 있는 분이 조금 마음에 걸려서.”
영의가 용신의 곁으로 가고 싶지 않아 했던 이유는, 용신의 옆 맨바닥에 파드레가 두 손이 결박당한 채 무릎 꿇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느낌이 조금 그렇달까……. 아무래도 노인이다 보니까 마음이 불편한데요?”
물론 파드레가 적이었고, 그냥 두면 도주할 우려가 있으니 저렇게 묶어 둔 것이라고는 하지만 연공서열에 민감한 한국 출신에 노인들과 제법 친하게 지냈던 영의에게는 그가 노인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칼 들고 총 들면 노인이고 아이고 없이 위험하긴 마찬가지인데? 더군다나, 이놈은 그런 칼보다 더 위험한데. 뭐가 불편해?”
“지금은 칼이나 총을 안 들고 있으니까 마음이 불편한 거죠.”
“……별나군.”
용신은 영의를 별나다고 평하면서도 그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인지, 본인이 직접 영의에게 다가왔다.
“그래, 오늘은 적당히 지침에 대해서 알려 주려고 왔다.”
“지침이요?”
“여기…… 이쪽 세계에서 생기는 자잘한 일은 너한테 맡기겠다고 했었지?”
“네.”
파드레를 포함한 선지자의 세력은 용신이 개입할 여지가 있지만, 그들로 인해 파생된 다른 범죄자들이나 사건 사고 등은 그가 개입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다른 자잘한 문제들…… 파드레가 말했던 통제를 벗어난 휘하의 범죄 조직들은 영의나 각국의 경찰 등이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네 애인이나, 이번에 일하면서 만났던 다른 녀석들을 갖다 써라.”
“네?”
영의는 이번에 만났던 녀석들…… 인드라를 비롯한 다이카 같은 이들을 쓰라는 말에 의문을 표했다.
‘쓰라니…… 함께 일하라고? 이젠 비밀이 비밀이 아니게 되는 건가?’
자신의 비밀 등을 모두 공유하는 파트너와도 같은 대상은 이미 화연이 있었다.
그러나 화연은 용신을 만나 함께 일하기 이전부터 비밀을 알고 있었고, 영의와도 가까웠기에 용신이 또 다른 일꾼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그런 화연과 달리, 다이카를 비롯해 인드라나 찬드라는 영의의 비밀을 잘 알지 못했다.
해 봐야 떠들썩했던 은색 헬멧의 남자가 한국인인 데다 유명하지 않던 각성자에 불과했다는 수준이었으니까.
물론 그것도 충분히 엄청난 비밀이긴 했지만, 진정한 비밀은 아니었기에 별 관계 없었다.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안다. 그 녀석들을 제대로 된 동료나 믿음직한 부하들로 쓰라는 게 아니라, 협력자로 쓰라는 거다.”
“협력자요……?”
“그래, 지금까지의 일이야 차원 간의 일이니 노출이 적을수록 좋았지만 국제적으로 일어나는 범죄의 경우에는 기존의 치안 유지 요소가 끼어들 여지가 있지 않나?”
영의도 용신이 이 정도로 설명해 줬으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 경우에 한해서 협력을 하라는 거죠?”
“그래, 내가 뭐 무리한 일을 시킬 마음도 없고. 혼자서 전 세계를 커버하라고 지시 내릴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아. 물론…… 하려면 할 수야 있겠지만, 넌 아직 인간이잖아.”
영의의 기동성과 약간의 주저함을 없앤다면 혼자서도 전 세계의 범죄자들을 처리할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인도적인 범인의 제압이나 깔끔한 현장 보존은 힘들어지겠지만, 일단 혼자 전 세계를 다니는 게 가능하긴 했다.
‘충분히 인간이 아닌 부분도 있긴 하지만, 저 아저씨한테는 해 봐야 인간 수준으로 보이는 건가……?’
그러나 용신은 영의를 ‘아직 인간’이라고 하며 협력자들을 구할 것을 종용했고, 이내 쓸 만한 조건까지 제안해 왔다.
“신분을 숨기는 데 쓸 만한 도구 정도는 구해 주지. 체격을 바꾸는 옷이라든가, 갑옷이라든가, 약간의 인지 부조화를 불러일으키는 마술 정도. 대신, 설득은 네가 해야 한다.”
“그럼…… 제가 설득만 하면 장비 같은 건 준비해 준다는 얘기인가요?”
“사실 파고들려면 얼마든지 파고들 수 있겠지만, 넌 이미 여기서 그렇게 활동한 전적이 있잖아? 인간들은 전대미문의 일에 대해서는 대부분 조사를 하는 경향이 있지. 하지만 한 번쯤 본 일이라면 먼저 경험했던 것에 집중하기 때문에 대부분 그쪽으로 끼워 맞출 거다.”
용신이 말했듯이, 실제로 각국에서는 아직도 한국에서 갑작스럽게 사라진 게이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달리, 게이트 내부에 있어야 할 괴수들이 튀어나오는 일이나 특이한 능력에 눈뜨는 각성자에 대해서는 새로운 연구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그와 비슷하게, 영의가 이미 헬멧을 쓰고 정체를 숨긴 히어로 비슷하게 활동한 적 있으니 정체를 숨긴 히어로라고 판단할 거라는 설명이었다.
“뭐…… 너는 범죄자 취급받고 있지만, 실제로 활동 조금 하다 보면 민심은 네 편으로 돌아설 거다. 이 세상은 여론을 신경 쓰는 편이니, 선행 이미지만 조금 챙겨 주면 널 잡으러 오지는 못할 거야.”
“그런 걸 신경 안 쓰는 나라도 있을 텐데요……?”
영의는 여론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여론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정부가 있는 나라들을 생각했다.
‘거기다가 그놈들은 정부, 그것도 수뇌부 쪽에 연줄이 있다고 했었지…….’
선지자의 손길이 닿은 것은 범죄 조직뿐만이 아니라 각국 정부도 있었다고 했으니, 그 부분이 신경 쓰였던 소시민 영의.
“걱정 마라, 무시해 그냥.”
“네?”
“명분에선 네가 이겨. 네가 그 머리에 쓴 거만 안 벗는다면 네가 구속당할 일은 없어.”
“……아.”
“물론 정치하는 놈들의 기본적인 일이 명분을 만드는 일이지만…… 글쎄, 내가 잠깐 보니까 사건은 더 큰 사건으로 묻는 게 정답이더라. 만약에 들킨다면 뒷돈 받아먹은 자료라도 뿌려 주지.”
용신은 영의의 행동을 상당히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려 하고 있었다.
‘의외로…… 사람 챙겨 주는 타입이었구나.’
“정말 고맙…….”
영의는 용신이 자신을 믿고 지원해 준다는 사실에 감동하여 거기에 감사를 표하려 했다.
“뭐, 이래야 내가…… 너도 덜 귀찮을 테니까. 걱정 말고 저질러 버려.”
“…….”
자신이 편하자는 이유를 먼저 대는 용신을 보니, 영의는 감사하다는 말이 쏙 들어가 버렸다.
“……그럼 일단 제의부터 하러 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되어 영의는 곧바로 팀을 결성하러 갔고, 당연하게도 다이카를 포함한 셋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하, 재밌군. 세계를 지킨다라……. 범죄자들이 슬금슬금 기어 나올 거란 말이지? 거기다, 정체도 숨기고 전공도 없는 봉사활동? 좋아! 하지! 길드에 들어오지 않는 건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그래도 함께할 일이 있다니 좋다!”
“……마음에 듭니다. 협력하지요.”
인드라는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처럼 말하면서도, 미소 지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찬드라 또한 뭔가 하고 싶던 말이 있었던 것 같지만, 그의 마음속 말 대부분을 인드라가 했던 것인지 짧게 대답하고 수락했다.
가장 의외였던 것이 다이카였다.
“어? 어어?! 정의의 히어로 말이지?! 한다고? 하는 거야? 정말로? 어어, 어쩌지……! 진짜 하자고 할 줄은 몰랐는데……? 에, 에헴! 사실 지금까지 이럴 때를 기다리고 있었어!”
매일같이 영의에게 접근해 함께 히어로 활동을 하자고 제의해 왔던 다이카가 정작 영의에게서 활동 제의를 받자 당황하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좋아! 이때를 위해 준비해 둔 슈트를 꺼내 올게! 함께 세계를 지켜내 보자고!”
그래도 확실히 히어로 활동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었던 것인지, 복장까지 미리 준비해 둔 데다 금방 정신을 차리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인원이자 가장 신뢰했던 인원인 화연은, 영의의 말에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대답해 주었다.
“후우…….”
“왜…… 싫어?”
영의는 그녀가 함께 활동하는 것이 싫은 건가 싶었다.
프리랜서인 영의와 달리 화연은 신화 길드의 부길드장이고, 그 직위상 대외적인 시선에 민감했으니까.
“아니, 오히려 다행이네요. 매일 혼자 다니는 걸 전전긍긍하며 걱정하느니, 차라리 함께 활동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화연은 지금까지 영의가 혼자 활동해 온 것이 마음에 걸렸고, 마침내 그와 함께 일하며 그 피로를 덜어 줄 기회가 왔으니 곧바로 기회를 낚아채기로 했다.
그렇게 다섯 명의 인원이 모였고, 간단한 장비를 지급했다.
장비를 지급받았을 때 각자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호오……. 몸의 크기를 바꿔도 자신의 몸처럼 느껴지는 장비라. 게다가 튼튼하기까지.”
맨몸이 너무 특징적인 데다 영의보다 조금 큰 체격이었던 인드라에게는 덩치를 키워 아예 다른 인물로 보이게끔 하는 특수한 슈트가 주어졌다.
그는 그 특수함에 매료된 것인지, 슈트를 연신 만져 보는 등의 행위를 했다.
“저는 큰 특징이 없군요. 하긴 본래도 그다지 모난 구석은 없습니다만.”
능력을 열화된 상태로 복제하는 능력을 가진 찬드라에게는 방어력을 특히 중시한 전신 슈트를 주었고, 큰 반응이 없었다.
“나는 내 슈트가 있으니까 문제없어! 그래도 업그레이드랑 도색은 해야 하니까, 맡기긴 했는데…… 어디가 업그레이드된 거야? 도색은 멋지긴 한데.”
다이카는 본인의 사이즈에 맞춘 슈트가 있었으니 그것을 받아 용신이 약간의 손질을 가한 뒤, 일부 도색을 했다.
인지 부조화를 일으키게끔 하는 용신의 마술이 본인에게도 영향을 끼친 건지, 다이카는 슈트의 외형이 조금 바뀐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용신이 화연에게는 특별히 갑주를 제공했다.
“이건…… 너무 특별 대우 아닌가요?”
다른 이들은 바이크 슈트 같은 가죽옷이나 천옷 정도에서 그쳤지만, 자신에게만 판금 갑옷이 오자 당황했던 화연.
하지만 영의는 그녀에게 용신의 말을 그대로 전해 주었다.
“네 애인은 근접 타입이 아니니 방어력만큼은 확보해야지. 한 녀석은 이래저래 용빼는 재주가 있고, 하나는 도망 속도만큼은 너만큼 빠르지만 걔는 어느 쪽도 아니잖아? ……라고 하더라.”
확실히, 이곳에 모인 이들 중에 강화계는 없었다.
인드라는 근접전 위주로 싸우는 만큼 강화계와 엇비슷한 능력을 보일 수 있었고, 찬드라는 올라운더에 가까웠다.
그리고 다이카는 영의와 비슷한 스피드 중시 타입이었기에, 여차했을 때 도주하는 편이 더 나았다.
반면에 화연은 검이라는 무장을 주로 쓰는 편이라 용신이 아예 방어력을 대놓고 주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그래도 가볍게 제작했고, 바깥에 얼음을 얼리면 방어력이 더 오를 거래. 그런 쪽으로 도움이 되게 손을 봤다고 했으니까.”
영의는 화연이 약하다고 생각하거나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듯, 갑옷이 특별 대우가 아니라고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화연은 그의 말을 듣는 대신, 외부에 입는 판금 갑옷이 아니라 안에 입는 내부의 슈트를 바라보았다.
“……이거, 지난번에 선배가 입은 거랑 비슷해 보이는데.”
그것은 영의가 난쟁이들에게서 받았던 라이더 슈트…… 전신 갑옷과 같은 형태였고, 방어 성능이 조금 부족한 것만 뺀다면 완전히 같은 물건이었다.
“그거 만든 곳에서 만든 물건이긴 하지……?”
“이거, 선배 거랑 제 것밖에 없죠?”
“수연이 것도 있긴 한데 아직은 안 줬어.”
“선배 거랑…… 같은……. 좋아요, 입죠.”
“어, 어? 그래. 그래도 튼튼해 그거.”
화연은 갑옷에 대해서는 탐탁잖게 생각했지만, 그 안에 입는 슈트에 마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