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1화
(2)
로시코프에게 사격을 가했던 러시아 군인들은 모두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뭐지……?”
물론 탱크의 주포가 옆으로 꺾여 있고, 그 앞에 본 적 없는 누군가가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대략적인 상황은 파악이 되었다.
갑자기 나타난 은색 옷차림의 누군가가 탱크의 주포를 옆으로 꺾은 로시코프를 날렸든가, 의문의 누군가가 둘 다 공격했든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쩌면 기적적으로 탱크가 로시코프를 먼저 공격했고, 은색 옷차림의 누군가는 탱크를 무력화하기 위해 나타난 로시코프의 아군일 수도 있었지만 그 가능성은 아닐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은색 옷차림의 거한은 그들에게 등을 보인 채, 로시코프와 대치하듯 그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군……인가?”
“그리즐리는 사망했잖아. 만약 후보군에 가까운 사람이 있다고 해도…… 진작에 대대적으로 선전했을 텐데.”
군인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며 갑자기 나타난 거한의 정체에 대해 유추해 보려 했지만, 그렇게 대화를 나눌 시간마저 주어지지 않았다.
퍼엉!
로시코프가 날아간 자리에서, 건물 하나가 터졌다.
“폭발이다!”
아마 내부의 가스 배관이나 가연성 물질을 터트린 듯, 로시코프에게서 상당히 뒤쪽에 있는 건물이 불에 휩싸였다.
로시코프는 그런 불을 등지고, 연기와 화염 속에서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아프잖아……. 기습한 건 좋지만, 나한테 기습을 할 기회가 있었다면 진작에 죽였어야 했다고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아나스타샤! 저 자잘한 녀석들을 정리해 버려!”
동행이자, 총알을 막아 줄 수 있고 넓은 범위에 얼음을 통한 기습 공격이 가능한 아나스타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알아서 해!”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그에게 도움은커녕 알아서 하라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나도! 지금! 바쁘다고! 총알 맞아도 바로 안 죽으면 알아서 해……!”
콱, 콱, 파삭!
아나스타샤 또한, 눈앞에 백색 갑옷을 차려입은 적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얼음을 뭐 이렇게 빨리 깨는 거야……!”
“…….”
아무 말 없이. 검을 휘두르며 접근해 오는 알 수 없는 갑주 차림의 기사.
로시코프는 그쪽을 한번 쳐다본 뒤, 목을 좌우로 꺾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뚜둑, 뚜두둑.
“후우…… 어쩔 수 없지.”
로시코프는 양 주먹을 쥐며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고, 눈앞에 서 있는 거한과 마주 보고 섰다.
마치 특수부대의 보호 장비처럼, 관절 부위나 급소 부분마다 은색의 금속제 보호대가 있고 그 외에는 단순 백색의 의복이었다.
로시코프는 백색과 은색 위주의 그 모습을 보고, 동계용 장비라고 생각하고 상대가 러시아군 소속일 거라 추측했다.
“특수부대인가? 아니면, 새로 키우는 작은 그리즐리?”
짐짓 여유로운 척 말을 걸고 있었지만, 로시코프는 호시탐탐 상대의 약점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약점을 채 찾아내기도 전에, 상대방이 먼저 그를 급습해 왔다.
“……하아!”
“크하앗!”
그렇게 은색의 거한과 붉은 불꽃의 거한이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10분 뒤.
불에 살짝 그슬린 듯 군데군데가 검게 물든 은색의 거한은 로시코프를 바닥에 질질 끌며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상대와 자신의 능력 차이를 알았기에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저거…… 어떻게 잡아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가 저걸 어떻게 해본다고?!”
그들이 그러는 한편, 은색의 거한은 일행인 듯 보이는 백색의 갑주 기사를 만났다.
“늦었네.”
백색의 갑주 기사는 여성인 듯, 갑주 틈새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나이의 정면승부니까. 그래도 확실히 잡아 왔다.”
“그 사소한 정면승부 때문에 누구 하나가 빠져나갔으면 어쩌려고? 그랬다간 피해도 커질지 모르고, 시간도 길어졌을 텐데?”
갑주 기사는 거한의 방식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거한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여기엔 두 명뿐이니 상관없지 않나? 그리고 언제나 내일이 있으니 신경 쓰지 말자고.”
“……쯧.”
갑주 기사는 혀를 한번 차고는 얼음으로 만든 사슬과 입고 있던 코트로 만든 밧줄로 구속된 아나스타샤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갑주 기사가 입고 있던 백색의 갑주에 금이 갔다.
쩌적.
“……갑옷이 갈라졌다만.”
“……흥.”
갑주 기사는 금 간 부분을 슬쩍 손으로 쓸었고, 그러자 방금 전까지 갈라져 있던 갑주의 표면이 깔끔하게 원래대로 돌아갔다.
실제로 색이 백색과 은색인 거한과 달리, 갑주 기사는 전신이 제대로 된 갑주의 형태인 데다 바깥에 얼음과 서리가 두껍게 끼어 있어 백색으로 보인 것이었다.
갑주 기사와 거한은 흉악범들을 나란히 끌고 가는 도중에 서로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마음에 안 드네. 왜 선배가 나랑 같이 안 온 거지?”
“어쩔 수 없지 않나? 속도전에 있어서 만큼은 누구보다 빠르니까. 소콜로프란 녀석이 엄청 빠르다고 하니까.”
“……일단 돌아가야겠네.”
“그러도록 하자고.”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던 둘은 각자 체포한 흉악범들을 바닥에 던져둔 뒤, 갑작스럽게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현장에서 사라졌다.
“……??”
그 모든 것을 목격한 군인들은 의문에 빠졌으나, 일단 눈앞에 방치된 탈옥수들을 체포하러 달려갔다.
* * *
푸른색의 갑옷을 입은 여성이 휴대폰을 귓가에 대고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 여보세요? 선배?”
-어, 왜?
“저희는 각자 잡았어요. 로시코프와…… 아나스타샤예요. 마지막으로 물어봤을 때 소콜로프는 다른 방향으로 도주했대요. 그리고 이고르는…….”
-아, 그건 방금 잡았어.
“그래요? 과연…….”
그녀가 통화 상대에게 감탄하려 할 때,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큰 소리로 외치며 통화에 끼어들었다.
“이봐! 소콜로프는 꼭 잡아야 해! 그놈은 다른 게 목적이었던 놈들과 달리 본질부터 쾌락 살인마라고!”
-그건 알아. 지금 찾고 있으니까.
“네? 그럼 잡은 탈주자는……?”
-맡겨 놨어.
통화 상대가 맡겨 놨다는 말을 끝내자마자, 그들의 앞으로 누군가가 뛰어내려 착지했다.
타악.
“아! 짜증 나!”
착지한 누군가는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던 큰 덩치의 누군가를 바닥에 내팽개친 뒤, 얼굴에 쓴 은색의 헬멧도 벗었다.
한 벌로 된 전신 슈트 같은 옷이었지만, 군데군데 장식이 추가되어 있어 실용적이라기보다는 치장용에 가까워 보였다.
그런 점프 슈트를 입고 있던 인물은 <부시도 스피리츠> 출신의 각성자, 다이카.
이곳에 있는 거한과 갑주 기사는 그녀와 함께 행동하고 있는 팀원, 인드라와 신화연이었다.
“멋지게 잡아서 복귀하려고 했는데 잡아 놨으니까 집결지로 돌아가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진정해, 다이카. 할 일이 줄어든 거잖아.”
“나는 멋진 모습을 원했다고. 이 슈트도 그래서 일부러 꺼내 온 건데. 정작 영의가 먼저 제압했잖아.”
“우리들의 대장이니, 그 정도 능력은 보여 줘야지.”
다이카가 헬멧을 벗자, 인드라도 헬멧을 벗었다.
슈우욱-
그가 헬멧을 벗자, 로시코프나 보리스의 것과도 비슷했던 그의 덩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남은 하나는 우리가 할 수 없는 부분이니, 대장에게 맡겨야겠지.”
인드라는 입고 있던 금속 보호대를 해제한 뒤, 백색의 옷도 벗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전부 벗고 나자, 인드라는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선배만 너무 일하는 것 같은데…….”
화연은 영의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도, 갑옷을 전부 해제했다.
그녀의 걱정은 업무의 양에 대한 걱정이었지, 업무의 어려움에 대한 걱정은 아니었으니까.
러시아의 수용소에서 탈출한 흉악범들의 체포, 그것이 다섯 명의 세계 평화 유지 비밀결사(?) 은기사단의 첫 활동이었다.
전원 백색과 은색의 복장으로 통일한 것이 특징이었고, 그것은 대장인 영의가 활동할 때 쓰던 복장을 참고해 만든 것이었다.
* * *
한편, 범죄자들의 세계에서는 또 다른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뒷세계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선지자가 돌아온 것이다.
“……아무도 대답이 없군. 아무도, 대답이 없어.”
그러나 한 달이란 시간은 누구보다 눈치가 빠른 범죄자들이 태세를 전환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의 소집…… 일일이 한 명 한 명 부르는 소집은 아니었지만, 그의 영향력이 닿는 범죄 조직들의 수장이나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대리인들을 소집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단 세 명…… 아니. 두 명만을 제외하고는, 그에게 곧바로 응답한 이가 없었다.
-저기, 우리는 실행 요원이라 머리 쓰는 샤오롱과는 달리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있어. 기분 안 좋아 보이니까.
응답한 이들 중 두 명인 나연과 메리.
나연은 메리도 신경 쓰였고, 또 선지자가 말없이 없어지는 것이나 파드레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불길했기에 계속 연락을 기다렸었다.
그리고 덕분에, 선지자의 소집에 즉각 반응할 수 있었고.
다만 그 과정에서 여러 조직들이 선지자를 배신하고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저지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여건이었기에 그 이유를 설명하려 했던 나연이었지만, 메리가 그녀를 제지했다.
“…….”
입을 굳게 다문 채, 비어 있는 화면만을 노려보는 선지자.
즉각 응답한 것은 나연과 메리였지만, 메시지라도 남긴 인물은 있었다.
[배신자들의 밀고로 패트리어트에게 위치 발각. 도주하겠습니다. 생존한다면 연락하겠음.]
미국에서 활동하는 부하 중 한 명으로 언제나 가면을 쓰고 회의에 참여하는 인물이었지만, 다른 이들의 배신 도중에 그 위치가 밀고당했다.
그로 인해 급하게 도주해야 해 당분간 연락이 끊길 거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래……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이건 의외로군.”
선지자는 아무도 그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란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두 명이나 즉각 대답을 했다는 게 놀라웠다.
‘복수에 성공해서인가……? 아니, 그렇다고는 해도 자유분방한 독귀가 남아 있다니. 메리 때문인가……?’
메리와 나연이 남은 이유에 대해 의문을 품었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젓고는 메리와 나연을 쳐다보았다.
“그래…… 뭐, 뒷세계 주민들한테 의리 따위 바라지도 않았어. 그리고 둘? 이제는…… 은퇴해도 돼. 마음대로 살라고. 떠나기 전에 원하는 건 지원해 주지.”
선지자는 메리와 나연에게 은퇴해도 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메리는, 방금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의아해했다.
-은퇴? 진짜로? 진심이야?
누가 봐도 화를 낼 것만 같았던 선지자가, 흔쾌히 은퇴시켜 준다는 얘기를 했으니까.
“뭘 원해? 현금? 은신처? 아니면, 신분 세탁?”
선지자는 단순 은퇴가 아니라 퇴직금까지 챙겨 주려는 듯 이런저런 조건을 제시해 왔다.
-그럼, 전부 다 줄래? 하와이 별장 같은 데에서, 부자처럼 매일매일 고급진 음식을 먹으면서 지내고 싶네. 아, 신분은 어딘가의 회사 사장이 좋아.
메리는 다소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조건을 아무렇게나 내걸었다.
“그래…… 그렇게 해 주지. 이제, 그만 은퇴해.”
하지만 선지자는 메리의 그런 조건들에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뭣……! 진짜?
“그래, 마음대로 해. 이젠 의미 없으니까.”
-의미라니……?
선지자는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그들과 연결된 통신을 종료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은퇴 허락과 퇴직금에 놀라 가만히 굳어 있던 메리와 달리, 검게 변한 화면 앞에서 당황해하는 인물이 또 있었다.
“잠깐, 나는……?”
은퇴에 대해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나연은 메리와 빈 화면을 번갈아 쳐다보며 당혹감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