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9화
(25)
세상에 게이트가 나타나기 이전, 마력과 각성자들의 초능력이 아니라 과학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기.
그러한 시기의 미국에 혼혈 출신의 한 소년이 있었다.
아시아계의 혼혈이었던 소년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미국 국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완전한 미국인이었다.
다만 외모만이 혼혈일 뿐이었다.
학교 다닐 때의 성적도, 평균이나 중상위권이 아닌 상위권을 유지했다.
“성적에 A와 B가 대부분이구나. 이대로만 하면 문제없겠어.”
체육 분야나 미술, 음악 분야에서도 특출 난 모습을 보여 주진 않았지만 못난 구석은 없었다.
“가끔 실수가 나오긴 하지만…… 뭐, 우수하다. 몸도 못 가누고 넘어지지는 않으니까.”
천재성이 발휘되어 누가 보아도 똑똑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교사들 사이에서는 나름 머리가 좋다고 평가되었다.
더군다나 폭력 사태에 휘말린다거나 누군가의 따돌림에 주도하거나 참여하지도 않는, 중립적인 모습을 주로 보여 왔다.
그야말로 우수한 학생, 모범생의 표본과도 같은 타입.
줄곧 1등만을 유지한다거나 다른 곳에서는 모자란 면이 있어도 한 가지 분야에서 특출 난 천재성을 보여 줘 주목받는 아이가 아닌 그럭저럭 볼 수 있는 유형이었기에 교사들도 소년이 기억에 남지는 않았다.
소년은 별다른 탈 없이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거기서 그의 인생을 바꿔 줄 첫 번째 인물을 만났다.
“불꽃놀이 시간!”
고등학교 생활의 첫날, 언제나처럼 공부를 위해 교과서와 공책을 들고 수업 들을 준비를 갖췄던 소년의 책상 위에 폭죽이 떨어졌다.
탁!
타다다다닥!
폭죽은 폭음과 섬광과 함께 타올랐고, 종이 재질의 책이 완전히 불탈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타 버린 데다 그을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의 책을 태워 버린 범인은 곧바로 혼나기 시작했다.
“앨리스 블레이크! 교장실로 따라오세요!”
첫날부터 교실에 냅다 폭죽을 던져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는 용기와 배짱을 가진 소녀, 앨리스.
“……미안해. 폭죽이 거기로 떨어질 줄은 몰랐어.”
그녀는 교장에 의해 바깥으로 끌려 나갈 때 살짝 타 버린 소년의 책을 보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이후, 소년은 교과서가 조금 타고 그슬렸지만 그래도 사용하기에는 큰 지장이 없을 것 같아 폭죽이 터졌던 상태 그대로 들고 다녔다.
하지만 정작 책을 태운 장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 내 책이야. 네가 쓰는 것 대신 써.”
앨리스는 교장실에서 혼나고 돌아온 뒤, 소년에게 펴 보지도 않아 새 책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던 자신의 교과서를 건네주었다.
“나한테 이걸 준다고? 왜?”
“내가 폭죽을 터트려서 책을 망가뜨렸으니까. 그리고, 난 어차피 공부 잘 안 해. 그리고 네 책을 태워서 미안해.”
생각 없이 사고 쳤던 것과 다르게, 제대로 사과하며 보상까지 할 줄 아는 모습에 소년은 앨리스에게 약간의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로 일주일간 이어진 앨리스의 행보에 소년은 그녀에게 생겼던 흥미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첫날의 폭죽 사건으로 혼난 이후, 수위는 다소 낮아졌지만 그만큼 많은 장난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사고뭉치에 공부와는 담을 쌓았고, 활발함이 극에 달한 소녀.
범생이에 사고나 장난과는 담을 쌓았고, 활발함이 없는 수준의 소년.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는 둘이었지만, 그런 둘이 공통적으로 행동할 때가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서로 같은 교과서를 함께 볼 때가 그때였다.
소년은 교과서를 그냥 주겠다는 앨리스를 말렸고, 앨리스는 소년에게 미안한 마음에 교과서를 주려고 했다.
그러다가 둘이 타협한 것이 바로 함께 공유하는 것이었다.
“같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
“나쁘진…… 않네.”
교과서의 공유는 둘이 함께 공유하는 것의 첫 시작이었고, 둘은 세월이 흐르며 이런저런 것들을 공유해 왔다.
때로는 점심을, 때로는 서로의 물건을, 때로는 서로가 타는 차를 공유해 온 둘.
둘은 그렇게 공유하는 물건들이 바뀌어 가며 서로에 대한 마음마저 공유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의 막바지에 대학교 진학을 고려할 때쯤, 둘은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 바뀌어 있었다.
앨리스는 왈가닥과 말괄량이…… 좋게 말해서 말괄량이이고 나쁘게 말하면 문제아 사고뭉치였지만 소년의 영향으로 인해 다소 절제할 줄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오전에서 오후까지 학교 안과 밖에서 사고를 치고 다녔다면, 바뀐 이후에는 적어도 학교 안에서만큼은 대형 사고를 치지 않게 되었다.
소년 또한, 활발한 소녀의 영향을 받아 다소 쾌활하고 융통성 있는 성격을 가지게끔 바뀌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녀의 옆에서 버틸 수 없었을 테니 어떻게 보면 앨리스가 바꿔 버린 것이지만 계속 그 곁에 머무른 것은 소년의 의지였으니 소년이 만든 변화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앨리스는 어떻게든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
고등학생 때의 인연을 바탕으로 대학까지 관계를 이어 간 낭만적인 커플, 그 관계는 시간이 갈수록 깊어져만 갔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결혼까지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둘의 사이가 갈라지는 계기가 생겼다.
“있잖아, 그 말 좀 웃기지 않아?”
서로가 퇴근하는 길, 소년은 어느덧 IT 기업에 다니는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고 앨리스 또한 회사에 취직해 있었다.
둘은 일을 하는 시간만큼은 함께할 수 없어도, 그 이외의 시간을 언제나 함께 보내며 공유해 왔다.
“무슨 말?”
“결혼할 때,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라는 거잖아. 우리는 늘 뭔가를 같이해 오고 공유했는데……. 그러지 못할 상황이 온다는 거잖아? 조금 슬프지 않아?”
“서로가 갈라졌을 때의 시간보다, 함께했던 시간이 더 많다면 그 이별의 고통도 덜하지 않을까?”
“음…… 그렇네. 네 말이 맞아. 넌 언제나 머리가 좋았-”
서로가 결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왼손 약지에 반지를 낀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살아가던 때였다.
그러나 그때, 둘의 퇴근길 앞에서 공간이 갈라지며 언제나 모든 것을 공유해 왔던 둘은 그 공간처럼 갈라지고 말았다.
게이트의 발생에 휘말리고 만 둘.
세계 각지에서도 사망자와 부상자가 있었고, 한국에서는 휘말렸던 고등학생 남녀들이 무사히 빠져나오기도 했지만 미국에 있던 한 쌍의 남녀는 그럴 수 없었다.
청년은 사건 이후, 직장을 그만두고 그녀와 함께 지내던 집에서 눈물로 세월을 지새우고 있었다.
“앨리스…….”
그녀가 마지막까지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매만지며, 그녀와 함께 있던 장소를 더듬으며 추억을 되새기는 것만이 일상이었던 나날.
앨리스를 잃고 폐인에 가까운 생활을 이어 나가던 그에게, 어느 날 계시처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려왔다.
-후회되나? 절망스럽나?
“……하느님?”
-후회되느냐고 물었다.
“후회됩니다. 그때 차라리 함께 죽을걸. 아니, 차라리 그녀의 마지막 유언을 듣지 않았다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를 매일 합니다.”
-그럼 왜 네게 깃든 힘으로 그것을 되돌리지 않지?
“……?”
어느 순간 들려온 의문의 목소리의 말이 계기가 되어, 그는 각성자로서의 능력을 자각하였다.
얼마 전의 시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말 그대로 시간을 되돌리는 힘.
[불과 일주일 전, 갑작스러운 사고에 휘말렸던 사람들이 회복하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특이한 능력을 보이는 사람들이…….]
하루 전 낮에 보았던 뉴스의 보도를 다시 보는 체험.
“이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과거의 시점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듯이 ‘현재의 나’를 과거의 공간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기억과 의식’을 가지고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가는 능력이었다.
그 어떤 능력도 자각하지 못했고, 세계에 각성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이었기에 체계적인 검사도 없던 시기였다.
-네게 주어진 능력은 엄청난 힘이다.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국가나 세계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이지만…… 네가 원하는 용도는 이것이 아니겠지?
“앨리스를…… 그녀를 다시 보고 싶어. 다시 보고, 만나고, 별것 아닌 이야기로도 웃을 수 있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어디 한번 노력해 보도록.
그 이후로 수없이 많은 연구와 노력을 했지만, 그가 거스를 수 있는 시간의 흐름이 밀려오는 시간의 흐름보다 많아지는 일은 없었다.
아주 잠깐의 시간을 거스르는 힘으로 돈을 긁어모았고, 그 과정에서 냄새를 맡은 범죄자들에게 쫓기는 일도 있었지만 그는 매번 도망칠 수 있었다.
모은 돈들은 모두 마력량을 늘리는 데에 투자되었지만, 마석이 시장에 풀리는 물량도 그리 많지 않았고 불법적으로 번 돈과 마석이었기에 가성비가 나빴다.
그런 방식으로 늘어난 마력량이 아무리 많아도 연 단위의 세월을 거슬러 갈 순 없었다.
과거로 돌아가도 마력의 양은 어느 정도 유지되었지만 한 번에 소모하는 양 또한 그에 비례해서 많아졌기에,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은 형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젠장……!”
-이제 자신의 무력함을 실감했나?
오랜 노력의 세월 동안 한 번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던 목소리가, 포기하려던 순간에 비로소 말을 걸어왔다.
-큰 도움은 줄 수 없지만, 지금까지 노력해 온 것들을 모두 포기하고 단 한 순간 먼 과거로 돌아갈 수 있지. 예를 들면…… 10년 정도 전일까.
“뭐……? 아니, 할 수 있다면 해 줘! 해 주십시오!”
-알았다. 다만…… 네가 선택한 것이란 걸 잊지 말도록. 어디까지나, 네 힘이니까.
“힘이…… 강해졌다는 게 느껴져…….”
알 수 없는 목소리의 대답 이후에 자신의 마력이 늘어났다는 것과 지금까지 느껴 본 적 없을 정도의 힘과 자신감이 느껴지자 그는 곧바로 모든 힘을 쥐어짜 과거로 돌아갔다.
그때, 혹시 모를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단 생각에 공포를 느껴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았기에 그는 실로 간만에 느껴 보는 그리운 감촉과 온기가 손에서 느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수없이 만지고 잡아 왔고, 또 그보다 수백 배는 더 그리워한 앨리스의 손에서 느껴지던 감촉이었다.
“앨리스…….”
그는 감동과 환희에 휩싸여 눈을 떴지만, 그는 눈을 계속 감고 있었어야 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느꼈던 공포가, 눈앞에 더욱 참혹한 현실이 되어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육신과 그곳에서 천천히 새어 나오는 혈액.
애정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바라봐 주었던 눈동자는 그 빛과 안에 담겨 있던 감정을 잃었다.
흉터로 인해 웃을 때 한쪽 볼에만 생겨나던 보조개도, 이제 더 이상 생겨나지 않았다.
흘러나오는 혈액은 소량이었지만, 그로 인해 언제나 따뜻하고 안정을 안겨 주던 몸은 느릿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득 안았던 그는, 앨리스가 사망한 직후의 순간으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어떤가? 아무리 힘이 더해져도 네 한계를 넘을 순 없어.
“너! 누구야! 누구길래 나한테 이런 악몽을 다시 보게 하는 거야!”
그는 자신이 앨리스가 죽었던 순간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자, 이 시점으로 돌아오게 한 의문의 목소리에게 엄청난 분노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악몽이라고? 죽은 직후의 모습이라도 볼 수 있게 해 주었는데. 그리고…… 과거로 돌아가는 힘 자체는 너의 능력이지만 그 능력이 언제 생겼는지는 기억하나?
그러나 목소리는 차분하고도, 극히 현실적인 말을 해 왔다.
자신은 도움을 주면 줬지, 나쁜 의도는 없었으며…… 그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까지.
“그…… 이전……?”
-나는 세상을 내려다보고 이렇게 말을 걸 수 있는 데다, 약간의 간섭까지 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불가능한 것을 행할 순 없다.
시간을 역행하는 힘의 잠재력을 극한까지 개화시켜 줄 순 있지만 그 한계, 능력을 얻은 시점 이전까지 되돌려주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을 한 의문의 목소리.
-하지만, 네가 이 세상의 규칙 하나만을 깨트려 준다면 난 너를 도울 수 있다. 네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물론, 네가 사랑하는 여자를 되살리는 것도,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할지도. 어때?
그는 메말라서 갈라진 대지에 내리는 비처럼, 자신의 절박함을 채워 주는 달콤한 말에 고뇌하기 시작했다.
“하…… 하하…… 신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신은 시련과 구원은 내려도 거래를 하진 않으니까. 나한테 악마가 붙어 버렸군. 그것도 아주 지독하면서도 강한 악마가…….”
-그래서…… 하지 않겠다고?
“아니, 하겠다. 오히려 악마일수록 좋지. 신이 해서는 안 될 행동도 마음대로 저지르고 다니니까.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면, 악마를 찾아야 하지 않겠어?”
-좋아, 그렇다면 할 일을 얘기해 주지. 모든 것은 네가 소원을 이룰 때까지.
“그래…… 모든 것은 앨리스를 다시 볼 때까지.”
그렇게 미국에서 한 청년이, 사랑했던 이에 대한 일념 하나만으로 알 수 없는 존재와 계약을 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