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3화
(19)
-나는 지금껏 전부 다 이겨 왔다.
‘말라빠진 놈이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단순히 힘만 믿고 덤벼 오는 상대에게는 기술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으아악?!’
-전부, 다 이겨 왔다고.
‘다 보인다! 네 움직임이! 느려 터졌구나!’
속도를 믿고 덤벼 오는 상대에게는 의표를 찌르는 전술로 승리했다.
‘이럴…… 수가!’
-그런데, 그런 내가 어째서……!
‘후우우…… 흐읍!’
보석을 깎아 내듯 조심스럽고도 세밀하게 기술을 다듬고 정련한 이에게는 기술로 극복하지 못할 힘과, 비슷한 수준의 기술 구사로 이겼다.
‘깔끔하게 졌다. 불합리하면서도 기쁘구나. 이런 재능을 만날 줄이야.’
-그렇게 승리의 길만을 걸어온 나에게, 이런 패배감을 안겨 주다니……!
‘다만…… 실패를 겪어 보지 못한 이는 괴물이 되기 마련이야. 그게 공부이든, 인생의 길이든…… 실패를 모르는 만큼 어딘가가 결여된다.’
성인이 되고, 능력을 각성한 이후로 정면 승부로 단 한 번의 패배도 겪어 보지 않았던 하오다는 지금 비참한 패배의 쓴맛을 느끼고 있었다.
“크흑, 쿨럭.”
‘지금까지 근접 싸움에서 두 번 이상 패배한 적이 없었다……. 처음 접해 정보가 없는 무술들도 전부 극복해 왔다! 나는…… 나는 전투의 천재란 말이다……!’
모르는 것, 알 수 없는 기술들이라고 할지라도 싸우는 경우에 두 번 이상 당한 적 없는 하오다였지만 오늘밤에는 그런 경우가 너무 잦았다.
“내가…… 정면 승부에서…… 질 리가 없다…….”
자신이 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약점이 없다고 확신하는 그 태도가 오히려 약점이 된 상황.
하오다는 바깥의 부하들을 부를 생각도, 도움을 요청할 생각도 하지 않다가 어느새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하오다의 앞에서, 조금 지친 듯 호흡이 흐트러졌지만 굳건히 선 상태로 하오다를 내려다보는 영의.
“후우……. 이거 완전 미친놈 아냐?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계속 같은 방법으로 밀고 나오네. 다른 칼은 장식이냐?”
영의는 하오다에게 같은 방법만 사용한다며 비난했다.
하오다와 영의는 여러 번의 충돌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하오다는 대퇴골 골절이란 부상을 입었다.
모두 근접전을 고수하다 벌어진 사태로, 아까처럼 거리를 벌리거나 하다못해 부하들을 불러 원거리 공격이 날아드는 난전으로 만들었다면 이런 사태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장식? 크흐흐, 장식일 수밖에 없지. 수라도는 무게중심과 중량까지 같게 맞춘 다른 검들보다 무거운 검이니까. 그리고…… 근거리에서의 전투는 내 자부심이다. 도망칠 수는 없지. 너도, 자부심을 가진 것을 버리진 않을 것 아닌가?”
약점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가진 하오다의 무력.
근접전에서만큼은 그 누구와 맞서도 밀리지 않았던 그 무력은 그의 자존감의 원인이 되었고, 그것이 이 승부에서 악수를 두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
“크흐흐, 오래전에 내게 깨진 한 유파의 당주가 한 말이 생각나는군. 실패를 겪어 보지 못하면 괴물이 된다던가? 하나 묻지, 너도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적 있나?”
하오다는 웃음과 함께 영의에게 질문을 던졌고, 영의는 침묵했던 이전과 달리 방금 전의 질문에는 대답해 주었다.
“있지. 여러 번.”
10년 전에 있었던 한 번의 좌절과, 그 이후로 이어져 온 민간인에 가까운 생활.
성공 가도만을 달려왔던 하오다와 달리 상대적으로 초라한, 평범한 삶이었다.
그리고 영의의 대답을 들은 하오다는 그 대답에 뭔가를 납득한 듯 고개를 떨궜다.
“그랬군, 그게 내 패인인가…….”
“후우…….”
‘중간중간에 체내 뇌기를 활성화시켜서 어떻게든 이겼네. 그보다, 공격 반사하는 검이랑 불길해 보이는 검은 무서웠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의미로, 받은 충격을 흡수하고 방출시키는 기묘한 능력의 지옥도.
그리고 영의가 상대하진 않았지만, 적의 기력을 빼앗는 축생도가 있었다.
다만 영의가 직접 당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는 축생도를 그저 주변의 공기가 일렁이는 수상한 검 정도로만 느꼈었다.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은 천도와 효율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사용하지 않은 수라도를 제외하고, 다른 검들은 모두 창고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좋아……. 그럼 일단 상황 정리를 하러 가야 하나……?”
영의가 창고의 바깥으로 나가려는 듯 등을 돌려 문을 향했을 때, 하오다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뜩 들었다.
“지금이다! 영감!”
검객의 자존심은 정면 승부에서 박살 났지만, 그래도 하오다의 안에서는 야망이 있었다.
그리고, 패배로 손상된 자존심이 영의에 대한 살의와 파드레의 개입에 대한 망설임을 없애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늦게나마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군. 그래도, 뼈 하나 부러진 상태에서 도움을 요청한 것은 제법 빠른 판단이었네.”
창고 안에 달린 여러 조명으로 인해 생겨난 그림자들.
영의의 몸 주변에도, 하오다의 몸 주변에도 존재하는 그 그림자들 속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 악감정은 없지만, 저 녀석을 도와야 하니 이곳에서 자네를 처리하도록 하지.”
그림자와도 같은 검은색 날을 가진 단검을 꺼내며 영의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오는 정장 차림의 노인, 파드레.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그림자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는 상황에 당황하거나, 새로운 적의 등장이라 생각하고 맞서 싸우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의는 그런 경우들과 달리,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나도 할 말이 있어. 지금이다!”
팟.
영의는 손을 머리 위로 뻗는 동시에 소리를 쳤고, 그와 동시에 천장의 조명들이 꺼졌다.
파직!
“조명을?!”
창문도 없고, 문 틈새로 들어오는 빛도 없는 완벽한 어둠의 밀실.
그러한 어둠 속에서, 이 자리에 있던 세 사람 중 그 누구의 목소리도 아닌 목소리가 울렸다.
“잘했다. 중간에 조금씩 쓴 얍삽한 수는…… 뭐, 봐주지.”
의문의 목소리가 잠시 울려 퍼진 이후, 닫힌 문의 틈새를 통해 어두워진 창고의 내부로 옅은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비치던 조명의 밝은 백색이 아닌, 백열전구에서 나올 법한 주황색의 빛.
그런 빛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하며 창고의 문이 열렸다.
드르르륵-!
“내, 외부 조명이 모두 나간 걸 확인했다! 상황은?!”
창고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인드라였다.
바깥에서의 싸움이 상당히 격전이었던 건지, 그의 옷이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지만 큰 부상을 입은 부위는 없어 보였다.
“끝났어.”
영의는 바닥에 쓰러진 하오다를 가리켰고, 하오다는 자신의 눈앞에 있던 파드레가 사라진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사라졌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최후의 수단이자,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서 그를 보호해 줄 인물이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비록 지시를 받고, 이해관계로 맺어진 보호였지만 파드레의 암살 능력만큼은 확실하였기에 마음속 한구석에 희망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파드레가 갑작스럽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싸움이 일어난 것 같지도 않고, 자신을 버리고 도망갔다기엔 중간에 들린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더군다나 바깥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인드라.
그 말은 자신의 부하들…… <부시도 스피리츠>의 간부들이 모두 패배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5:3, 부상자인 시즈카나 싸울 마음이 없는 료를 제외하더라도 3:3의 싸움이었을 텐데 패배한 것이다.
“대체…… 무슨…….”
하오다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란을 겪고 있을 때, 창고의 내외부에 다시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파앗.
“좋아, 바깥은 어때?”
환하게 밝혀진 창고의 내부에서, 영의는 바깥 상황을 확인하려는 듯 인드라에게 바깥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다수의 타박상과 피로, 대퇴골 골절을 입긴 했지만 전투 불능의 상태는 아닌 하오다를 그냥 방치해 두고서.
‘이 자식…… 어떻게 한 건진 몰라도,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다……!’
하오다는 양손의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문제없군.’
전완근, 상완근, 이어서 광배근과 척추기립근 등 상체의 근육들을 확인하는 하오다.
‘제법 회복되었군. 다리도 부러진 곳의 고통이 이제 익숙해졌다.’
하오다는 부러지지 않은 오른쪽 다리와, 쉬었기에 체력이 회복된 다른 신체 부위를 확인하고 영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잡아 두다니, 어떻게?”
“강압적으로는 할 생각이 없었고, 또 살생을 저지를 마음도 없으니 흙 속에 파묻어 두었지. 얼음도 나름의 방법이지만 동상을 입을지 몰라서.”
바깥에 잡아 둔 부하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하오다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뛰쳐나갔다.
‘죽어라!’
왼손으로는 수라도를 뽑아 던졌다.
이것은 영의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인드라를 노리고 던진 것이다.
‘한번 맞서 본 적 있으니 경계하겠지!’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남아 있는 마지막 검, 천도를 뽑은 뒤 양손으로 잡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죽어라!”
대외적으로 확실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하오다의 능력은 분류로 따져 보면 강화계가 아닌 보조 계열이었다.
강화계, 속성계가 아니면 대부분 보조로 치부하지만 보조 계열도 그 능력을 쓰기 나름에 따라 충분한 전투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예시로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병찬의 능력은 그저 탈것을 빠르게 달리게 해 주는 능력 같지만 정확히는 기마 돌진.
타고 있는 물체를 충돌시켜 막강한 파괴력을 만들 수 있는 흉악한 병기로 바꾸는 능력이었지만 게이트 내부에서의 효율과 탑승할 물체의 내구성 및 유지 비용 때문에 단순한 배달부로 살고 있었다.
그리고 하오다의 능력은 에너지 조작.
염동력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성질의 것으로, 그와 비슷하지만 진행 방향만을 바꾸는 벡터 조작보다 더 범용성이 넓었다.
암석의 파편이나 검 같은 것은 직접 대처하면 되지만, 불꽃이나 번개 등 멀리서 날아드는 부정형의 공격은 대처할 수 없는 하오다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능력.
그 덕분에 그의 앞에서는 전격, 화염, 하다못해 단순한 물벼락까지 모두 베어 낼 수 있는 돌 조각이나 천 조각과 다를 바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능력의 적용 범위가 그의 몸과 그가 잡고 있는 물체로부터 50cm 남짓한 곳이 한계였고, 어떠한 힘을 조작할 때 그와 같은 반작용이 그에게 되돌아오는 부작용이 있었다.
그에게 작용하는 힘은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었지만, 그 자신이 사용하는 힘에 대한 반작용은 조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문제가 없었다.
단순히 진행 방향을 옆으로 돌리거나 튕겨 내는 수준이었고, 해 봐야 그의 손에 압박붕대를 감은 듯한 느낌밖에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가 하려는 일은 그런 범주의 것이 아니었다.
하오다는 천도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내려치려는 동작을 취했고, 영의는 그 동작에 제때 반응하여 검을 막기 위해 팔을 올렸다.
“또 덤비냐?!”
휘익!
그러나 당장이라도 머리를 둘로 갈라 버릴 듯한 기세로 천도를 휘두르던 하오다는 중간에 검을 놓았다.
“뭔……!”
더군다나, 천도에는 검날마저도 없었다.
하늘이라는 이름답게, 인간이나 지상의 것이 아닌 다른 것을 베기 위한 검은 하오다가 원하는 것만 베어 내기 위해 사용하는 검이었다.
시즈카의 팔에 감겨 있던 붕대도 붕대만을 골라, 천도로 잘라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천도로 영의의 방어를 이끌어 낸 하오다는 검을 막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린 영의의 몸통을 향해 주먹을 꽂아 넣었다.
“체스토!”
기합 소리와 함께, 그가 수련해 온 가라데의 정권이 그대로 영의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들어간다……!’
타악!
그러나 영의는 반대쪽 손으로 하오다의 주먹을 잡아내었고, 그렇게 하오다의 기습은 실패로 끝나는 것으로 보였다.
“크흐흐흐흐……! 분명히 ‘막았다’. 닿았다 이거지……!”
하지만 하오다는 기습이 영의에게 유효한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했음에도 웃기 시작했다.
“너, 뭐가 그렇게 웃긴…….”
영의가 하오다의 뜻 모를 행동에 대한 것을 묻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공격을 받아 낸 손에서 어떠한 소리가 들려왔다.
뚜두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