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2화
(18)
과거의 일본.
전국시대라는 유혈이 낭자하던 투쟁의 시대부터 대대로 무장을 배출해 온 가문들이 있었다.
검술의 예리함이 극에 달했다고 하는 텐이치 가문과 호쾌한 검술과 뛰어난 체술을 타고나는 하오마루 가문.
다이묘를 배출할 정도로 거대한 세를 가진 두 가문은 그 아래에 가신의 역할을 맡는 가문 중에 대가문이 있을 정도의 대형 가문이었다.
교토에 위치한 두 가문은 선조부터 대대로 경쟁해 오던 사이였고, 한 세대가 패배하면 그 아래 세대가 복수하는 등 오랜 세월 동안 피를 흘려 왔다.
그러나 그런 투쟁의 역사 가운데에서, 드물게 평화가 피어날 때도 있었다.
약 100여 년 전, 20세기 초반에 텐이치 가문의 장녀와 하오마루 가문의 차남이 서로에게 반했다.
서로의 가문이 죽일 듯이 경쟁하는 와중에 사랑에 빠져 버린 로미오와 줄리엣과도 같은 운명.
그러나 둘은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처럼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둘은 곧바로 각자의 위치에서 챙길 수 있는 가산과 검술의 비전 사본을 챙겨 다른 곳으로 사랑의 도피를 했다.
각 가문은 그 사실을 금방 눈치채고 사람을 보내 뒤를 쫓았지만, 여건이 좋지 않았다.
둘이 도망친 곳은 도쿄였고, 수도였던 도쿄에는 근대화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동시에 빠른 발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거기다가 가문의 위세가 잘 먹혔던 옛날과 달리 빠르게 발전하며 의식의 개혁이 일어나던 도쿄에서는 그들의 권력이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도망친 두 남녀는 이내 가정을 이루고 성과 이름을 바꾸었으며, 그렇게 바꾸게 된 성이 바로 마루이치라는 성이었다.
최초의 마루이치 부부 모두 검술의 재능은 있었지만 빠르게 변해 가는 도쿄에 거주하며 시대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마루이치 부부는 그 변화에 자신들의 검술과 비싸게 팔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챙겨 온 그 비전은 필요 없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고, 가져온 가산을 자본 삼아 장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교토에서 살며 옛 방식을 따라 오던 부부는 새로운 문물들에 눈을 떴고, 전기 제품과 자동차 관련 제품을 팔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도 전기와 자동차는 2차 대전 이전이나 이후에도 나름 장사가 되는 품목이었기에 자본금이 충분했던 마루이치가는 안정적인 삶을 꾸려 나갔다.
마루이치라는 이름이 최초로 생겨난 지 80년 후, 10세 남짓한 가문의 장남이 호기심에 들어간 집 안의 창고에서 낡은 서적을 발견했다.
“이건……?”
재미있는 물건이 없을까 싶은 생각에 어린 소년의 행동력과 호기심이 자극받아 들어간 창고의 상자 안에서 발견한 두 책.
[하오마루식 전투 기술]
[텐이치류 검술]
가문의 선조라고 할 수 있는 마루이치 부부가 가문에서 훔쳐 왔지만 쓸 일이 없다고 여겨 보관하게 된 검술의 비전이었다.
타고난 재능을 어렴풋이 알아서일까? 아니면, 두 가문에서 물려받은 피가 본능적으로 알아챈 걸까?
“……멋져.”
하오다는 그 서적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느꼈고, 그의 손은 자석에 쇠붙이가 이끌려 가듯이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여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의 인생에 있어 검이라는 길을 걷게 해 준 계기이자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오다는 곧바로 자신의 조상이 있었던 두 가문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검술은 교본만으로 익힐 수 없었고, 하다못해 검술을 익힌 사람이 없더라도 더 많은 교본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세계대전과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과거의 위세가 깎여 나갔지만, 그 검술만큼은 그대로 계승되었던 두 가문은 아직도 가신이 있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비전의 검술을 수련하던 하오다는 혼자 여행을 갈 만한 나이가 되자 곧바로 교토로 향했다.
“이 검술 책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는 단순히 검술 책에 대해 묻기 위해서 왔었고, 일부 발음만 같았지 한자가 다른 두 가문이었기에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두 가문의 입장은 달랐다.
“도둑의 후예구나!”
“네 조부가 훔쳐 간 물건을 내놔라!”
두 남녀가 각 가문에서 가져간 가산은 상당히 값어치가 있었기에 그 사실이 기록되고 있었고 그때 사라진 검술 비전 탓에 세월이 지난 지금도 모두가 알 정도의 일이었다.
그렇게 위협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한 이들을 상대하기 시작한 하오다.
그는 검술을 배울 때 이웃집 노인이 선물로 준 낡은 목도 한 자루로 모두 제압했다.
하오다는 하늘이 내려 준 듯, 양 가문에서 물려받은 재능이 있었고 그 재능은 확실히 검을 휘두를 때에 나타났고, 사람을 상대할 때는 더욱 확연히 나타났다.
그 결과 현대에 와서도 전통대로 검술을 수련하는 데에 힘을 쏟는 두 가문의 일원들이, 옛날에 가문에서 갈라져 나간 외부인에게 모두 쓰러진 것이었다.
그 이후로 하오다는 실력으로 모두를 누른 뒤, 가문의 일원 자리를 꿰찼다.
옛날에도 재능만 있다면 양자로 들여서라도 입적시키는 일이 있었던 만큼 그의 실력은 그러기에 충분했다.
마치 옛 검호, 미야모토 무사시의 재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재능과 빠르게 향상되는 실력 앞에서는 그 누구도 반론할 수 없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양 가문의 가신 가문과 그 일원들도 하오다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이내 양 가문의 주요 인물로 떠오르기 시작한 하오다는 본격적으로 무를 수련하기 시작했고, 두 가문이 가지고 있는 정보와 인맥으로 수많은 무술가들을 찾아갈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고, 이내 본인의 성인 마루이치로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 두 가문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 과정에서 각 가문의 소속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대대로 두 가문을 섬겨 온 가신인 아카이 가문과 타치바나 가문은 멀쩡했고 여전히 하오다를 따르고 있었기에 그렇게까지 큰 일은 없었다고 추정되었다.
그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수하이자 길드의 간부인 아카이 시즈카와 타치바나 야이바는 대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당주를 돕거나 당주의 성가신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담당이었다.
조용하다는 뜻의 시즈카와, 칼날이라는 뜻의 야이바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 온 이름으로 그 직책과 이름을 각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이들에게 물려주었다.
두 명의 가신…… 닌자에 가까운 둘과 함께 교토의 가문 둘, 그리고 각성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능력까지 얻은 하오다는 빠르게 성장하여 <부시도 스피리츠>를 창설하고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다.
마치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파란만장하면서도 행운이 따르는 인생을 살아온 하오다.
그러나 하오다는 지금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답지 않은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크흑, 커흑!”
“일어나. 여기까지가 전부야?”
생전 처음 본 인물인 데다 이름까지 들어 본 적 없는 상대와의 싸움에서, 마치 패배한 것처럼 바닥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내가……! 무사시의 재림인 내가! 검 한 자루로 일본을 평정하고 왕의 자리에 앉아야 할 이 내가아아아!’
하오다는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눈앞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름도, 정체도 알 수 없지만 기묘한 기술로 예측을 빗나가게 만드는 상대.
전투에 사용하는 기술 자체는 확실히 그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었다.
무를 수련했던 그에게는 상대방이 사용하는 기술이 고도로 다듬어지고 정련된, 오래된 기술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있었다.
그런 만큼 상대가 상당한 고수인 것은 머리로 이해를 할 수 있었지만, 싸우는 도중에 보이는 알 수 없는 가속이 문제였다.
‘젠장, 뭐지? 흐름이 끊기니 대처하기가 힘들어!’
싸움에서는 일정하게 유지되는 리듬이 있다.
그 리듬은 누군가의 습관 때문에 생겨나기도 하고, 둘의 전력이 맞부딪치며 생겨나기도 한다.
어떤 싸움에서도 그러한 리듬은 존재했고, 하오다는 그런 리듬을 잡아내는 데에 일가견이 있었지만 지금 그가 상대하는 이는 그런 리듬이 적응되려 하는 순간마다 깨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데?
그의 그림자에 숨은 파드레가 그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지만, 지금의 하오다는 지금껏 힘으로 쌓아 온 세력이 있는 만큼 육탄전에서 밀린다는 사실에 본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기에 그의 도움을 거절하며 소리쳤다.
“저놈은! 내가! 죽인다! 내 손으로! 직접!”
하오다는 바닥에서 일어나며 손안에 들고 있는 아귀도를 옆으로 던졌다.
챙그랑!
창고의 바닥에 두 자루의 검이 굴러다니고 있지만 아직 네 자루의 검이 남은 하오다.
그는 다른 검을 뽑기 전 상대방의 체술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젠장…… 옛날 같군. 하지만 그때보다 더 까다롭다.’
타고난 재능을 살려 무도의 길에 몸을 담고 다른 유파의 도장을 방문했을 때, 하오다는 이미 천재로 불리던 시절이라 어디를 가더라도 승리할 것이라 확신했었다.
그러나 그런 선천적인 반사 신경과 동체 시력으로 그 어떤 무술도 단련이 아닌 재능으로 해결해 온 하오다에게 처음으로 완벽한 패배를 안겨 준 곳들이 있었다.
일본의 한 고(古)무술 전승자가 있는 곳과, 합기술의 달인이 있던 곳이었다.
둘 다 상대방에게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 대신 후발 공격…… 카운터와 회피를 주로 수련하던 유파.
그때의 패배 이후 하오다는 그들의 기술을 배우며 성장할 수 있었고, 체술에도 상당한 일가견이 있게 되었으나 상대의 체술은 그보다 한 단계 위였다.
하오다는 결국 다른 검을 뽑기로 마음먹었다.
“……지옥도, 축생도.”
왼손에는 검은색의 몸체에 날이 날카롭게 서 있지 않고 검의 형태만 하고 있는 일본도.
오른손에는 불그스름한 색의 몸체에 중간중간 구멍이 뚫려 있는 특이한 형태의 롱 소드가 들려 있었다.
그 특이한 두 자루의 검을 동시에 뽑아 든 뒤, 양손에 하나씩 쥐는 하오다.
싸우던 도중 갑자기 뭔가 소리치더니 검을 양손에 한 자루씩 쥐는 기행을 목격한 영의는 그 행동에 의문을 품었다.
“이도류?”
하오다는 이도류를 구사하기 시작하며 올곧은 자세와 매서운 기세를 뿜어내던 아까와 다른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냥 폼만 잡는 줄 알았는데, 뭔가 있긴 한가 보네.”
서 있는 자세는 거의 그대로였지만, 그의 팔은 늘어뜨려져 적을 향해야 할 검이 바닥을 향했다.
허리는 곧게 펴져 있었지만 척추기립근을 비롯한 그의 근육들은 긴장하고 있지 않은 상태, 마치 편하게 누운 것만 같은 부드러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탈력…….”
“아는군? 이제부터 진심으로 하겠다는 뜻이다. 진검 승부를 하겠다는 말이다! 이 마루이치 하오다가! 모든 걸 걸고! 널 죽이겠다!”
“그럼 아까까지 들고 있던 건 진검이 아니라 목검이란 소린가?”
영의는 그 와중에도 하오다에 대한 도발 겸 농담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결의와 각오를 밝혔음에도 말장난을 하는 상대의 태도에 하오다가 화를 내는 것은 당연했다.
“네노오오오옴!”
그렇게 분노한 하오다는 붉은색과 검은색의 검을 휘두르며 영의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