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4화
(10)
경기도 외곽, 한적한 논밭들과 국도에 간간이 오가는 차량만이 보이는 곳.
이런 한적한 전원에 정장 차림의 중년 남성이 구두를 신고 흙길을 걷고 있었다.
“은밀함 하나만큼은 확실하군.”
남성은 고개를 슬쩍 내려 손에 쥔 휴대폰에 표시된 지도를 살펴보았다.
지도에 찍힌 붉은 점과, 자신이 서 있는 지점을 뜻하는 푸른 점이 거의 겹쳐진 상황.
“……어디서 이런 곳을 구한 거지?”
일본에서 다이카와 인드라, 찬드라가 탈출한 이후 용신은 그들을 수색 및 보호하라는 지시를 영의에게 내렸었다.
격식은 별로 없지만 일단은 상급자와 하급자의 관계였고, 강압적으로 시킬 수도 있는 사이였기에 그 지시를 충실히 이행한 영의.
지시가 내려진 지 1분도 되지 않아 완수했다는 영의의 보고를 받은 용신.
그는 너무 빠른 완수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이런저런 준비와 하던 일들을 해결해 두고 영의가 알려 준 장소로 향했고, 그 결과 도달한 곳이 외딴곳에 있는 집이었다.
진입로로 시멘트가 깔려 있긴 했지만 여기저기 부서지고 흙으로 덮여 있었고, 그마저도 중간에 끊겨 흙길이었다.
단층이지만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마당이 있고, 그런 마당을 둘러싸는 2미터 남짓한 담장과 대문에는 넝쿨이 가득 얽혀 있었다.
담장 바깥만 본다면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처럼 보였지만, 집 자체는 외관이 멀쩡했고 전기가 들어오는지 불까지 환하게 켜져 있었다.
“숨기라고 했는데, 불을 켜 놓다니. 무슨 생각인 건지.”
용신은 아무리 좋은 장소를 골랐다지만 불을 켜는 등의 눈에 띄는 행동을 한 영의의 선택을 섣부른 안심에서 나온 방심이라고 여겼다.
끼익-
대문까지 잠겨 있지 않았기에, 그는 영의가 너무 생각 없이 행동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며 집의 문손잡이를 잡았다.
철컥, 철컥.
“……이건 잘 잠가 놨군. 그래, 오히려 사람이 사는 것처럼 위장하는 게 낫겠지.”
찰칵-
용신은 잠금을 간단하게 해제하고 안으로 들어갔고,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낯설지 않으면서도 여기선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야, 행님 아시는 분 오셨네예! 이래됐으니 뭐 하나 시킬까예?”
그가 영의를 찾으러 왔을 때 보았던, ‘나름 재미있는 녀석 1’로 기억 중이던 병찬이 있었다.
“……?”
그리고 그런 병찬의 뒤로, 있어야 할 인물들이 보였다.
그것도 다소…… 독특한 형태로.
화려한 꽃무늬와 넉넉한 바지통에 또 늘어나기도 잘 늘어나는, ‘몸빼’라고 불리는 일바지를 입은 인드라와 찬드라.
다이카는 둘의 바지가 촌스러워서 안 입은 것 같지만 그녀도 후줄근한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거기에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하얀 면 티셔츠를 입고 숟가락을 든 채 무언가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행님이 모르는 사람 오면 쪼까내라 캤는데, 면식이 있으니까 모르지는 않지예? 들어오이소. 문단속은 안 해 놨던 거 같으니까는 그냥 두이소.”
용신은 집 안 여기저기를 살펴봤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이들을 제외하고 인기척이 느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영의는?”
필시 어딘가에 잠시 나가며, 그 감시 역이나 보조역으로 병찬을 붙인 것이라 생각한 용신.
‘그래도 믿을 수 있으니까 부른 거겠지.’
용신의 물음에, 병찬은 순순히 영의가 어디로 갔는지 대답해 주었다.
“나간 지 얼마 안 됐는데, 못 봤어예? 저 꼴을 차마 못 보겠다 카고 먹을 거도 사러 간다 캤는데…….”
병찬은 인드라와 찬드라, 다이카가 있는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아무래도 그들의 복장은 영의가 의도한 것이 아닌 듯했다.
“……그럼, 기다리고 있지.”
용신은 집의 바깥으로 나가서 팔짱을 끼고 구름이 군데군데 낀 하늘을 올려다보며 영의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기다리는 동안 구름이 달을 지나가며 달빛을 두 번 정도 가렸다.
또 다른 구름이 지나가며 세 번째로 달을 가리고 있을 때, 하늘에서 한 남자가 떨어져 내렸다.
타악.
높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치고는 제자리 점프를 한 것 같은 경쾌하고도 가벼운 착지음.
남자는 머리에 헬멧을 쓰고 있었지만, 마당에 내려앉자마자 헬멧을 벗었다.
바스락-
남자의 손목에 걸린 검은 비닐봉지가 움직임이 흔들리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후우, 밤이라 그런가 가게들이 다 문을……. 응?”
남자, 영의는 헬멧을 벗으며 혼잣말을 내뱉는 순간 마당 한구석의 그림자에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때마침 구름이 달빛을 가렸기에, 육안으로는 검은 옷을 입은 상대를 구별할 수 없었지만 영의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상대방을 이미 알기라도 하는 듯, 영의는 매우 확신에 찬 목소리로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병찬아?”
하지만 그 짐작은 틀린 짐작이었고, 용신은 그 짐작이 틀렸다는 것을 직접 증명해 주려는 듯 그림자 밖으로 나왔다.
“나다.”
“아, 아니었구나.”
영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던 것이 머쓱한지, 뒤통수를 긁적였다.
“물어볼 건 이것저것 있지만 가장 먼저 하나만 묻지. 왜 저 녀석을 끌어들인 거지?”
용신은 영의가 병찬을 끌어들인 이유가 진심으로 궁금했다.
‘조금 모자라지만 그래도 순박하니 믿을 만한 녀석이라 잠시 부려 먹으려고? 아니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보험?’
영의가 똑똑한 편은 아니라도 시키는 일은 확실하게 하는 인물이란 것은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용신.
하지만 병찬은 이 일에서 그가 생각한 것보다 더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음, 이 장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인물이라서요? 사실 저도 진짜 우연히 여기에 대한 정보를 얻어서.”
“뭐……?”
다이카와 인드라, 찬드라를 발견했을 때 영의는 일단 그들을 설득하긴 했지만 어디로 데려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제일 좋은 방법은 내 집인데…… 문제는 4명씩이나 못 들어간단 말이지.’
물론 4명이 들어갈 순 있지만 4명을 거기서 지내게 하는 것과 잠시 머무르는 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게다가, 주변에 은근 유동 인구도 많단 말이야…….’
그가 사는 곳이 생활공간으로 개조한 건물도 아니고, 애초에 사람 사는 공간으로 만들어졌으니 주변에 사람들이 오가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일본인이라 동양적인 외모를 가진 탓에 한국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다이카는 둘째 쳐도 누가 봐도 외국인인 게 티가 나는 인드라와 찬드라는 너무 눈에 띄었다.
신화 길드의 지하 훈련장이나 본가, 하다못해 외딴 건물이라도 찾아보려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씩 문제가 있었다.
지하 훈련장은 넓었고 물자 반입도 쉽지만 유동 인구나 보안성, 그 어떤 것도 충족해 줄 수 없었고 본가는 넓이나 보안이야 그럭저럭 좋았지만 유동 인구란 면에서 취약했다.
외딴 건물 중 나름의 보안이 엄중하고 사람이 잘 가지 못하는 곳은 그런 만큼 관리가 잘되어 있고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관리 부실이나 눈에 띄기 쉽다는 등, 나름의 문제가 생기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일단 급한 대로 다이카에게 필요한 의약품과 한밤중의 산에서 체온 유지를 하기 위해 필요한 담요 정도만 가져다준 영의.
그런 영의에게 뜻밖에도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었다.
그 구원의 손길이란 다름 아닌 병찬의 전화 한 통.
-행님, 울 할매가 지금 집을 비워가 그라는데 소주 한잔하실래예? 문단속할 사람이 없어가 내 지금 할매 집에 있어예.
병찬이 할머니의 집이 모종의 이유로 비어 버린 탓에, 그가 집에서 문단속을 맡아야 한다는 말을 해 온 것이다.
영의는 그 집의 주소와, 조건에 대해 물어보았고 그 집은 영의가 원하는 조건에 거짓말처럼 부합했다.
주변에 오가는 사람이 없거나 외딴곳에 떨어져 있는가 - 둘 다 Yes.
필요한 물건을 구해 오기에 용이한가? - 조건부로 Yes.
사람 네 명, 다섯 명이 지내도 충분하다 못해 쾌적할 만큼 넓은가? - Yes.
수도, 전기 시설 등 나름의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는가? - Yes.
지금 마음대로 갖다 써도 뒤탈이 없는가? - 양심이 조금 아프지만 Yes.
물자 반입의 경우에는 영의나 병찬이 다녀오면 되는 문제였다.
물건을 살 만한 가게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차로 20분은 걸리는 거리였지만, 영의나 병찬의 경우에는 20분이면 도시의 대형 마트까지 다녀올 수 있었으니까.
마음대로 갖다 써도 되는가에 대한 문제는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이왕 병찬이 머무르는 것 사람이 숨어드는 것이야 별문제 없을 거라 판단했다.
그렇게 영의는 세 사람을 데리고 병찬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처음엔 낯선 사람들에 당황했던 병찬도 그들을 환영해 주었다.
협력자도 생겼고, 누가 봐도 외딴곳이라 비밀도 보장될 것 같은 은신처까지 얻자 도망자 세 사람은 긴장이 풀려 좀 더 편한 복장과 음식을 찾게 된 것이다.
용신이 이곳에 도착해서 보게 된 광경이 바로, 병찬이 직접 비빈 ‘할매표 나물비빔밥’을 먹는 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군. 그리고 추가적인 물자의 조달을 위해 네가 나갔다 온 건가?”
일단 병찬이 있게 된 이유를 알게 된 용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본 상황과 이야기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거죠.”
상황 파악이 끝나자, 용신은 영의가 말해 주지 않은 다른 불안 요소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그보다, 원래 살던 사람이 있었을 텐데? 언제쯤 복귀하지? 그 녀석의 조모라고 했던가.”
용신은 이 장소의 주인이자, 변수라고 할 수 있는 병찬의 조모와 그 복귀 날짜에 대해 물어 왔다.
“병찬이네 할머니요? 병원에 갔다고 하더라고요.”
“입원이라……. 노인이라면 병이나 노환으로 그럴 수 있지.”
용신은 입원하게 됐으니 병찬의 조모가 금방 돌아오진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병원에 간 이유는 생각했던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아뇨, 입원은 병찬이네 부모님이 하셨고…… 할머니는 그 두 분 간호하러 가셨다는데요.”
조모 본인이 병원에 입원한 게 아니라, 간병을 위해 간 것이었다.
“……예기치 못한 사고란 건 누구에게나 한 번쯤 찾아오는 법이지.”
“한 분은 맹장염, 한 분은 식중독이라던데요?”
“…….”
자꾸 생각과 어긋나는 결과물이 나오자, 용신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거기까지. 잡담은 그만하도록 하지. 우선은 정보를 들어야 한다. 얼른 들어가 봐. 네가 설득하기에는 더 좋겠지.”
끼익-
영의는 용신의 말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문 열리는 소리에 식사를 마치고 둘러앉아 있던 세 사람과 병찬이 그를 돌아보았다.
“……왔군.”
“왔네요.”
인드라와 찬드라, 다이카는 영의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그가 오자마자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병찬은 충실하게 용신이 왔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얘기해 주었다.
“행님, 오셨네예. 그…… 뭐라 캤드라?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마는 행님 아시는 분 왔었던데?”
이름을 말해 준 적 없으니 모를 수밖에 없었지만, 그마저도 정직하게 답하는 병찬.
“방금 만나고 왔어. 앞에 있었는데 뭘.”
“아.”
영의는 한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를 든 채, 다른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집으로 들어서며 신발을 벗었다.
“그래서, 일단 뭐부터 얘기를 해야 하나?”
영의가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운을 어떻게 띄워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할 때, 인드라가 그를 검지로 가리켰다.
“생각하기보다는, 일단 먹으면서 이야기하지. 배가 불러야 뭐든 하는 법이니.”
찬드라와 다이카 또한 같은 생각인지, 영의가 든 봉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끄덕끄덕.
“……그럼 일단 먹으면서 이야기를 해 보자고.”
영의가 손에 든 봉지에는 병찬과 함께 먹기 위해 사 온, 튀겨 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달큰하면서도 맛있는 향을 풍겨 오는 호떡을 비롯한 각종 간식들이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