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7화
(3)
갑작스럽게 변화를 맞이하고 혼란스러워지는 세계 속에서, 영의는 만일을 대비한 보험으로 길드라는 세력을 곁에 두었다.
산하에 둔 것은 아니지만, 여차했을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위치에 둔 영의.
그리고 그런 세상의 혼란에 대비하는 것은 영의뿐만이 아니었다.
각국의 정부들은 길드의 활동량에 제지를 거는가 하면, 몇몇 사람들은 길드 본부 쪽이 있는 곳 주변으로 거주지를 옮기기도 하는 등 길드에 대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국제적 정세와 반대로 행동하는 지역도 있었다.
한 시골 마을.
허리가 굽을 대로 굽은 노인이 백발과 수염을 휘날리며 크게 소리쳤다.
“각성자들은 신이 내려보낸 전사다! 그 주변에 있으면 전부 죽게 될 거야! 신들이 벌을 내리면 감당할 수 없어!”
“전부 도망가자! 잘못하면 죽을지도 몰라!”
각성자를 신과 관련된 인물로 보고,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모두 도망가려는 사람들.
아직 토속신앙 및 과학에 대한 불신이 깊게 남아 있기에 각성자를 사람이라고 보지 않는 이곳은 바로 인도였다.
나름대로 발달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각성자들 또한 사람이기에 별문제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들은 역으로 발달한 지역인 자신의 도시가 공격받을 거라 생각하고 대피하려 했다.
그렇게 도시민들 몇몇이 다소 낙후된 지역으로 이동하자, 그곳의 거주민들이 심상찮음을 느꼈다.
‘저 돈 많고 계급 높은 놈들이 여기엔 왜 온 거지? 절대 오지도 않을 녀석들인데……. 설마, 무슨 일이 생기는 건가?’
평소라면 발길을 옮기기는커녕 쳐다보기도 싫어할 도시의 부유층들이 갑자기 낙후된 곳으로 온 데다, 관광이 아닌 생존을 목적으로 한 것 같은 절박함이 보이자 그들도 불길함을 느낀 것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도시의 사람들이 뭔가 피난하듯이 이동한다’라는 수준이었지만, 약간의 정보가 흘러들어 옴과 함께 구전 특유의 과장과 왜곡이 더해져 시골 마을에서는 ‘신의 사도들이 내리는 멸망을 피하기 위해 도망간다’라는 수준으로까지 소문이 와전되었다.
더 잘 먹고살기 위해 시골의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의 사람들은 수도로 몰리는 이촌향도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인도에서 발생했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위협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시에서 시골로, 시골에서 오지로 이동하는 뜻밖의 상황.
이런 상황에서 가장 낭패를 본 것은 정부도, 기업도 아닌 인도 최대의 길드 <아스트라>였다.
각성자들의 싸움을 두려워한 사람들이 하나둘 도망치기 시작하자,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이 곤란해진 것이다.
수많은 인구를 가진 인도이니만큼 다양한 지역에서 모인 수많은 인재들이, 각자의 이유로 부름을 받는 것이다.
-도시에서 일하면서 먹고사는 건 잘 알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불안해하신다. 와서 지켜 주면 안 되겠느냐. 가족이 먼저이지 않느냐.
심상치 않은 상황에 불길함을 느낀 고향의 가족들이 돌아오라고 전화하거나 편지를 부치는 것은 일상에 가까웠다.
-내 휴양지에 부랑자들과 도망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별장이 손상되고 있다. 여기에 있는 이 천민들을 쫓아내라.
길드와의 연줄을 이용해 말을 듣지 않거나 도망간 현지의 경찰 대신 사용하려 하는 갑부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테러나 사고를 경계하여 근로자들이 도망가 버려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게 다 당신들 때문이니 당신들이 배상해라.
각성자들의 충돌이 공포의 원인이니, 그 각성자들의 대표에 가장 가까운 <아스트라> 길드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기업인까지.
그런 수많은 혼란과 요청에도 불구하고, <아스트라> 길드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분위기로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그 이유는 뛰어난 통솔력이나 엄중한 기강, 개개인의 노련함 같은 게 아니었다.
단순히, 길드의 최중요 인물들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길드장인 인드라와 부길드장인 찬드라가 동시에 자리를 비웠기에, 그 어떤 서류도 접수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고향에 다녀오겠다는 휴가 신청서도, 파견을 보내야 하는 파견 승인서도, 손해배상과 관련된 서류들도.
모두 길드장인 인드라나 부길드장인 찬드라의 결재가 있어야 가능했기에 외부 업무가 마비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작 그런 혼란을 만든 인드라는 지금 해외에 나와 있었다.
공항의 패스트푸드점 의자에 앉아 콜라를 마시고 있는 인드라.
부우웅-
인드라와 찬드라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 놓인 검은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렇게 콜라를 모두 마시고 쟁반에 남아 있던 음식의 온기마저 사라졌을 무렵, 계속 울리는 진동을 참지 못한 찬드라가 입을 열었다.
우웅-
“진동이 계속 울리는데?”
테이블 위, 엎어진 휴대폰을 손으로 가리키는 찬드라.
“안 받고 뭐 하나?”
인드라는 능청스럽게 찬드라가 휴대폰의 주인인 것처럼 말했다.
“네 전화니까 안 받는 거지.”
휴대폰의 주인은 인드라였지만, 그는 휴대폰을 흘끗 쳐다본 뒤 고개를 돌렸다.
우웅-
“흠, 나한테 전화를 걸 사람이 없는데. 알다시피, 내가 친구가 없어서.”
친구가 없으니 자신에게 전화가 올 일도 없다는 주장을 하는 인드라.
찬드라는 친구가 없다는 말에 기가 막혔고, 자신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난 뭐지?”
오랜 세월 함께해 온 데다, 길드 창설 이전에도 친구 같은 사이였던 인드라와 찬드라.
“음…… 신뢰할 수 있는 동료?”
인드라는 친구가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기 싫은지, 십년지기 동료이자 그 이상의 세월을 친구로 지낸 찬드라를 단순히 동료로 선언했다.
“세상은 그걸 뭉뚱그려서 친구라고 하지. 그럼 동료로서 부탁하건대, 해결할 필요는 없으니 일단 들어라도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진정하게, 나의…… 동료여. 우리에겐 내일이…….”
인드라는 언제나 내일이 있다는 말로 회피하려 했지만, 찬드라가 그 말을 들어 온 지도 어언 10년이었다.
“내일 타령하면서 해외로 나온 게 누구였지? 그것도 어제?”
“……알겠어, 알겠다고. 나중에 이렇게 잔소리하지 않는 친구도 만들어야겠어.”
찬드라의 잔소리에 결국 굴복한 인드라는 휴대폰을 꺼내 스윽 뒤집었고, 화면에 박힌 수없이 많은 부재중 통화 글자를 목격했다.
“정말 많이도 보냈군. 하지만 역으로 길드에 있었다면 저만큼 절박하고 귀찮은 업무들을 감당해야 했을 거야.”
“그렇겠지. 그래서 우리가 여기로 온 것이기도 하고.”
찬드라와 인드라는 국내의 정세가 심상치 않아진 것을 알자 상당히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라 직감하고는 곧바로 해외로 나왔다.
길드의 전력들이 고향으로 가기 위해 이탈하는 것을 방지함과 동시에, 연줄로 부탁을 해 오는 몇몇 인간들의 귀찮은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아무튼,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일이 더 커지겠지.”
“우리 아스트라에 무단으로 도망갈 녀석들이 있지는 않겠지만, 가족이 직접 찾아와서 부탁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냉혈한만 모아 둔 것도 아니니…….”
물론 그들도 단순 업무회피용으로 해외에 나온 것은 아니었다.
인드라와 찬드라가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방콕.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경유하기 위해 들른 공항이었다.
“직항으로 갔으면 편했을 텐데.”
“경비 처리가 안 되니까 싼 걸로 가는 거지.”
둘의 목적…… 정확히는 인드라의 목적은 크게 거창하지 않았다.
“길드 간의 협약을 맺기 위한 출장이라고 하면 경비 처리가 될 텐데.”
단순한 유명 각성자 간의 연대를 위해서.
국제적으로 유명한 전격 속성의 각성자 중 한 명인 토르의 사망과, 예전에 목격한 의문의 인물에 대한 정보를 다시 접하고 사실 확인을 겸해서 가는 것이다.
이번 국제 연쇄 테러에서 굳이 땅도 넓고 타격 지점도 많은 인도를 두고 다른 곳을 공격한 점이라거나, 마찬가지로 습격을 받지 않은 일본에 대한 작은 의문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겉으로 내세울 만한 변명은 ‘아직 습격받지 않아 여유가 있는 국가의 길드끼리 서로 협약을 맺어 보기 위해서’였지만, 상식적으로 맺을 리가 없었다.
“그냥 도망칠 명분이었잖아. 곧 이륙 시간이니, 어서 일어나라고.”
“참 깐깐하고도 귀찮은 친구로다.”
인드라는 찬드라의 재촉에 불평을 내뱉었고, 그 말을 들은 찬드라는 인드라를 노려보았다.
“뭐?”
“-하지만 그 점이 내게 없는 점이니, 친구로 두어야 마땅한 인물이로다.”
인드라는 황급히 뒷부분의 말을 덧붙였고, 찬드라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번은 봐주지. 얼른 일어나. 슬슬 답신이 올 때가 됐는데……?”
* * *
그 시각, 일본 교토.
다이카는 본인의 집에서 뜻밖의 메일을 받았다.
“이게 뭐야……?”
[To. Daika - Shiraisi]
영어로 표기한 데다, 성과 이름을 반대로 둔 것으로 보아 해외에서 온 메일이 확실했다.
그녀는 곧바로 눈을 돌려 발신인을 찾아보았고, 발신인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아스트라> 길드의 공식 이메일이었다.
영어를 할 줄은 알지만 중학생 수준에서 멈췄던 그녀는 재빨리 번역기를 사용해서 내용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메일도 외국인에게 보내는 것을 고려한 건지 최대한 간결하고 핵심적인 내용만을 추렸기에, 번역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보자…… 마스터의 방문…… 인드라가? 그리고 직접적인 대면…… 길드장의 대동 없이, 개인적인 만남……?”
내용을 대략적으로 요약하면, 길드 마스터인 인드라가 직접 만나 보고 싶지만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라 개인적인 요청에 불과하니 길드장이 함께 있을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다이카는 이 메일의 내용에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도 어지간해서는 불렀겠지만…….”
평소였다면…… 적어도 한 달 전의 그녀였다면 망설임 없이 길드원들을 불러 이 메일의 내용을 보여 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료는 평소처럼 가짜가 아니겠냐며 의심했겠고, 다른 간부들도 축하한다거나 장난이 아닐까 하는 농담을 건넸을 것이다.
시즈카는 평소처럼 과묵하게 있을 것이고, 야이바는 흥미를 보이며 살펴보는 것 정도는 할 것이다.
하오다 또한, 그다지 손을 대는 주의가 아니지만 일단 길드장끼리의 대면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한마디 했을 것이고.
하지만 지금의 다이카는 상당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바로 도쿄에서 있었던 사건의 전말을 아는 극소수의 인물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하오다가 도쿄에서 살육을 자행했던 그날 밤, 다이카는 술을 거하게 먹은 다른 간부들을 보낸 뒤 하오다를 찾아갔었다.
하루나 이틀 정도의 휴가를 요청할 생각이 있기도 했고, 또 자신의 불안을 떨쳐 내기 위한 과감한 움직임이었다.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눠 보다 보면…… 그때의 광기가 순간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모종의 이유로 하오다가 그런 광인으로 변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늦은 밤에 하오다를 찾아갔지만, 평소라면 조금 기다리라거나 내일 오라는 말을 들었을 상황에 전혀 다른 말을 들었다.
-죄송하지만, 여기에 안 계십니다. 도쿄로 가셨어요.
집에 찾아가자 하오다의 집을 관리하는 가정부가 그런 말을 들려준 것이다.
평소에는 그런 역할을 대부분 시즈카나 야이바가 대신했고, 시즈카는 하오다의 옆에 꼭 붙어 있었으니 없는 것은 확실했다.
하오다는 행선지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그를 대신해 일을 처리하는 시즈카가 문단속을 위해 가정부에게 입을 연 것이다.
-내일…… 올 테니…… 오늘은…… 문을 꼭…… 닫아 두세요…….
거기까지야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경찰 내부에 아는 사람이 있던 다이카는 살육이 있었다는 것과 그 대부분의 사인이 검에 의한 자상과 출혈이었다는 것을 전해 듣고 불안이 매우 커졌다.
‘아니, 생각해 보자. 거긴 야쿠자 소굴이잖아. 칼이 사람보다 많을 거란 말이야.’
그나마 마지막 희망으로,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다이카는 자신의 길드장인 하오다를 믿어 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 줄기 지푸라기 같은, 최후의 희망이나 다름없었기에 다이카는 메일에 그녀 혼자서 직접 만나겠다는 답변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