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4화
(25)
영국 습격과 토르의 사망 이후, 그것이 방아쇠였다는 듯이 세계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인 테러 행위가 일어났다.
“이라크 바그다드, 폭탄 테러.”
“모로코 전역, 폭동 사태 발발.”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 궁으로 전차 돌진 및 화포 발사.”
“멕시코 멕시코시티, 재벌 암살 및 카르텔 보스 암살.”
“브라질 상파울루, 네이팜으로 인한 대화재.”
“호주 캔버라, 갑작스러운 얼음 폭풍.”
“모잠비크 전역, 폭탄 테러 도시당 평균 2회 발생.”
“뉴질랜드 북섬, 대형 산불과 도로 차단.”
“싱가포르, 빌딩 폭파 및 탄저균 살포.”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빌딩 폭파.”
“캐나다 몬트리올, 탄저균 및 상수도에 유독성 물질 살포.”
세계 각지의 도시와 국가 이름이 나열되었고, 그 뒤에 참사가 하나씩 언급되었다.
그 장소들에서 일어난 수많은 테러 행위 탓에 UN에서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테러에 대한 회의가 이루어졌다.
“그 모든 곳에서 테러가 일어났다는 건가?”
“맞습니다. 강자들이 다수 있는 몇몇 강국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과거를 고려해 봤을 때 테러가 일어나지 않았던 지역이 대다수입니다.”
“성명은? 일전의 테러 집단 <신세계>는 각성자들 위주의 사회를 만들려는 입장이었잖나.”
“그런 성명이 없습니다. 그저 단순히 공포 분위기 조성이 목적이라는 듯, 목표를 가리지 않고 테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회의에 참여한 이들은 테러범들이 발표한 목적이나 성명이 없다는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신세계> 놈들은 하다못해 협상이라도 받아 갔는데……!”
본래 테러라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힘없는 조직이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위협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행하는 것이었다.
테러 단체로는 흔히 테러 하면 떠올리듯 알카에다, 유일신과 성전 같은 이슬람 단체나 공산권의 바더 마인호프, 적군파, 그리고 북한 등 비교적 열강에 비해 힘이 약한 세력들이 주축이었다.
기존 국가들에 비해 힘이 약하지만 품고 있는 뜻을 어떻게든 이루기 위해 가장 과격하고 눈에 띄는 수단을 저지르는 것이 테러였고, 희생을 요구하는 만큼 목적이 있었다.
무력시위, 분쟁 해결, 또는 이득을 얻기 위한 단순한 인질극 등 목적을 가지고 하는 행위였지만 이번 사건들은 목적을 알 수 없었다.
보통 테러가 일어나고 그에 대한 성명 발표가 있어야 하지만 세계의 그 어떤 언론사에도 제보나 편지가 오지 않았고, 단순히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기에는 일이 너무 컸다.
그렇게 UN에 속하고 피해를 입은 국가의 대표들이 전전긍긍하는 동안, 상임이사국에 속했거나 피해를 입지 않은 이들은 침묵했다.
이미 당한 이들이야 복수나 제압을 외칠 마음과 명분이 있어도, 자신들이 그런 말을 외쳤다가 테러를 당할지도 몰랐으니까.
“그보다…… 강대국들은 테러를 당하지 않았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레이시아 대표가 피해를 입지 않은 나라의 대부분이 강대국인 점을 얘기했고, 몇몇 대표들이 그 말에 동참했다.
“그래, 왜 우리들만 당한 거죠?”
정작 피해 국가들 중에는 러시아나 브라질, 호주 같은 나라도 끼어 있었지만 그들은 그 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말에 반박하는 말이 곧바로 나왔다.
“영국의 ‘토르’ 사망 이후에 갑작스럽게 발생 건수가 증가했기에 발표한 것입니다만…… 그 이전으로 돌아가 보면 중국, 한국,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성명없는 테러들이 일어났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많이 발생했기에 문제가 커진 것이지, 따져 보면 이번에 피해를 입지 않은 나라들은 예전에 테러가 한번 발생했었다.
그때부터 회의가 조금씩 격해지기 시작했고, 언성이 높아지고 낮아지기를 반복하다 이내 결론이 내려졌다.
“……일단은 알 수 없으니, 각국은 치안 유지에 최선을 다하고 피해 복구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진행하지.”
그렇게 별 뾰족한 수 없이 회의는 끝나고 말았다.
그 회의의 결과는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달되었다.
“흐음, 의외로 침착하게들 대처하네. 역시 암살이 적어서 그런 걸까……?”
“그것도 있지만 미국과 중국, 한국에서 일을 벌였던 텐징이 체포되어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점 같습니다. 영국을 제외한다면 흔한 테러 방식이니까요.”
탄저균 살포나 상수도 오염, 폭발 및 암살이 흔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제법 오래된 방식인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선지자는 메리를 보내어 토르를 살해한 이후, 전 세계에 테러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그에 대한 결과가 영 시원치 않자, 선지자는 반쯤 은퇴한 부하를 다시 불러오기로 생각했다.
“으음…… 그런가. 그럼 역시 텐징을 꺼내 와야 하나?”
“녀석이 쉽게 나올 것 같진 않습니다.”
“일단 시도나 해 봐야지.”
* * *
블랙 펜타곤, 일반 수용실.
한 수감자가 테이블 앞에 앉아 체스를 두고 있었다.
탁.
“H5번, 체크.”
흰색 킹에게서 사선으로 4칸 떨어진 장소에 안착하는 검은색 비숍.
“폰을 G4번으로.”
흰색 킹으로 가는 길에 있는 폰들은 모두 자리를 비웠지만, 아직 나가지 않고 버티고 있던 폰이 2칸 앞으로 나와 비숍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비록 병사 하나의 목숨이지만, 가져가겠습니다. 체크.”
킹은 폰이 지켰지만, 폰의 주변에는 폰을 지키거나 비숍을 공격해 줄 말이 남아 있지 않았다.
흰색 폰은 검은색 비숍에게 잡혔고, 비숍은 자신을 위협하는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은 채 다시 킹을 위협할 수 있게 되었다.
“왕을 수호하기 위해 열심히 달려 나간 병정은 목숨을 잃게 되겠지만, 그동안 다른 군세가 진군할 수 있지.”
“왕이 위험한 상황인데도 말입니까?”
검은 비숍을 잡은 남자는 차례가 오는 순간 곧바로 킹을 잡으려는 듯 말을 계속 붙잡고 있었다.
“캐슬링이라고 아나?”
“사용하지 않은 룩과 킹의 위치를 맞바꾸는 것……. 잠깐, 그런 것 없이 클래식하게 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캐슬링에 대해 여유롭게 말을 꺼내던 누군가는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을 듣자 곧바로 체스 판을 때렸다.
타악!
후두두두둑.
체스 판은 뒤집힌 채 테이블 밑으로 떨어졌고, 여기저기 복잡하게 배치되어 있던 말도 바닥으로 떨어져 여기저기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먼발치에서 그를 지켜보던 교도관들과 다른 수감자들은 그 모습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드디어 미치기 시작한 거야……. 혼자 체스를 두다가 진 것처럼 판을 뒤집잖아.”
“더 무서운 건 저 옆에서 가만히 명상만 하는 놈이지……. 여기 미친놈은 많지만 괴물은 하나라고……!”
수감자들은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가 체스 판을 정리하고 말을 주워 담는 모습을 보며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어이, 잡담 나누지 마. 닥쳐.”
따다다다닥-!
교도관이 그런 수감자들을 조용히 시키기 위해 전기 충격기를 켜며 위협했지만, 수감자들은 그런 전기 충격기보다 더 무서운 게 있었다.
“무서운 걸 어떻게 합니까……! 저흰 옆방이라고요!”
“나도 무서우니까 닥쳐. 난 오늘 당직이라고…….”
교도관과 수감자, 둘 모두가 두려워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신입 수감자 둘이었다.
하지만 신입인 것과는 별개로, 저 둘은 블랙 펜타곤에 들어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이곳의 실세를 틀어쥐고 유유자적 살고 있었다.
무력의 정점으로 군림하는 권왕 텐징과, 그 옆에서 텐징의 억제 역할을 하면서 알 수 없는 커넥션과 연줄로 무언가를 자꾸 받으며 배후의 권력을 보여 준 샤오롱.
실제로 윗선에서 되도록 건들지 말고 나름의 편의를 봐주란 지시도 있었기에, 교도관들도 그들을 건드릴 수 없었다.
다행히도 2인조 또한 문제를 일으킬 마음은 별로 없는지 기상이나 취침, 식사 등의 집합에는 군말 없이 따르는 편이었다.
대식가 텐징의 식사량과,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샤오롱의 개인 메뉴인 국수 주문만 뺀다면 식사도 큰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가장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자유 시간에도 둘은 서로 붙어 있었지만 각자 할 일만 했다.
텐징은 얌전히 앉아 명상만을 했고, 샤오롱은 독서나 음악 감상, 체스 두기 등을 했다.
초기에는 수감자들과 두었지만 매번 승리를 거두어 지루함을 느낀 건지 어느 순간부터는 독서와 음악 감상만 하다가 오늘 갑자기 1인 2역으로 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감자들과 교도관은 ‘오늘만큼은 진짜 다가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들과 거리를 더욱 벌리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이곳을 몰래 찾아온 손님은 미소를 지었다.
“자네들이 상당히 공포의 대상인가 보군. 여기서 나가기만 한다면 저 몇 배의 공포를 불러일으킬 텐데.”
“저희는 테러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사고가 거하게 터지긴 했지만, 아직 뭔가 이루지는 못하신 모양입니다?”
“의외로 눈치가 빠르군. 매일 신문을 받아 본다고 했나?”
텐징과 샤오롱의 사이에 만들어진 그림자의 틈에서, 파드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뉴스도 봅니다. 소리도 안 나오고 채널과 시청 시간 조정도 불가능하긴 하지만, 수화는 알고 있으니 내용을 대충 알 수 있으니까요.”
“그만큼 정세를 아는 자네가…… 여기에 계속 있겠다고?”
“저는 이 친구와 함께 움직여야 하지만, 이 친구가 여기에 있겠다고 하니…… 그냥 있는 겁니다. 게다가, 여기가 군 시절 막사보다 시설이 좋거든요.”
샤오롱은 블랙 펜타곤에 남겠다는 의사를 비쳐 보였고, 파드레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음…… 그렇군. 자네들의 의향은 잘 알았네. 3일 뒤 서쪽 벽에서 비행기가 추락해 의문의 폭발이 일어난다면, 진동이 상당하겠지? 그렇게 된다면 체스 말도 바닥으로 떨어져 여기저기 구를 테고.”
파드레는 갑작스럽게 3일 뒤 서쪽 벽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고, 샤오롱은 그것에 담긴 의미를 알아챘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갈 마음이 없던 샤오롱은 파드레의 말에 고개를 아주 살짝 저었다.
“체스 말들은 잘 보관되어서 떨어질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미 잡힌 말은…….”
샤오롱이 거절의 뜻을 밝히고 있을 때, 가만히 눈을 감고 명상을 하던 텐징이 갑자기 눈을 떴다.
“……도시로 나간다.”
“텐징?!”
파드레는 텐징이 도시로 나간다는 말을 꺼내자 흥미로워진 듯했다.
“호오, 나가려는 마음이 있나 본데.”
“여기는 사막 한복판이야, 그나마 가장 가까운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는 곳은 방사능 물질 폐기장과 매립지라고.”
사막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탈출해도 쉽사리 도망칠 수 없게 만든 블랙 펜타곤.
“내 속도라면 금방 도시에 도착한다.”
텐징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보다…… 도시에 나가서 뭘 하려고?”
“식사.”
뜬금없는 식사라는 대답에, 샤오롱은 당황하여 그를 쳐다보았다.
“……?”
파드레 또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나오자,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허어…….”
“여기서 가장 가까운 패스트푸드 체인점으로 가서 한 끼만 먹고 오겠다.”
샤오롱은 오랜 수용소 생활에 바깥 음식이 그리워진 것 같았다.
“……내일 메뉴를 좀 바꿔 달라고 간수한테 말해 둘게.”
“아니, 난 직접 먹고 싶다.”
텐징은 샤오롱의 말에도 완강한 태도를 유지했고, 그 모습에 파드레는 추가적인 사항을 생각했다.
“……비행기에 현금을 조금 실어 두라고 해야겠군.”
“비행기까지 추락시키는 건 과하니 그냥 하늘에서 달러 뭉치나 하나 던지라고 하시죠.”
“아무튼…… 잘 알겠네. 이미 소모된 말은 폰을 승급시키지 않는 이상 돌아올 수 없지. 그럼 판 밖에서 대국을 지켜보게나.”
파드레는 샤오롱과 텐징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사라졌고, 이내 샤오롱과 텐징 사이에 져 있던 그늘이 조금 옅어졌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샤오롱은 파드레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곧바로 교도관에게 다가갔고, 교도관은 긴장한 채 그를 대면했다.
“제임스 교도관? 미안하지만 소장을 만나 봐도 될까?”
“……사유는?”
“별거 아냐. 단순한…… 사전 공지랄까.”
샤오롱은 제임스를 보며 미소 지었고, 오늘 당직을 서야 하는 제임스는 직장과 목숨을 잃느니 잔소리를 조금 듣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절차를 생략하고 그를 소장실로 안내했다.
이내 텐징의 탈주 예고를 들은 소장은 잠시 충격에 기절할 뻔했지만, 외벽을 파괴하진 않을 것이고 식사만 하고 온다는 이야기에 어이를 상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