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7화
(18)
한 도시의 경계선.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도로의 경계 부분에서 촬영한 영상이 화면에 출력되고 있다.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구름이 어느 한 기점에서 갑작스럽게 보이지 않는 벽을 만난 듯이 갈라져 도시의 상공을 맑게…….
영상에는 도시의 이름을 런던이라고 소개했고, 실제로 차량도 좌측통행으로 다니는 동시에 설명을 하는 리포터도 영국식 악센트를 넣은 영어 발음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영상이 작게 축소되면서, 방송 스튜디오와 스튜디오에 앉은 남녀 진행자의 모습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네에, 잘 봤습니다. 영국에서의 갑작스러운 이상기후 현상이었죠?”
“네. 현지 전문가인 옥스퍼드 대학의 연구진들의 발표에 따르면, 자연적인 현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니 간만에 찾아온 맑은 날을 즐기기만 하면 될 것이라고 했죠.”
“하긴, 영국에 살다 보면 저렇게 맑은 하늘을 가끔 보고 싶어질 수도 있겠네요. 다음 세계의 놀라운 소식, 보도록-”
틱.
TV의 화면이 꺼지고, 영상을 보던 이의 눈에는 차가운 빛만이 감돌았다.
“……아직도, 거짓말만 하는 건가. 다 똑같아……. 진실 따위 알려고 하지도 않지.”
휘익!
TV를 끈 누군가는 리모컨을 들어 벽에 집어 던졌고, 벽에 부딪혀 박살 날 것만 같았던 리모컨은 아무런 소리 없이 침대의 위로 안착했다.
“기물 파손은 추가 요금이에요.”
리모컨이 날아가던 경로에 위치한 한 침대 위에 한 여성이 누워 있었고, 그녀가 한쪽 손을 들어 리모컨을 받아 냈던 것이다.
“알 게 뭐야, 그딴 거. 그리고…… 이미 추가 요금은 내야겠는데.”
“앗.”
여성이 침대 위로 내려놓은 리모컨은 이미 외부가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고, 여성은 자신의 실책에 여러 가지 감정이 담긴 한마디를 내뱉었다.
“망했네.”
* * *
한국.
[네! 세계의 신비하고 다양한 뉴스, 잘 보셨나요? 그럼 여기까지 저 최유리와-]
[-도원진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영국에서의 뉴스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과격한 모습을 보여 주었던 누군가와는 달리, 한국의 영의는 마냥 신기하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신기하네.”
달그락-
영의는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종종 이용했던 백반집에 와서 밥을 먹고 있었다.
거의 언제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TV를 틀어 놓는 식당과 어지간해서는 뉴스 채널에 맞춰져 있는 식당 TV의 특성상, 타이밍 좋게 뉴스를 보게 되었던 영의.
“뭐가?”
그리고 그런 영의의 앞에서 용신이 영의가 시킨 불고기를 자연스럽게 집어 먹으며 물어 왔다.
영의는 용신이 자신의 반찬을 집어 먹는 것에 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건지, 뭔가 불만을 가져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아는 건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도시 하나에만 구름이 안 끼는 거요.”
용신은 영의의 말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 반대의 일을 할 수 있는 놈이 뭐가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음, 하긴 그런가.”
지금 그들이 굳이 이렇게 한곳에 모여 식사를 하고 있는 이유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저 영의에게는 일상과도 같은, 다른 차원으로의 배달을 앞둔 식사였을 뿐.
다만 용신이 여기에 동행한 것은 혹여나 영의의 스타일상 갑자기 생길지도 모르는 사고를 막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 이외의 목적도 조금 있었지만 영의에게는 사고 치지 않도록 감시하기 위해서 왔다고만 말해 두었다.
“그래서, 어떻게 지내지?”
“뭐가요?”
“네 제자. 전과 다를 바 없이 지내나?”
용신은 지연에 관해 물었고, 영의는 최근 지연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어떻게 건드린 건지는 몰라도, 더 존경하는 눈빛과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눈빛을 동시에 보내던데요.”
최씨 가문 특제 보양식을 먹게 한 것과, 기억이 살짝 바뀌어 영의가 직접 만든 검술을 전수받는 것에 대한 동경이 함께 섞였던 지연.
“그 말이 아니라, 이상함을 느낀다거나 하는 낌새가 없냐는 말이지. 아, 거기 상추 좀.”
영의는 용신에게 상추를 건네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요새 그런 느낌은 못 받았는데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널 어지간히도 신뢰하나 보군.”
용신은 상추를 받아 들고 그 위에 영의의 불고기를 하나둘씩 올리기 시작했다.
“예?”
“보통 기억을 아무리 깔끔하게 고쳐도 어느 정도의 위화감은 남으니까.”
“적은 분량이라 그런 것 아니었어요?”
그리고 상추에 마늘과 쌈장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추가로 넣은 뒤 둥글게 말기 시작하는 용신.
“그것도 있지만, 누가 검술을 뚝딱 만들어 냈다는 걸 바로 믿겠어?”
용신은 그 말을 하고는 곧바로 자신의 입으로 쌈을 집어넣었고, 영의는 그의 모든 행동보다 말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렇네요. 그보다, 언제까지 제 밥을 드실 건데요?”
영의는 자신의 앞에 남은 반찬이 절반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 되자 이의를 제기했고, 용신은 두어 번 씹은 입 안의 음식물을 곧바로 삼킨 뒤 대답했다.
“그냥 네가 주문한 게 더 맛있어 보였으니까.”
“치사하게……. 그럼 제육 주세요.”
영의는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용신의 앞 반찬들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텁.
하지만 용신은 영의의 손가락을 무려 젓가락으로 잡고 제지했다.
“이건 내 거지.”
“와, 치사해. 나이도 먹을 대로 먹고는 부끄럽지도 않나…….”
용신의 나이를 나름 고려해서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에게 양보라도 할 수 없냐는 식으로 따지는 영의.
하지만 상대는 나이가 많아도 너무 많아서 그런 부끄럼 따위를 느낄 인물이 아니었다.
“원래 나이 먹을수록 늘어 가는 건 뻔뻔함과 세상 편하게 사는 지식뿐이란다.”
“심술만 남은 영감쟁이…….”
“영감이라니, 날 그 정도로 젊게 봐줘서 고맙군.”
어느덧 이렇게 서로의 식사를 양보(?)할 정도로 친해진 둘이었다.
이날, 영의는 간만에 다른 차원을 다녀왔다.
잠깐 스치듯 용건만 급하게 해결하기 위해 짤막하게 다녀온 적은 있었지만, 이번엔 다소 시간을 소모할 작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라이저의 마탑.
어느덧 살이 제법 올라 빼빼 마른 마법사가 아닌, 적당히 살집 있는 노인의 모습을 한 일라이저가 영의를 반겨 주었다.
“어서 오게, 반가운 얼굴을 맞이하니 기분이 좋군.”
일라이저가 미소를 짓자, 확실히 살집이 올라서인지 얼굴에 있던 주름 몇 개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도 반갑네요. 되게 간만에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하하하, 젊은 사람들의 시간 흐름은 길게 느껴지기 마련이지. 우리처럼 골방에 틀어박혀 사는 사람들에게는 한 달도 고작 일주일 정도로밖에 안 느껴지지만.”
일라이저는 영의와 대략적인 인사를 나눈 뒤, 자신의 의자에 앉으며 용건을 물어보았다.
“그래…… 이번에는 무슨 일로 왔나? 호엔하임에게서 물품이 잘 도착한 것으로 보아 그와의 만남은 잘 진행한 것 같고. 아, 그래. 문신인가?”
일전에 영의가 찾아왔던 목적이나 그가 지금까지 보여 줬던 모습을 기반으로, 오늘은 무슨 목적이 있는지에 대해 묻는 일라이저.
“별다른 건 없고…… 아니, 솔직히 말해서 거래라든가 그런 것도 아니에요.”
“음?”
뜻밖의 대답을 하는 영의의 반응에 흥미를 느끼는 일라이저.
“자네는 늘 새로운 느낌을 줬었지. 이번엔 어떤 제안을 할 생각인가? 아니면, 새로운 음식?”
일라이저는 후자 쪽을 더욱 기대하고 있었지만, 타고난 호기심과 학자의 기질이 담긴 전자 또한 후자에 뒤지지 않았다.
“이거, 돌려 드리려고요.”
영의는 일라이저의 책상 위에 마력 주입기를 올려놓았다.
“이건……?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건가? 이래 보여도 정품인데 말이지.”
일라이저는 영의가 책상 위에 놔둔 마력 주입기를 들어 올려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흐음, 별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대충 살펴봐도 어딘가 문제가 생긴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굳이 여기로 가져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일라이저는 분해한 뒤 더욱 상세히 살펴보려고 했다.
하지만 마력 주입기를 분해하기도 전에, 영의가 그것을 돌려준 이유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아뇨, 문제는 없고 잘만 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쓸 물건이 아니라서 말이죠.”
일라이저는 영의의 말을 듣고 그 이유를 납득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긴 저런 장난감 같은 물건이 어울릴 친구는 아니었지.’
“하긴, 자네에게 그리 어울리는 물건이 아니긴 했지. 그렇다면 대신할 것으로 뭘 줘야 하려나…….”
일라이저가 영의에게 마력 주입기가 아닌 다른 물건이나 마석을 줘야 하나 고민하려던 순간, 의외의 말이 들려왔다.
“아니, 그런 것도 필요 없어요. 그냥 돌려 드리려고만 왔어요. 게다가, 쓴 물건이고…… 7일이 지났으니까 교환이나 환불은 안 되잖아요?”
영의의 완전한 반환 의사와 7일이 지났으니 교환 및 환불이 불가능하다는 작은 농담까지.
“뭐가 안 된다고?”
물론 일라이저가 구입 후 7일이 지날 시 영수증을 지참해도 교환 및 환불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이해할 리 없었지만.
“음, 별일 아니에요. 그럼 대충 볼일은 끝났으니까 가 보도록 할게요.”
영의는 용신의 말과 지연에게 시행했던 기억 조작을 보고는 다른 차원과의 연결 고리나 물증이 될 물건들을 모두 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대표적이고 눈에 띄는 것이 소형 마력 주입기.
속성 마정석의 경우에는 지구에도 드물지만 존재하는 물건이니 관계없었지만, 소형 마력 주입기는 확실히 현재의 기술로 존재할 수 없는 물건이었기에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물론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상관없다고는 했는데…… 혹시 모르니까.’
물론 지구에도 존재하는 기술이고, 소형화만 된 물건이었기에 용신은 그것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나 싶은 생각에 이것을 반환하러 온 영의.
“마치 어디론가 떠나가려는 사람 같군. 어디로 가는 건가? 아주 멀리 갈 것만 같은 분위기인데.”
일라이저는 영의에게서 뭔가를 느꼈는지, 그를 붙잡고 자신이 느낀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영의는 실제로 다른 차원에 속해 있긴 했지만 딱히 멀리 떠날 생각이 없었기에,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하지만 일라이저는 고집이 있었고, 그는 본인의 말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탑주이자 대마도사의 입장이 있는 만큼 이런 말을 하기에는 조금 그렇지만, 직감이라는 게 있네. 그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더라도 상관없이, 같은 결말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그러한 직감이.”
“저한테서요?”
대마도사씩이나 되는 만큼 이성적이지 않은 직감을 언급하기 시작하자, 영의는 뭔가 이상하다 싶은 생각에 일단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래, 아마 파란만장하고 험난하겠지만…… 그 끝이 나쁘진 않을 것만 같군.”
“나쁘지 않다니. 괜찮네요. 그보다 그런 직감을 또 언제 느끼셨대?”
일라이저의 말에서 과거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챈 영의는 호기심에 그때를 물어보았다.
“베키를 마탑에서 떠나보낼 때였지.”
마탑에서 일라이저의 촉망받는 제자에서 혼자 박차고 나가 자수성가로 성공한 마공학의 아이콘이자 선구자.
밥 안먹고 굶기를 밥 먹듯 하면서 친구도 없이 혼자 쓸쓸하고 괴팍한 삶을 살긴 했지만, 결코 나쁘지만은 않은 삶이라고 할 수 있었다.
“뭐, 그거라면…… 확실히 파란만장하긴 하겠네요.”
영의는 그 정도라면 괜찮겠다는 생각에 일라이저에게 웃어 보인 뒤, 때마침 말이 나온 베키의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