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5화
(16)
용신은 눈앞에 있는 푸른 문을 점점 더 축소시키더니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만들었다.
짝!
아까와 똑같이 손뼉을 치는 단순한 동작만으로 차원 간의 연결을 잇고 끊는 행위를 해내는 용신.
“이제, 저쪽 세계와의 연결은 끊긴 거야. 참고로 방금 닫힌 세계는 네가 다녀온 적 없는 세계지만.”
영의는 다른 차원과의 연결 통로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겠는데, 네 눈앞에 있는 존재가 관리자들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수준이란 사실만 기억하고 있어라.”
언뜻 보면 가벼운 언행과 영의를 돕는 우호적인 태도에 착각하기 쉬웠지만, 눈앞의 상대는 신이란 이름까지 붙으며 수많은 차원들을 관리하는 관리자들이 ‘부탁’을 하는 대상이었다.
“그럼, 방금 사라졌던 세계와는…… 이동할 수 없는 건가요?”
“그래. 이제 네가 아무리 수를 써도 못 가는 거야. 확실하게 분리해 놨기 때문에 우연히 겹칠 일이 생기더라도 갈 수 없게 될 테지.”
용신은 간단하게 설명하기를 원하는 건지, 허공에 손을 휘젓더니 입체 투영도 같은 것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세계를 간단하게 설명해 주자면…… 일단 정말 이해하기 쉽게, 네 지적 수준에 맞춰서 설명해 주지. 이것 봐.”
허공에 손을 두 번 휘저어 건너편이 비쳐 보이는 얇은 판 두 장을 구현해 낸 용신.
“반대편이 잘 보이지? 물론 실제 구성이 이렇게 단순하지는 않지만 대략적인 원리는 비슷하니 말귀는 알아듣겠지.”
“종이 같네요.”
“그래…… 내구성을 생각해 보면 그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용신은 두 개의 얇은 판 위에 무언가 그림을 그리더니, 이내 그것을 서로 겹쳤다.
“보여?”
두 개의 판이 겹치자, 서로 다른 지형을 그린 지도가 서로 겹친 것 같은 모양이 나왔다.
“네.”
“이제 이해가 되지?”
용신은 이 두 개의 판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 같았다.
“네?”
“좋아, 그럼 더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주지.”
이내 판과 판 사이에 하나의 빛나는 작은 구슬을 만든 뒤, 그것을 판 사이에 겹쳤다.
완전히 겹쳐지지는 않았지만, 판이 의외로 부드러운 소재인지 구슬이 있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아까처럼 겹쳐졌다.
“이 점이, 네가 말하는 게이트란 거야. 양쪽 세계의 사이에 생겨난 공유 공간.”
“아…….”
“여기를 통해서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인간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지. 정확히는 그러지 못하게 조치한 결과였지만.”
용신은 애초부터 사람이 다른 세계로 손쉽게 넘어갈 수 없다고 설명했다.
“지난번에는 게이트를 통해서 다른 세계로 넘어갔었는데요? 저 혼자만 간 게 아니라.”
영의는 화연과 함께 우형을 만났던, 멸망했던 미래의 무림 세계의 예시를 들었다.
“그건 한쪽이 거의 망한 차원이었으니까. 관리자도 손절하고 버렸으니까 갈 수 있었던 거지. 두 나라가 국경선을 맞대고 있어도 한쪽 나라가 멸망 직전이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건너갈 수 있는 법이잖아? 물론 네게는 능력이 있어서 별로 상관없겠지만.”
그때의 경우는 멸망한 세계였기에 국경선이 없는 수준이라 아무렇지 않게 건너갈 수 있었던 것이라 설명하는 용신.
“그래서 그 통로가 금방 닫힌 거지. 다른 곳에서 넘어오는 게 없도록 조치하기도 해야 하니까.”
“그럼 원래 게이트 안에 사는 괴수들은…….”
“그것들은 별 이성이 없고 오래 살아남지 못하는 걸 알아서 조치를 안 한 거지. 약하고 질기게 살아남는 생물들은 어떻게 하든 간에 살아남고, 위협적이고 지성이 높은 생물들은 막아 두니까.”
영의는 게이트와 그 안에서 나오는 괴수들에 대한 비밀을 이제야 알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고지능의 괴수가 별로 안 나왔던 거군요……?”
“뭐, 해 봐야 이쪽 세계에도 있을 법한 생물 수준이겠지. 그리고 그 공유 공간만 이렇게…….”
용신은 아까 예시로 들며 보여 줬던 판의 사이에 낀 구슬을, 손가락 끝으로 찔렀고 이내 구슬은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쭈그러들기 시작했다.
“……줄여 주거나 내부에 든 물질을 없애 주면,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사라지게 되는 거지.”
이제 게이트의 생성과 소멸에 관해서 알게 된 영의는 문득 용신이 이것을 왜 자신에게 말해 주는 건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근데, 이걸 왜 말씀해 주시는 거죠?”
“내가 잡아야 하는 놈이 이걸 건드려서 세상을 망하게 하려는 놈이거든.”
“네?”
용신은 구슬이 사라지고 거의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변한 판을 들어 올렸다.
“아까 말했지? 내구성을 생각해 보면 종이나 다름없다고.”
구슬은 이미 납작하게 판 사이에 끼어 있었지만,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아 판과 판 사이에는 아직도 은은한 빛이 남아 있었다.
“이 게이트라는 게 말이지, 상처랑 비슷한 거야. 오래 놔두면 복구에도 오래 걸리고. 물론 지금 이 세계가 제대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 적어도 위험한 건 금방 닫고 해결하니까.”
“상처랑 비슷하다는 건…… 방치하거나 더 나쁘게 악화시킬 수도 있다는 건가요?”
용신은 영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는 판에 여기저기 빛나는 점을 찍기 시작했다.
“그래, 출혈사랑 비슷하겠지. 이 게이트라는 걸 계속 열고 이쪽 세계를 무슨 치즈 갈아 버리는 판처럼 구멍이 잔뜩 뚫리게 두면 어떻게 될까? 아까 내가 망하기 직전일 때는 어떻게 된다고 했지?”
영의는 우형이 있었던 절망만이 가득해 보이던 무림을 떠올렸고, 아까 용신이 말했던 단어를 입에 담았다.
“손절…….”
빛나는 점들이 찍힌 판은 점들과 점들 사이를 가느다란 빛의 선이 잇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 선의 모양대로 조금씩 쪼개지기 시작했다.
“그래, 결국 버려지고…… 복구도 못하고. 세상이 대차게 망하는 거지.”
환하게 빛나며 쪼개지는 판은 언뜻 보기엔 아름다웠지만, 그것이 지금 눈앞에 있는 자연경관이나 주변에 있던 친숙한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자 영의는 절로 몸을 굳혔다.
“……그놈은, 대체 누구죠?”
“나도 몰라. 어떤 놈인지 몰라도 관리자 하나가 진짜 제대로 일을 꾸미고 있거든. 추적하기 힘들게 이쪽 세계의 인간이 가진 능력과 관리자들이 가진 능력을 섞어서 사용 중이라 기록도 찾기 힘들고.”
“기록? 그거만 잘 살펴보면 되지 않을까요?”
기록 같은 게 있으면 그것을 찾아보면 될 거라 생각한 영의였지만, 용신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지. 원래 관리자가 쓰는 힘은 여러 가지로 많아. 정상적인 세계의 유지와 차원 간의 접촉 과정에서 일어난 손실의 복구, 그 잔해의 처리 등. 예전에는 일일이 관리해서 모르지만 지금은 모두 능력과 힘을 공유하고 자동으로 처리되게끔 만들어서 추적하기 힘들어졌지. 무슨 영수증이나 간단한 서버 로그 찾는 수준이 아니야.”
“……?”
“쉽게 말해서, 전부 다 손댄 거라 누가 손댔는지 모른다고. 심지어 1초에 확인할 수 있는 기록보다 쌓이는 기록이 더 많다고.”
“아아…….”
용신은 이내 손안에 있던 빛나는 판을 없애 버리고, 영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죽이지 마라. 시간을 이리저리 건너뛰고 주무르는 놈은 맞는 것 같지만, 그게 마음대로 됐으면 너한테 부하가 잡히게 안 놔뒀을 거야.”
요 며칠 동안, 용신은 상대방의 움직임이 별로 없고 과거에 별다른 대응이 없었던 것을 떠올리며 대략적인 추측을 했다.
“죽이지 말라고요?”
그리고 뜬금없이 불살을 시행하라는 용신의 지시에 되묻는 영의.
“다른 조건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상황이 나쁘게 흘러가고 있어도 그냥 둔 걸 보면 조건은 사망이나 횟수 제한이 있는 성질이다. 당분간 잡는 그 어떤 놈도 죽이지는 마라.”
시간을 건드린 흔적 자체는 확실히 있었다.
여기에 오기 전 차원의 심부름꾼에게 주어지던 시간과 공간 관련 능력 중 시간 부분에 손댄 흔적을 확인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이곳의 인간에게 줘 버렸고, 이 세계의 ‘각성자’들이 가진 고유한 능력과 잘 어울린 덕분인지 사용 기록이 남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정작 시간이 건드려진 흔적 자체는 적었단 말이지…….’
“저, 저는 사람 죽인 적 없는데요.”
영의는 문득 ‘내가 한 명이라도 죽인 적 있던가?’라는 생각을 했지만, 없을 거라고 단정했다.
“그래…… 오히려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피 맛을 보기 시작하면 그것만큼 편한 길이 또 없다고 생각하게 되니까.”
용신은 경험한 티가 물씬 풍기는 소리를 한 뒤, 영의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아무튼, 뭔가 일이 생길 때까지 그냥 있어라. 바보 같은 녀석들하고 실없는 소리나 하고, 네 여자 잘 챙기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운명이니까.”
영의는 마지막 말을 하는 용신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슬픔을 읽어 냈지만, 다시 확인하려 하자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무심한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네가 다녀왔던 차원들 외에는 전부 막아 두지.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도주로는 막아야 하니까.”
용신은 영의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주차장을 벗어났고, 그는 순간 불어온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뭔가 엄청나게 중요한 걸 많이 들었는데?”
영의는 오늘 세계를 흔들 만한 비밀을 여러 개 들었지만, 그걸 입 밖에 낼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약간 아쉬움을 느꼈다.
* * *
영국. 런던.
거의 늘 비가 오거나 흐린 런던이었지만, 간혹 맑고 햇빛이 잘 드는 날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오전부터 갑작스럽게 불어오기 시작한 바람으로, 런던에 몰려들던 뇌우가 모두 북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맑아진 하늘은 내일까지…….]
한 남자가 이어폰으로 일기예보를 들으며 박물관의 안을 거닐고 있었고, 그는 주변에 장식된 광석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비가 안 오니, 한층 더 아름답군.”
평소에는 조명에 의지하여 빛나는 전시물들이었지만, 햇살이 비쳐 들어오자 더욱 찬란하고 오묘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햄스워스 경, 오늘은 어째서 우산을 들고 다니시는지요?”
“언제나 우산을 들고 다녀야 하지 않겠나? 이곳은 영국이니. 지금 맑더라도 언제 비가 올지 모르는 곳이네.”
햄스워스 경…… 토르라고 불리는 영국의 각성자는 비가 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산을 소지하고 있었다.
물론 정말 비가 오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는지 코트를 입고 있지 않았고, 캐주얼한 청바지 차림이었지만.
“후우…… 뭐, 그래도 언제나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는 준비성이라고 생각해 두겠습니다.”
“고맙네, 스태튼 경. 그보다 자네가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나는 최근에 부름을 받을 만한 일이 없었는데. 지금 여기에 온 것도 치즈버…… 아니, 런던의 거리가 그리워져서네만.”
토르는 그의 뒤에 있는 노신사, 스태튼을 쳐다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어차피 나중에 시내에 있는 햄버거 체인점에 가실 거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름을 받을 만한 일이 생겼으니, 이제 가도록 하시죠.”
“폐하께서? 나를?”
“……자세한 건 지금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일단 가도록 하시죠.”
“차림새가 영 좋지 않은데?”
자신의 청바지와 티셔츠, 운동화를 내려다보는 토르.
티셔츠는 일반적으로 판매하는 종류가 아닌지, 게임 회사의 로고가 박혀 있기까지 했다.
도무지 여왕의 앞에 갈 만한 차림이 아니라고 생각한 토르가 고개를 젓자, 스태튼은 토르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공식 석상으로 부르신 게 아닙니다.”
“……그럼 가도록 하지.”
토르 T. H. 햄스워스.
본명 티모르 호베르센은 지금까지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그의 본모습인 북방 전사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