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9화
(10)
샤오롱은 정장 차림의 사내를 따라…… 정확히는 그의 손에 이끌려 텐징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텐징…….’
지금까지 승리만을 거듭해 왔던, 힘과 싸움에 있어서는 최강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신의 친구.
한국의 각성자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싸움과 파드레와의 싸움, 두 개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부상도 없었던 친구였다.
선지자의 휘하에 있는 쟁쟁한 강자들 사이에서도 압도적인 힘을 자랑했던 그런 친구가 무력하게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일어나 봐, 여기서 죽을 생각이야?”
샤오롱이 텐징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이, 그를 데려왔던 사내는 옆에 있는 은색 헬멧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간이 좀 걸렸네? 금방 끝내라고 했는데.”
용신은 영의에게 시간이 걸렸다고 타박하며 음료수를 던져 주었다.
대화의 내용은 타박이었지만, 그 어조에는 장난기가 담겨 있었기 때문에 영의는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 뭐 어떻게 해요? 이성과 감성이 싸우는데.”
음료수를 받은 영의는 무심코 그것을 마시려다 주변에 있는 인물들과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의 시야를 의식하여 멈칫했다.
“그건 잘했어. 모습은 감춰야지. 그리고 보통 그런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엔 상급자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거야.”
섣불리 헬멧을 벗지 않은 영의를 칭찬하면서도, 자신의 명을 따르라 하는 용신.
“아저씨는 제 상급자 아니잖아요.”
“아니, 맞아. 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인 그 순간부터.”
“아~ 진짜. 그때 그냥 다른 선택을 할 걸 그랬나.”
영의는 머리를 긁기 위해 손을 슬쩍 들어 올렸으나, 그의 손에는 머리칼이 아닌 헬멧의 매끈하고 차가운 면이 만져졌다.
얼마 전, 영의와 화연이 용신을 만났던 날.
용신은 기억을 없애는 것과 기억을 보존하되 비밀을 지키는 것, 죽음으로 위장하는 세 가지 선택지를 제안했었다.
하지만 그는 영의와 화연이 선택지들을 탐탁지 않아 하자 네 번째의 다른 선택지를 제안했다.
“그러니까 어지간해서는 모른 채로 살아가지 그랬어? 무지라는 것이 때로는 축복일 수도 있어.”
“하아…….”
영의는 용신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고, 그런 영의의 모습을 본 용신은 작게 미소 지었다.
“네가 선택한 결과야. 근성과 의지로 버텨 봐.”
그 당시, 용신은 네 번째 선택지로 둘에게 의외의 선택을 제시했었다.
“이쪽 세계를 분리해 두고,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일과 기타 등등을 너희들이 해결하는 건 어때? 분리해 두면 다른 문제는 안 생길 거야.”
관리자들의 시스템에 일의 처리를 맡기는 대신, 영의와 화연에게 일을 제의한 용신.
“저희들이 해결한다고요?”
화연은 용신의 정체와 다른 것에 대해 모르고 있었지만, 일을 맡긴다고 하자 업무를 하던 때의 습관으로 대응했다.
일단 상대방의 의도와 원하는 것을 파악하고, 자신들이 해낼 수 있는 것인지 가늠해 보고 조율하고 협상하는 일.
전투가 더 주된 업무였던 화연은 정훈이나 영석처럼 다른 길드나 정부와의 협상 자리에 자주 앉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의 빈자리를 메우는 역할을 종종 했었다.
화연은 자신이 협상이라고는 업체와의 휴가 일정이나 고객의 컴플레인 대응 정도밖에 경험이 없을 영의보다는 더 낫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우선은, 어떤 일인지. 그리고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그렇게 어느 정도 노련한 협상가인 그녀가 용신과 대화를 나누려 했지만, 상대방은 산전수전을 수없이 겪어 온 극한의 노장이었다.
“괜히 뭐 재보겠다고 그러지 마라. 애초에 대화가 어떤지 파악도 못 했으면서 끼어들지 말고, 그냥 있어라.”
“그냥 있는 게 좋아……. 보통 인간 아니니까…….”
영의는 화연을 진정시키며 용신이 계속 말을 이어 가게 두었다.
“뭐, 어렵거나 이상한 일은 아니야.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너희 기억 지운 뒤에 다 무시하고 일 터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거 수습하는 게 더 쉽지만.”
“그런데 왜 그런 제안을 하시는 거죠? 거기다가 화연이까지.”
영의는 일 처리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이들이 왜 굳이 이런 제안을 하는지 궁금했다.
“너는 대외적으론 쥐뿔도 없지만 이쪽은 감투든 뭐든 쓸 만한 게 있잖아. 그리고, 이렇게 뭘 선택하게 해 줄 수 있는 건…… 보상이랄까.”
“보상이요?”
보상이라는 말에 영의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상? 내가 뭘 한 게 없는데……? 아니, 있었나?’
지금까지 배달을 하고 거기에 따른 무언가를 보상으로 얻었기에 보상이라고 하면 그 이전에 자신이 뭔가를 했던가를 떠올리게끔 되어 버린 영의.
“흠, 그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해 주지. 아무튼 이건 너희에게 기회야. 만약 너희가 일을 잘해 준다면 이쪽 세계는 잘 챙겨 두지.”
그런 영문 모를 소리에도 불구하고, 화연은 그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영의 또한,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므로 그 말에 따랐다.
그 이후로 용신이 화연을 통해 신화 길드의 길드장인 영석과의 만남을 가졌고, 영석과의 협상을 통해 협조 요청을 얻어 냈다.
그 외에 습격자인 텐징에 대한 정보, 그가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에 대한 예측 등 이런저런 말을 해 주었었다.
그 뒤 시간이 지나고, 텐징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자 영석과 화연이 계획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용신의 아래에서 열심히 견마지로를 다하게 된 영의.
영의는 옆에 쓰러진 텐징과 별로 저항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 샤오롱을 보며 용신에게 질문했다.
“아무튼, 그때 했던 약속은 확실하죠?”
“그래, 확실하게 책임지지. 게이트니 뭐니 하는 게 생겨도 이상하게 생길 일은 없을 거야. 그 부분은 내가 직접 확인하지.”
영의는 한국어로 말했지만 용신은 다른 세계의 언어로 얘기를 나눴고, 그 때문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혹시라도 그 말을 알아들을 염려는 없었다.
화연과 영의를 부려 먹는 대가 및 모종의 보상으로, 지구를 안전하게 격리시켜 준다는 약속을 했던 용신.
다른 세계와 조금씩 연결되는 게이트는 이미 사회에 자리 잡았으니 그대로 유지하지만, 미래의 무림과도 같은 불안정하고 소실된 차원과의 연결은 없게 하겠다는 다소 복잡한 요구도 받아 주었다.
한편, 영의와 용신이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
파드레가 인파 속에 숨어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일이 상당히 복잡해졌군. 하지만, 그분께서 말한 대로다.’
은색 헬멧의 사내가 나타나고 상당한 이슈로 떠오를 때, 선지자는 그를 가리켜 어떠한 세력이 있거나 치밀한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는 이야기를 꺼냈었다.
다른 간부들은 그 말을 잘 안 믿거나 의아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선지자는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지금 은색 헬멧을 넘어서서 옷까지 은색인 사내와 그 조력자인 듯한 정장 차림의 사내.
현장 요원인 텐징을 이곳에 데려온 이가 정장 차림의 사내라는 것은 확실했다.
자신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샤오롱을 데리고 곧바로 저곳으로 이동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순간 이동 능력이 있다면 지난번 텐징과 충돌했던 은색 헬멧의 사내가 현장에서 사라지거나 어딘가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유도 설명되었다.
‘정말 모종의 세력이 확실히 있긴 한가 보군……. 하긴, 우리처럼 암약하는 세력이 하나만 있으라는 법도 없으니.’
파드레는 곧바로 후퇴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다른 곳이면 몰라도, 이곳은 한 나라의 수도였고 주변에 무장한 군인들과 각성자들이 가득했으니까.
자신의 능력은 일대일이나 세력끼리 맞붙는 난전에 적합했지, 일 대 다수의 싸움에는 좋지 않았다.
그렇게 인파와 건물 사이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기며 뒤로 빠져나가는 파드레의 움직임을 좇는 눈이 있었다.
“……저쪽으로 가는군.”
“네?”
영의는 용신이 갑자기 알 수 없는 소리를 하자 당황했지만, 용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니, 신경 쓰지 마라. 이놈들은…… 대충 경찰서로 던져 놔. 다른 나라 경찰서로.”
“어디로요?”
“아무 데나라고 했잖아.”
용신은 그 말을 남기고 곧바로 인파와 군대가 몰려 있는 쪽으로 날아갔고, 영의는 자리에 남은 텐징과 샤오롱을 보며 어디로 데려가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 * *
조금 전, 한국.
텐징이 난동을 부리면서 파손된 현장과 기물들은 제법 많이 치워진 상태였다.
뛰어다니면서 파괴 행위를 반복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난동을 부린 시간이 짧은 편이기도 했다.
걸어 다니면서 그저 몸에 닿는 것만 부숴 댄 수준이었기에 거리가 많이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파편을 여기저기 던졌기에 잔해는 수없이 많이 만들어졌다.
차량 하나로 차 두 대와 건물의 일부를 부술 정도의 피해가 만들어지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피해도 신화 길드에서 온 인력 지원들과 중장비들, 트럭들로 쉽게 해결되었다.
유리 가루나 작은 시멘트 조각, 자잘한 가로수 파편은 몰라도 큼지막한 파편들은 강화계의 각성자들과 중장비로 치웠으니까.
그렇게 정리되기 시작한 현장에서, 단군 길드의 마스터 황준과 태극 길드의 마스터 정원이 영석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대처를 다 했냐고 묻는 거잖아.”
“그리고, 여기 없다는 건 또 어떻게 안 거냔 말일세!”
신화 길드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준비를 끝마치고 와서 깔끔하게 정리를 하는 모습에 당황한 둘.
각자의 정보통을 통해 텐징이 어째서인지 중국에 나타난 것까지도 알아냈기에 더더욱 놀라고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 마침 저기 일하러 온 소방수들 중에 아는 친구가 있네. 현장 정리랑 통제 좀 부탁하고 오겠습니다.”
하지만 영석은 용신에 대해서 언급할 수 없었기에 대화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황준에게는 오랜 인연 탓에 자랑하듯, 뭔가 있다는 듯이 얘기해 버렸던 데다가 거기에 정원까지 와서 물어보기 시작하자 입을 다물기로 결정한 것이다.
영석은 얼마 전 영의…… 은색 헬멧의 사내가 정장을 입은 의문의 남자와 함께 찾아온 것을 보자 처음엔 당황했었다.
물론 화연이 은색 헬멧의 사내를 찾으려고 길드의 힘을 동원한 시점에서 어느 정도 연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무려 애인일 줄은 몰랐었으니까.
정부에서 비밀리에 위험인물이니 제보하거나 즉시 포박하고 보고하라는 공문을 각 길드장에게 보냈었고, 영석 또한 그것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는 아카데미에서 텐징과 맞서 싸웠던 그의 모습과 화연의 반응으로 그가 나쁜 인물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고, 또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던 것 같았기에 이야기에 응했다.
그 덕분에 오늘 일 처리를 빠르게 할 수 있었지만, 조금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긴 것은 자신이 감당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의문을 가지고 묻는 행동은 길드장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각 길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신화 길드는 대미지 컨트롤 팀이 있나 봐…….”
“뭐? 무슨 팀?”
“손상이나 피해 입은 거 전담하는 부서. 역시 인지도가…….”
“그게 아니라, 그냥 이번에는 뒤처리 편하라고 다 챙겨 온 거 아닐까?”
“누가 그걸 일일이 생각해서 불러오냐고……. 심지어 길드 인원도 아니고 외주인데.”
애초에 단군과 태극의 길드원들은 아는 바가 별로 없었기에 묻기보다는 그저 쳐다보며 신기해하고 본인들끼리 말을 나누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화연이 직접 틀어막는 것을 본 적 있는 신화 길드원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팀장급을 비롯한 회의실에 왔었던 길드원들은 자신들을 막고 통제하던 화연을 마치 귀신이라도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정훈아.”
“왜요? 참고로 전 몰랐다고 말하고 왔습니다.”
현장 통제 겸 인터뷰를 위해 아직 현장에 남아 잔해 수거 과정을 감독하고 있는 화연과 정훈은 길드원들의 시선을 느꼈다.
“그냥 내가 설명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대체 누가 난동 부리던 범인이 증발하듯이 현장에서 사라질 거란 말을 믿을까요?”
정훈의 대답에, 화연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가? 하아……. 아!”
그러나 그렇게 한숨을 내쉬던 중, 화연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냥 현장에 사람 투입할 예정이니까 작전 끝나기 전까지는 못 나간다고 하면 됐는데!”
“근데 이제 말해 봐야 안 통하겠죠. 무슨 미래라도 보고 온 것처럼 얘기했는데.”
“아…… 정말. 이럴 줄 알았나…….”
놀랍게도, 영의가 용신의 제안을 괜히 받았다고 후회하던 것과 정확히 같은 순간에 화연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