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8화
(9)
반투명한 결계의 내부.
영의와 권왕은 서로의 일격을 주고받고, 피하고, 때로는 맞아 주는 것과 동시에 카운터를 내지르며 난투를 벌이고 있었다.
서로의 공격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어느 순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거리를 벌렸고,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었다.
“더럽게 튼튼하네…….”
“튼튼하군.”
영의는 권왕의 튼튼하고 단단한 몸을 가리켜 한 말이었다.
일전에는 전격에 그나마 반응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온 피부를 고무로 두르기라도 한 것처럼 어떤 공격에도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권왕은 예전과 달리 종종 맞아 주면서까지 싸우는 영의의 전법에 당황했지만, 그가 주먹을 몇 번 맞아도 아무렇지 않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거기다, 그가 영의의 몸을 타격할 때에는 주먹의 끝에 유독 단단한 것과 부딪치는 느낌을 받았다.
두 사람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서로를 노려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내 부족함을 느끼고 수련을 했지. 그보다 새로운 방어구를 마련한 모양이군.”
“비싼 걸로 뽑았지. 아주 튼튼하고 가볍고 좋은 걸로 말이야.”
권왕과 영의는 서로 상대의 말에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가슴팍을 가리켰다.
권왕의 가슴팍에는 붉은색 선이 번개처럼 이리저리 그어진 흉터가 남아 있었고, 영의의 가슴팍에는 찢어진 옷 사이로 은색의 무언가가 반짝였다.
“은색을 좋아하나 보군.”
“금색은 너무 싼티 나고, 동색은 별로니까.”
둘은 방금 전까지 서로 싸우던 사이가 아니라는 듯, 농담마저 주고받으며 살짝 웃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주고받던 둘은 금방 했던 그 농담과 가벼웠던 분위기가 거짓이라는 듯, 곧바로 다시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흉터는 있었지만 멀쩡하던 권왕의 주먹과 몸이 붉게 달아오르고, 영의의 옷이 찢어져 방어구가 드러나고 숨이 거칠어질 때까지도 둘의 싸움은 치열하게 이어졌다.
“후우, 후우…….”
“크으…….”
체력적으로 지친 데다 도중에 여러 대를 맞아 버린 영의.
계속 공격을 몸으로 받아 내어 결국 몸에 대미지가 쌓이기 시작한 권왕.
이제 둘 다 실수 한 번으로 완전한 패배가 결정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최후의 일격. 어때?”
그때, 영의는 뜬금없이 권왕에게 이러한 제안을 했다.
“지난번과 같이?”
“그래, 지난번이랑 똑같이.”
아카데미의 앞에서 서로 맞붙었을 때,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상황이었다.
철수를 지시받은 권왕이 철수하려 했을 때, 영의에게 가장 강한 일격을 날리라며 도발을 감행했었다.
마음에 들면 살려 주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죽인다고.
하지만 중간에 예기치 않게 영의가 권왕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격을 가했었고, 그 또한 마지막 순간에 힘을 끌어내어 영의를 타격하고는 쓰러졌었다.
지금 상황은 그때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그때의 상황과는 반대에 가까웠다.
권왕이 아니라 영의가 먼저 제안해 왔고, 권왕이 승낙했다.
그리고 여유 부리며 ‘할 테면 해보라’는 식이었던 지난번과 달리, 지금은 쌍방의 합의였다.
마치 서부극의 권총 대결과도 같은, 쌍방 합의의 공정한 싸움.
“좋아, 미학을 아는군.”
“원래 그런 미학 추구하다가 뒈지는 게 남자란 생물이니까.”
서로 간의 합의가 끝나고, 둘은 각자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파직, 파지직-
영의의 몸에서 미친 듯이 튀어 오르기 시작하는 스파크들.
그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어서일까, 구름이 몰려들며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주위에 산은…… 없군.”
권왕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반투명한 결계의 바깥으로 산이나 언덕 같은 것도 보이지 않자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의 몸은 계속해서 근육을 조이고 혈액을 빠르게 옮기기 시작했으며, 근육들이 그의 의지에 반응하여 다시 한번 힘을 짜내고 있었다.
‘이제 슬슬 느낌이 온다. 할 수 있어……!’
‘이 주먹에, 내 생의 모든 것을 담는다. 더 이상 후회나 여한은 없다.’
두 남자가 서로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며, 마음속으로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 * *
결계의 바깥.
“아~ 진짜. 저 멍청한 놈이…… 빠르게 끝내고 오라니까 뭘 저런 걸 해 주고 앉았어…….”
용신이 서로 큰 기술을 준비하고 있는 영의와 권왕을 보며 불평을 내뱉었다.
용신의 옆, 아주 작게 투명화된 공간을 통해 그 싸움을 지켜보던 샤오롱은 자신의 친우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텐징…….”
“야, 네 능력으로 친구 녀석 헛짓거리 그만두게 못하냐? 내가 완력으로 멈출 수는 있긴 한데, 그건 모양이 좀 빠져서.”
“……못합니다. 5년 전부터 텐징은 혹시 모를 적의 정신 조작에 대항하는 훈련을 해 왔고, 지금은 제가 목을 붙잡아도 멈추기 힘듭니다.”
“그게 돼?”
용신은 지금까지 나른하고 평온한 태도로 일관해 왔지만, 정신 조작에 대항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살짝 놀랐다.
“그것만을 위해, 훈련했으니까요.”
“엄청난 정신력이군. 차라리 종교에 몸을 담았으면 대성했을 텐데.”
하지만 의외라는 느낌으로 살짝 놀랐을 뿐, 제대로 놀랍지는 않았기에 용신은 둘의 싸움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어떡하냐, 저 녀석…… 모든 걸 걸고 지르는 공격이 쓸모가 없을 텐데.”
“말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죽을 텐데.”
샤오롱은 텐징이 아닌, 은색 옷차림의 사내 쪽을 지켜보며 말했다.
그가 알기로 텐징은 지금 수련과 암시장에서의 마력 증진을 통해 더욱 강해졌고, 그가 모든 힘을 발휘해 하는 공격을 본 적 있는 샤오롱은 그것을 이겨 낼 상대가 없단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텐징의…… 권왕의 전력을 다한 주먹이라면 옆에 있는 이 남자를 이기는 것을 제외하고는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샤오롱.
그는 은색 옷차림의 사내가 죽을 것이라 여겨 옆에 있는 사내에게 위험을 알리는 겸 이제 슬슬 멈추자고 제안하기 위해 말을 꺼냈다.
“글쎄? 내가 죽이지는 말라고 해서.”
하지만 양복 차림의 사내는 여전히 여유로웠고, 심지어 텐징과의 싸움에서 은색 옷차림의 사내가 이길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예……?”
“재밌는 기술을 익혀 왔더라고. 저 녀석이 미숙하긴 하지만, 흉내는 낼 수 있을 거야.”
용신은 미소를 지으면서 영의와 권왕이 싸우는 곳을 계속 구경하고 있었다.
* * *
엄청난 충돌음과 눈을 멀게 할 것만 같은 전류의 방전.
그렇게 눈에 띄는 두 가지 효과가 사라지자,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크헉, 크윽.”
거대한 덩치의 사내는 온몸에서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고, 연기의 색은 수증기의 백색이 아닌 회색이었다.
“후우, 위험했네……. 으극. 끄어억.”
한편 사내의 반대편에 선 은색 옷차림의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아오…… 갈비가 나갔나. 토할 것도 같고. 이게 뭐야, 피도 나오네.”
은색 옷차림의 남자, 영의는 자신의 옆구리와 배를 살짝살짝 건드리며 손에 묻은 붉은 액체를 보며 표정을 구겼다.
“피한다고 피했는데 이게 의미가 없네.”
“피해……?”
바닥에 쓰러진 권왕이 영의를 쳐다보며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온몸이 용광로에 들어온 것처럼 뜨거웠지만, 방금 전 일어났던 둘의 격돌에서 영의가 피했다는 말을 듣자 그 고통마저 일순 잊을 수 있었다.
영의는 권왕이 모든 것을 쏟아부어 날린 주먹에 담긴 거대한 힘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었다.
주먹에 담긴 압도적인 질량과 경도에, 세계 최고 수준의 근력이 만들어 낸 가속도.
그것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힘에 공간이 일그러지듯 순간적으로 구겨지기까지 하는 허공의 모습을 보았던 영의.
그는 그런 공격을 복부에 맞았지만, 어째서인지 그것을 피했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겉보기엔 맞았지만…….”
영의는 손을 허공에 살짝 흔들어 보였고, 그의 손가락이 스파크와 함께 일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
그저 빠른 속도를 이용한 착시 현상이나 눈을 감은 사이에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눈을 감은 적 없는 권왕은 그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총알이나 영의의 움직임도 직접 눈으로 잡아낸 적 있었으니까.
“뇌즉시아(雷卽是我). 반야심경에서 따온 이름이긴 한데…… 말 그대로지.”
뇌격공을 완성했지만 그것을 계속 연구하던 독고휘가 새롭게 개발한 기술.
영의가 혁련무강에게서 뇌신무라는 새로운 무공을 깨닫고 돌아오자 조바심이 났던 독고휘는 공격형인 뇌신무 대신 방어형 무공을 고안해 냈다.
그리고 완성한 것이 바로 뇌즉시아아즉시뢰.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따온 번개가 자신이고 자신이 곧 번개라는, 다소 오만하지만 그 이름대로의 효과를 보이는 무공이었다.
몸의 일부를 뇌기의 덩어리로 바꾸어 공기 중에 녹아들게 하는 무공으로, 그 어떤 예리한 칼이나 검강도 공기 자체를 베어 낼 순 없다는 점에 착안해 만든 기술이었다.
하지만 말이 쉽지 실제로는 복부를 아주 잠시나마 뇌기로 바꾸는 것마저도 엄청나게 어려웠다.
‘더럽게 어렵네. 대체 어떻게 이걸 전신으로 다 쓰는 거지 그 영감님은?’
독고휘는 창시자인 만큼 본인 스스로가 뇌기에 녹아들어 허공에서 나타나기도, 허공에 스며들기도 했다.
영의는 뇌기로 몸을 바꾼다는 기술의 원리부터 이해할 수 없었지만, 완전히 허공에 녹아드는 대신 몸의 일부를 잠깐이나마 뇌기로 흩었다가 다시 합치는 정도는 익힐 수 있었다.
‘세포 하나, 장기 하나까지 전부 뇌기로 바꾼다고 계산하고 해야 하지만…… 진짜 어떻게 하는 거지?’
무림인들은 운기조식을 하며 몸 안에 있는 모든 맥과 혈을 일일이 느끼고 내부를 관조하는 게 일상이지만, 영의는 아니었기에 배우기 힘든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온몸을 전부 뇌기로 만들어 허공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는 독고휘가 확실히 불세출의 천재이긴 했다.
“……말도 안 되는, 기술이군. 크흐흐.”
권왕은 바닥에 누워 사람의 몸을 전기로 바꾼다는 소리를 듣고 웃음을 터트렸다.
생의 모든 것을 걸었던, 두 번 다시 만들어 내지 못할 정도의 완벽한 주먹.
누구도 피하지 못하고 막아도 산산이 분해될 주먹을 날렸더니 상대방이 그것을 흘려 버렸으니까.
“힘만으로 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건가…….”
권왕은 자신의 주먹이 헛되이 날아갔다는 것에 후회하려 했지만, 영의가 그 말을 부정했다.
“아니, 사실 완벽하게 피했는데 그걸 뚫고 피해가 온 거지. 대체 무슨 주먹이 허공마저 찢냐고.”
영의는 옷과 그 안에 있던 방어구마저 걷어 안을 보여 주었고, 거기에는 여기저기가 찢겨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 복부가 보였다.
“확실해. 그 주먹은 세계…… 내가 봤던 세계 제일로 강한 주먹이었어.”
권왕은 그런 강한 주먹을 말도 안 되는 기술로 대미지를 경감시킨 상대방이 자신의 주먹을 칭찬하자 그에게 뭐라고 한마디 쏟아붓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고맙다.”
상대방이 말하고 있는 것에, 한 치의 거짓도 담기지 않은 순수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곧 죽겠군. 가능하면 시신을 산 쪽에…….”
솔직한 심정으로, 권왕은 죽는 것은 개의치 않았지만 시체는 자신의 고향인 초모룽마…… 에베레스트가 있는 히말라야 산맥에 묻어 줬으면 했다.
‘어머니의 시신 옆이라면 더욱 좋겠지만…….’
거기까진 너무 욕심 같았으니, 적어도 산에라도 묻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권왕.
하지만 정작 상대방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죽이진 않을 건데. 아, 따가워.”
죽이지 않겠다는 말에 상대 쪽을 쳐다보자, 주머니에서 어떻게 꺼낸 건지는 몰라도 붕대를 꺼내 은색 방어구 아래의 배에 감고 있었다.
“뭐?”
“죽이란 말은 없었거든. 아, 마침 없어지네.”
영의는 권왕을 아래에 두고 배에 붕대를 감던 도중, 결계가 사라지기 시작하자 결계 바깥에서 이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용신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