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3화
(4)
며칠간 흐렸던 하늘이 개고, 간만에 맑고 푸른 하늘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아름다운 하늘 아래에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큰 덩치를 지닌 사내가 도로 위를 여유롭게 걷고 있었다.
사내는 주변을 둘러보며 간간이 바닥에 있는 콘크리트 조각이나 차량 등을 들어다가 어디론가 던졌고, 그것들은 모두 주변 건물로 날아가 큰 피해를 발생시켰다.
“우오오!”
쾅!
누군가가 기세 좋게 소리를 지르며 돌진했지만, 이내 튕겨 나오며 반대편에 위치한 건물의 외벽을 요란하게 박살 냈다.
“종철아!”
“아무리 경력이 짧다지만 A급을 상대로…….”
많은 수의 각성자들이 사내의 주변에서 그를 포위하고 있었지만 차마 막아 세울 수는 없었다.
때마침 주변을 지나가다가 갑작스러운 사건에 달려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주변 시민들은?”
“이미 대피가 끝나 가고 있어.”
그들이 우선적으로 맡은 역할은 시민들의 대피와 피해 축소였다.
건물이야 다시 지으면 되고, 차는…… 배상해 주면 되지만 사람이 죽었을 때의 문제는 그것들보다 더 심각하기 때문이다.
“어디서 저런 괴물이…….”
“지난번에 한번 왔으니까 못 올 것도 없겠죠.”
각성자들은 산책이라도 나왔다는 듯이 여유롭고도 느긋하게 걸어오는 국제 수배자, 텐징을 쳐다보았다.
일전에 있었던 아카데미 습격 사건 때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FBI가 지정한 공공의 적 중 한 명이었다.
미국 내 연구소 습격 사건을 비롯한 여러 굵직한 사건에 모습을 드러냈었고, 가장 먼저 범죄를 저지른 것은 티베트였다.
구르카 총기 난사 사건.
구르카 용병 동료들을 포함한 현지인들을 살해하고, 폭발까지 일으키고 도주한 사건이며 그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가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물론 용의자라는 이유만으로 체포하거나 추적할 수는 없지만, 그는 강화계 능력자였다.
그것도 상당한 고위 능력자였고, 그의 입장에서는 총알 따위 별로 아프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질 이유가 없는 그가 수상하다고 여겼고, 이내 중국 정부에서 그를 국제 범죄자로 지목했다.
어째서 중국에서 그를 지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장에서 중국제 총기와 탄약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국제적 거물이 별다른 목적도, 생각도 없는 것처럼 한가롭게 도심을 거닐고 있는 모습에 각성자들은 초조해졌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넌 어떻게 생각해?”
누군가의 물음에, 질문을 받은 각성자는 눈을 크게 떴다.
“나도 모르지! 내가 어떻게 알아!”
범죄자가 소란 피우는 데 이유가 굳이 있겠냐마는, 그것을 물으면 모른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무심코 발에 차이는 돌을 차거나 아무 생각 없이 걷는 모습을 보면 그냥 산책 나온 게 아닐까요?”
한 사람이 행동에서 비롯된 결과보다는 행동과 그 과정 자체를 살펴보고 자신만의 의견을 내놓았다.
“대체 누가 산책 중에 빌딩에 돌이랑 차를 던지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쳐서 날려 버리는 건데?!”
하지만 그 의견은 묵살당했고, 주변 다른 사람들도 그건 영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편, 갑작스럽게 서울에서 소란이 발생하자 서울에 위치한 대형 길드들은 곧바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서 비서, 준비는?”
“완료됐습니다. 이번엔 ‘탄환’도 넉넉하게 챙겨 뒀고요.”
서 비서라고 불린 남자는 뒤쪽에서 시동을 걸고 대기하고 있는 5톤짜리 대형 트럭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트럭의 내부에 채워져 있는 물건이 뭔지 알고 있는 남자는 흡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좋아, 가 보자고. 예전의 복수도 하고…… 아직도 못 찾은 그 영웅도 찾을 겸.”
단군 길드의 마스터, 전황준을 선두로 화물 트럭과 함께 출발하는 단군의 원거리 전투 특화 각성자들.
“또다시 한국에 나타난 거물급 범죄자라……. 우리가 우습게 보였나 보군.”
뚜둑.
뚜두둑.
개량 한복을 차려입은 한 중년인이 의자에 걸터앉은 채 손가락의 마디를 꺾고 있었다.
“전 인원, 출발 준비 완료했습니다.”
“그래, 가도록 하지. 지난번에는 이런저런 사건 사고가 많았지만 이번엔 다를 거야.”
중년인은 의자에서 일어서며 그의 옆, 벽에 기대어 있던 활을 집어 들었다.
“모든 제자들에게 죽기 싫다면 알아서 빠지라고 전해라. 안전이 확보된 싸움이 아니니까.”
옛 올림픽 양궁 2관왕 출신의 박정원이 이끄는, 활의 명수만이 가득한 태극 길드.
둘은 신화 길드를 포함해 서울에 그 본부가 위치한 한국의 10대 길드였다.
하지만 신화 길드는 어째서인지 텐징의 등장에 대처하거나 나갈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신화 길드 본부 내 회의실.
“부길드장님…… 진짜 괜찮을까요?”
길드원의 걱정스러운 질문에도, 화연은 태연하게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그, 지금 나오고 있는 뉴스랑 상황이요…….”
길드원들은 모두 초조한 표정으로 각자의 휴대폰이나 회의실 내의 프로젝터로 현재 중계되고 있는 상황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름의 무장을 갖추고 있었고, 그것은 화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새롭게 맞춘 유려하고도 아름다운…… 이전에 쓰던 주문 제작품보다 아름다운 검.
그런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그 실용성과 본 용도에 충실한 성능은 전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검.
그런 검을 차고 기존에 입던 방어구를 몸에 두르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그저 휴대폰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저희는 지금 현장의 상공에 나와 있습니다. 현장은 어느 하나 멀쩡한 것 없이 모조리 파괴되어 있는데요. 하지만 각성자들은 국제적인 범죄자를 앞에 두고도 지금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도심을 활보하며 파괴를 일삼는 텐징과 그 주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주춤거리는 각성자들이 텐징의 움직임에 맞춰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중계하기 위해 상공에서 헬기를 타고 지켜보고 있기만 한 일반인인 리포터.
그런 리포터와 달리 지상에서 대치 중인 각성자들은 파괴의 화신인 텐징을 눈앞에 두고 도망치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용감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대쟝림…… 우리도 뭔가 해야 하지 않아? We have a super power. 이 힘으로 뭐라도 해야지.”
지금은 공식적인 팀장이 아니지만 나름의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앨런이 힘을 가지고 있으니 뭐라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요, 맞서 싸우지 않더라도 다른 일이라도…….”
주변의 다른 인원들도, 그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이거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최소한 지원 정도는 갈 수 있는 거잖아요.”
정 전투가 안 되더라도 다른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말하는 길드원들이었지만, 화연은 그저 휴대폰만 쳐다볼 뿐이었다.
화연이 아니라 길드장, 영석이라면 지금 당장 출발하라고 말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니, 본인이 누구보다 앞서서 뛰어갔을 것이다.
전투는 못하더라도, 아직 그 힘과 정신이 녹슬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화연은 아무 말도 없이 계속 휴대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마침내 누군가가 정적을 깼다.
“Ok, 알았어. 나 갈게. 아주 그냥 나갈 거야. 길드도, 이렇게 헛짓거리 하는 것도.”
앨런은 길드를 나가겠다는 의사까지 내비치며 곧바로 바깥으로 나가려 했지만, 그때 회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나가겠다니?”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정훈이었고, 앨런은 그나마 말이 통할 것 같은 상대를 만나서인지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Listen, 지부장님. 대쟝림…… 아니, 화연 just said…… 안 간다고 했어. 이게 말이나 되냐고. 우리는 각성자잖아! A hero! 근데 이렇게 있으라고?”
앨런은 흥분한 것인지 영어를 자주 내뱉었고, 정훈은 그런 앨런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지부장…… 정, 정은 알잖아. 우리가 저걸 못 이기는 건 알아도, 다른 건 할 수 있잖아!”
앨런의 말에, 다른 길드원들도 정훈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다들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어도, 앨런과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길드원들.
[속보입니다, 지금 현장에 태극 길드의 인원들이…….]
그리고 때마침 다른 길드의 각성자들도 현장에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자 그들의 마음속 충동은 더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우리도 저기에 가고 싶다!
단순히 자신들을 매스컴에 노출하고 싶다는 사심이나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영웅심, 수십 명이나 수백 명이 달려들면 제아무리 흉악범이라도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등.
여러 가지 감정들이 하나로 섞여 한가지의 충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느덧 큰 문제에 엮이기 싫은 이들마저도 그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기 시작할 무렵, 가만히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화연이 입을 열었다.
“안 돼.”
책상에 앉아서, 여전히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지막이 내뱉은 안 된다는 한마디.
길드원들은 어차피 그녀가 그런 말을 내뱉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대체 왜, 어째서 늘 모범이 되어 왔던 화연이 그런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른다.
어렴풋이 그녀의 의도를 이해해 보려 해도 해 봐야 길드원들이 다치는 것이나 손해를 우려해서 그런 것일까? 하는 추측일 뿐.
그렇기에 그들은 정훈을 쳐다보았다.
평소에는 다소 허술해도 게이트에만 들어가면 언제나 이성적인 판단을 적절하게 잘해 줬던 리더이자 서울 지부의 지부장.
‘지부장이라면…….’
‘정이라면…….’
‘생각을 나름 잘하는 편이니까.’
-어느 정도의 활동은 허락해 주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그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정훈은 문 앞을 가로막고 섰다.
“들었지? 안 된다고 하네.”
정훈과 화연, 둘 모두의 불허에 길드원들의 불만은 점점 더 커져 갔다.
“Why?! 왜? 봤잖아! 나쁜 놈이잖아! Villain! 한국에 두 번째야! 잡아야지!”
앨런의 필사적인 호소.
대화 내용만으로 판단하자면 단순히 악당이 나타났으니 잡으러 가야 한다는 식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절실함과 화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는 그의 눈에서는 그것 이상의 복잡한 감정들과 사명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저걸 잡는 건 우리 일이 아니야.”
“……그렇다더라고. 우리가 할 일은 저런 게 아니야.”
화연의 말과, 정훈의 맞장구.
둘의 말에 길드원들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앨런에 이은 또 다른 발언자가 나타났다.
“……이런 게 길드의 부길드장과 지부장이라니. 겨우 그런 손해나 부상자가 두려워서 안 가는 겁니까? 이럴 거면 저도 그만두고 앨런이랑 같이 나가겠습니다.”
지원 2팀장의 발언에 그 주위에 있던 길드원들이 속속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도, 나가겠습니다.”
“저도요.”
그렇게 회의실 내부에 앉아 있던 대부분의 길드원들이 일어서려던 무렵, 누군가가 바깥에서 문을 두드렸다.
똑똑.
이내 문을 슬며시 열고 들어온 것은 길드장인 영석이었다.
“……왜 다들 일어서 있지?”
길드원들이 왜 일어서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영석.
“그럴 만한 일이 있어서요. 그만둔다던데요.”
“그만둬? 그러면 안 되는데? 지금 가야 한다고.”
“가요? 어디를? 현장?”
앨런이 영석의 말에 희망과 의혹을 반씩 섞은 질문을 했다.
하지만 영석은 앨런의 말을 무시하고 화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연락이 왔어.”
연락이 왔단 말에 자신의 휴대폰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화연.
“저한테는 안 왔는데……?”
그때, 화연의 휴대폰에 진동이 한번 울렸다.
지잉.
휴대폰에 떠오른 메시지의 내용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화연.
“……네, 이제 가죠.”
화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영석은 길드원들에게 손짓을 했다.
“뭣들 하고 있어? 빨리 준비해. 현장으로 가야지.”
“전투준비는 다 됐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며 어깨를 돌리는 등, 준비가 됐다는 모습을 보여 주는 지원 2팀장.
“전투? 아니, 우리가 할 일은 뒷정리랑 현장 수습이야.”
하지만 길드원들의 기대와 달리 영석은 뜻밖의 말을 내뱉었고, 지원 2팀장은 영석의 그 말에 당황했다.
“네?”
“가 보면 알아. 차랑 장비는 다 준비해 놨으니까 몸만 와.”
전직 소방관 출신인 영석이 개인적 인맥과 공적 연락망을 모두 돌려 부른 중장비 및 대형 트럭들을 동원한, 지원 및 수습 목적만을 띤 신화 길드의 출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