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9화 (5)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쇳가루에서 나는 쇳내와, 피 특유의 비리고 본능을 자극하는 향기를 맡아서 정신이 조금 깨어나기 시작하자 다른 감각들도 돌아오기 시작한다.
“……없다고요.”
“……말고! 제발!”
“……말 걸 그랬습니다.”
멀리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대화 소리.
피를 잃었기에 몸이 수분을 갈망하는지, 조금씩 타들어 가는 입 안과 메말라 가기 시작한 혀의 끝에서는 쓰디쓴 약의 맛이 느껴졌다.
이윽고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침실?”
분명히 당가가 숙소로 사용하는 한 장원의 침실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세진이 머무는 방의 침실이었다.
천장의 한구석에 있는 얼룩이 그대로인 것으로 보아 자신의 방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정신을 조금씩 차려 가기 시작하자, 자신의 오른손에서 작은 통증이 느껴졌다.
“아.”
그리고 오른손의 통증을 자각하자, 자신이 깨어나기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가 생생히 떠오르는 세진.
남만의 소민과 싸우다 암기를 그대로 잡아 들고 찌르는 무식한 수를 두었던 세진.
상대는 세진의 도박수와 광기에 그대로 기권했지만, 그렇다고 세진의 부상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상당히 깊게 찔려 혈관까지 들어간 침들로 인해 출혈이 상당했다.
그녀의 오빠인 세준이 무대 위로 달려와서 그녀를 냅다 업고 달려 나갔으며, 달려가던 도중 수혈을 짚여 잠들고 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출혈의 양이 제법 심해 큰 부상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오른손에는 붕대만 살짝 감겨 있을 뿐 심각한 출혈의 흔적은 없었다.
그것을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를 떠올리는 세진.
“오빠, 실망하겠네.”
그녀는 오빠인 세준과 나눴던, 스스로 다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던 약조를 어겼기에 오빠가 실망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던 그때, 그녀는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더 커졌음을 느꼈다.
“좋네! 그렇다면 당사자의 말을 들어 보도록 하게!”
예나 지금이나, 늘 본인보다 동생인 세진을 챙겨 주었던 오빠 세준.
세준의 과한 애정이 때로 부담되어 일부러 쌀쌀맞게 굴거나 모질게 대한 적도 있지만, 세준을 싫어해서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런 세준이 흥분한 듯이 누군가에게 외치고 있었고, 그 말을 듣는 이는 세준과 달리 그다지 흥분하지 않아 보였다.
“당사자가 얘기해도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만.”
비무대회 예선에서 무당의 도사를 걸레처럼 쓰고 짐짝처럼 내다 버린 것에 대한 사과를 하기 위해 무당의 나이 든 도사님에게 갔을 때 만난 사람.
섬전뢰라는 별호를 얻고 이름 또한 최영의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그저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젓거나 웃는 얼굴로 사양하던 독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서 냉큼 먹던 인물.
그가 선보이는 단순하지만 기술의 정수가 녹아 있는 무공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재미…… 흥미로운 것은 다른 이들을 대하는 가치관.
마교의 인물도, 정파나 사파에 심지어 새외의 인물도 그 출신 성분을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 옆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
“귀인, 저 그냥 가면 안 됩니까? 애초에 당사자도 지금 자고 있을 텐데.”
소마의라는 별호를 가진 마교의 삼공자, 혁련운.
살활공이라는 무공과 오행환류공이라는 특이한 무공을 보여 준 흥미로운 인물이었지만…… 세진의 기준에서 그다지 인상에 남는 기억은 없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친숙한 이들의 목소리에, 세진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아, 윽.”
출혈의 양이 심각할 정도로 많진 않더라도 빈혈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는지, 잠시 비틀거렸지만 이내 균형을 잡고 선 세진.
그때 문득 그녀는 자신이 피가 잔뜩 묻은 옷이 아니라 깨끗한 새 옷을 입고 있음을 눈치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피투성이인 옷을 입힌 채로 놔둘 리가 없었으니, 그러려니 하고는 문으로 다가간 세진.
벌컥.
그녀는 방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고, 때마침 문 앞에서 대화를 나누던 셋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 특별히 당가에……. 아! 세진아! 깨어났구나! 이 오라비는 네가 걱정되어 마음속이 새카맣다 못해 아주 다 타고 남은 재처럼 하얗게 타들어 가는 줄로만 알았다!”
평소처럼 과하게 반응하며 이젠 눈물까지 흘리는 오빠.
“깨어났네. 뭐, 이제 깨어난 모습을 봤으니까 된 거겠지.”
자신이 깨어난 모습을 보자 안심했다는 듯 미소 짓는 재미있는 사람…… 아니, 영의.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진짜로 가면 안 됩니까? 이 정도면 누이도 걱정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냥 갈 마음만 가득해 보이는 혁련운까지.
세진은 이 셋이 자신의 출혈을 치료하는 데 도움을 줬거나…… 적어도 걱정을 해 줬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오빠, 저리 가.”
퍽.
세진은 왼손으로 세준의 옆구리에 주먹을 날렸고, 세준은 옆구리를 부여잡으면서도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크흑! 손이 맵구나. 아주 건강한 게 틀림없어! 세진이를 이렇게 건강하게 제대로 치료해 준 것에 대해 내 감사의 표시를……! 크헉, 숨이…….”
감동의 눈물이…… 맞을 것이다. 아마도.
“오빠, 평소처럼 했을 거야. 두 사람, 나 도와줬어?”
“뭐, 도와준 건 딱히 없는데 얘가 할 걸 다 하긴 했지.”
“아닙니다, 귀인께서 없었다면 시도하지 못했을 방법이었습니다.”
혁련운과 영의는 서로 힘을 합쳐 세진의 출혈을 막았다.
손에 가득한 자상의 구멍을 일일이 찾아 뇌기로 지지는 것은 영의가 맡아서 했다.
하지만 그 시술 이전에 그 뇌기의 적절한 세기를 조절하는 것은 혁련운이 전담했다.
“이것 봐, 팔에 화상 자국 남은 거.”
영의가 혁련운의 소매를 걷어 팔뚝에 남은 작은 점과도 같은 화상자국을 보여 주었고, 혁련운은 상처를 보이는 것이 부끄러운지 영의의 손에서 소매를 빼고 화상 자국을 다시 가렸다.
“천천히 없애면 되는 일입니다.”
대략 한 시간 전.
세진의 손을 치료하기로 한 혁련운과 영의는 뇌기를 이용해 현대에서 전기소작이라 불리는 방식으로 그녀의 출혈을 막았다.
현대 의학에서 전기소작법은 출혈이 생겼을 경우 그 부분을 전기로 지져 상처 부위의 출혈을 막는 용도로 사용되는 방법이다.
“뇌기로 화상을 입혀 틀어막는 일입니다. 보장은 없지요.”
물론 영의야 그런 의학적 지식이 없었고, 혁련운도 상처를 불로 지지려는 생각에서 한 발상이었다.
그렇게 혹시 모르니 혁련운의 몸에 실험을 해 본 둘.
영의는 뇌기에 대한 면역을 지닌 몸이었고, 세준에게 하려고 해도 시술에 참여하는 이가 아니었기에 적절한 수위를 알 수 없었으니 혁련운이 도맡게 된 것이었다.
“이 정도?”
“충분합니다.”
다소 강하거나 약했던 뇌기를 여러 번 맞고 난 이후, 혁련운은 적절한 세기를 찾아냈고 영의는 곧바로 상처를 지졌다.
불안한 면모가 있긴 했지만 전기소작법의 효과는 확실했고, 둘의 조치 덕분에 세진의 손에서는 출혈이 멎기 시작했다.
“일단 피는 다 멎은 것 같네.”
“그럼, 이제부터는 제가 나서야겠군요. 오행환류공…… 그 본연의 목적에 걸맞게 활용하는 첫 상황이 당가의 여식을 치료하는 일이라니.”
그렇게 일단 바깥으로 새어 나오는 피에 대해서 조치가 끝나자, 그 이후부터는 혁련운이 맡아서 집도하기 시작했다.
세진의 손에 흘러나온 피를 모두 깨끗이 닦아 낸 이후, 그녀의 두 손을 잡고 정신을 집중하여 그녀의 손안에 있는 기운을 조절했다.
“화상으로 인해 몸에서 올라오기 시작하는 화기를 안정시킨 다음 반전시켜 수기로 바꿀 것입니다. 그런 다음 체내에 잔류해 있는 토기와 수기를 결합시켜 목기로 이루어 낸 이후, 그 목기로 상처 부위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것입니다.”
-화상으로 인한 화기를 반전시켜 수기로 바꾼 후, 몸의 근간을 이루는 토기와 결합시켜 생명력을 담당하는 목기를 만든다.
“……뭐라고?”
“괜찮소, 나도 이해 못 했소.”
영의는 이 설명을 들었을 때 무슨 소리인지 몰랐으나, 추가적인 설명을 듣고서야 대략적인 뜻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땅에서 난 토기가 담긴 음식을 먹고, 이후에 배출하는 과정이 있지만 몸에 그 토기가 상당 부분 잔류하게 됩니다. 이후 그것이 체내의 수기와 만나 목기를 생성하고, 목기가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게 하는 것이지요.”
-먹은 것에 있는 영양소를 가공하는 모종의 과정을 거쳐 그 에너지를 상처의 치유에 사용한다.
대충 그런 뜻이었다.
물론 그런 만큼 영양분의 보충을 해야 했기에 혁련운은 토기가 많은 식품, 땅속에서 자라는 채소류와 피를 보충하기 위한 보혈 약재 등을 먹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토기가 많은 식물류와 곡류, 그리고 보혈 효과가 좋은 약재인 당귀 등을 먹이시는 게 좋습니다.”
“거기에 기력 보충용으로 고기, 뼈에 좋은 사골, 선지까지 먹이는 게 좋아.”
그리고 그때 영의의 의견까지 더해 고기와 사골, 선지 같은 식품들 또한 추가적인 조언에 들어갔다.
“고기와 사골은 이해가 갑니다만…… 선지는 어째서?”
부상당한 이에게 기력 보충을 위한 고기 및 사골이야 그럴듯했지만 어째서 피를 먹이라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는 혁련운.
“피에 담긴 영양분을 먹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뭐겠어? 피를 먹는 거지.”
철분 보충을 위한 일종의 방법이었지만, 철을 먹는다는 말을 그대로 할 수 없었으므로 약간의 변명을 했다.
“다소 옛 방식이고…… 남만에서 쓰는 민간요법이긴 하지만, 효과는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세진의 치료를 마쳤고, 시녀를 시켜 방에 옮긴 다음 옷과 몸을 깨끗이 하고 눕힌 것이었다.
그러나 세진을 치료해 줘서 고맙다고 사례를 하겠다는 세준의 마수(?)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당가의 보물까지는 몰라도 금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사례를 하겠다, 당가의 호의를 최대한 받을 수 있게끔 조치를 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던 세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사천의 부를 거의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당가에게서 받을 것이 많았다.
금전이라고 하면 정말 집 하나를 은으로 채울 수 있을 만큼 받을 수 있었을 테고, 호의라고 하면 당가의 명예 일원 수준으로 받을 수도 있었다.
가주나 원로들의 권한에 비하면 다소 부족했지만, 소가주인 세준으로서는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의 한계만큼의 보답이었다.
그러나 둘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이라는 게 문제였다.
돈이라면 썩어 넘치는 마교의 삼공자이자, 소속이 마교인지라 당가의 호의를 받아 봤자 별 의미 없는 혁련운.
중원의 돈이 혁련운 이상으로 의미 없는 인물이자, 당가보다 더 엄청난 인물들의 호의를 받고 있는 영의.
말 그대로, 받아 봐야 별 의미 없는 보답이었기에 둘은 계속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상대는 은원만큼은 중원제일이라는 당가, 그것도 소가주인 세준이었고 심지어 그가 죽고 못 사는 대상인 동생을 살려 준 이들이었다.
그렇게 둘은 결국 반 시진 동안이나 그에게 붙잡혀 있었다.
영의야 나름대로 좋은 뜻이란 걸 알고, 똑같이 동생이 있는 입장에서 아주 약간의 이해의 여지가 있었지만 혁련운은 아니었다.
‘분위기와 귀인을 봐서라도 참으려 했지만,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저는 이만 가 보면-”
그렇게 그의 인내심이 바닥나 그만 가고 싶다는 의지 표명을 하던 순간, 때마침 세진과 마주한 것이었다.
혁련운과 영의, 그리고 방금 전 보였던 상처 부분을 번갈아 쳐다보던 세진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가. 나도 같이 갈게.”
“……옳거니, 그럼 되겠구나! 역시 내 동생이다!”
손님이자 은인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는 동시에, 그녀가 원하는 사항을 함께 충족하는 명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