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6화 (2)
시간이 흘러 분진으로 만들어진 연막이 가라앉자, 무대 위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손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채로 서 있는 당세진.
그리고 아래에서, 바닥에 무릎 꿇은 채 상처에서 피가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있는 소민.
누가 봐도 세진보다 소민이 더욱 유리해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소민은 싸우려는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내 주위의 광경이 눈에 들어오자 소민은 심판에게 다가가 작게 중얼거렸다.
“……기권, 하겠습니다.”
“뭐?”
이내 공허한 눈빛으로 무대의 아래로 내려가기까지 하는 소민.
심판은 아예 스스로 장외로까지 나아가는 그녀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 뒤 목청 높여 소리 질렀다.
“소민, 기권! 따라서 승자! 당가, 당세진!”
자신의 승리가 확정 지어지자, 세진은 두 손을 하늘 높이 올리며 미소 지었다.
“이겼어! 아, 피가…….”
매번 조용조용하게 말하던 평소와 달리, 이번에는 이긴 게 기쁜지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다.
그러나 목소리뿐만 아니라 혈압까지 높아진 건지, 손에 난 상처에서 피가 갑자기 줄줄…… 아니, 철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어?!”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하는 심판.
“저…… 저거!”
갑자기 스스로 피 칠갑을 하는 세진을 보며 놀라는 관객들.
“세에에에에에에지이이이이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세진의 출혈에 곧바로 객석을 박차고 달려오는 세준까지.
하지만 정작 피가 터져 나오는 당사자는 상처 부위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아.”
“우아아아아악! 세진아! 죽으면 안 된다! 이 오라비의 눈앞에서 네가 죽게 둘 순 없다!”
출혈량이 상당하기는 했지만, 팔이 잘리거나 한 수준으로 뿜어져 나오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두 손을 높이 들었던 탓에 머리부터 온몸에 피가 묻은 그녀의 모습은 확실히 중상자의 모습과도 같았다.
“으아아아! 의원! 누구 의원 없소!!”
세준은 품속에서 당가의 고급 금창약을 꺼내어 아직 피가 멎지도 않은 부위에 덕지덕지 바르면서, 의원을 애타게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상황을 무대 아래에서 구경하고 있는 영의.
“……누가 보면 죽어 가는 사람 살리려는 줄 알겠어.”
부스럭-
그는 이미 과자까지 꺼내서 까먹고 있었다.
부스럭-
“그 정도로 비교하면 조금 모자랍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리려고 한다는 게 더 적절해 보입니다, 귀인.”
그리고 그 옆에서 태연하게 과자를 까먹으며 구경하는 혁련운.
“그보다, 너도 의술에는 소질이 좀 있지 않았어? 안 가 봐도 돼?”
영의는 혁련운이 마의의 제자이니만큼 의술에 통달했을 거라 생각하고 꺼낸 말이었고, 실제로도 혁련운은 여느 이름 있는 의원들 못지않게 의술이 뛰어났다.
하지만 그는 무대 아래의 객석에서 영의와 함께 무대 위의 상황을 관망하기만 했다.
“저거에 무슨 의술이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둬도 낫습니다.”
그의 소견으로는 자상이 제법 있기는 하나 방금 바른 금창약이면 충분하고도 넘쳤다.
애초에 지금 세진 또한 자신의 출혈을 억제하기 위해 점혈을 하고 있었고.
혼자만 세상 심각한 상황에 빠져 있는 세준은 이내 무대 위에 무릎 꿇고 주저앉았다.
“우오오오오! 세진아! 여기엔 의원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직접 데려다주마! 업히거라!”
의원을 애타게 찾았음에도 아무도 오지 않자, 직접 의원에게로 가려 하는 세준.
사실 이미 비무 중 긴급 상황에 대비한 의원이 있기는 했지만 그 또한 혁련운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물론 붕대로 감는다든가 하는 후속 조치 정도야 필요해 보였겠지만, 그거야 피가 좀 멎고 해도 되는 것이니.
그리고, 지금 무대 위로 ‘나 의원이오~’ 하면서 올라갔다가는 엄청난 부담감에 공기만 들이마셔도 체할 것이 틀림없었다.
무대 아래에 있던 혁련운과 영의는 바닥에 앉은 세준과 그 뒤에 선 세진을 보며 다음 장면을 예상했다.
“발로 차겠지?”
“의외로, 그냥 무시하고 내려올 수도 있습니다. 일단 무조건 귀인한테 오겠죠?”
“그건 나도 동의해.”
평소 세진의 모습을 고려해 본다면, 어떤 방법이건 간에 세준을 무시하고 영의에게 올 것이라 생각하는 둘.
그리고 세진과 세준의 모습을 보았거나 이야기를 들은 이들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알겠어, 오빠.”
그러나 예상외로, 세진은 순순히 세준의 등에 업혔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당가의 의원이 있는 곳으로 가자꾸나!”
세준은 세진을 업자마자 곧바로 빠르게 달려가 대회장을 나갔고, 평소 그의 저런 모습에 한숨을 쉬거나 귀찮다는 표정을 짓던 그의 호위들도 굳은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의왼데? 평소처럼 할 줄 알았더니.”
“저도 그건 의외입니다만, 그보다 의문인 게 점혈을 했어도 출혈이 쉽게 멈추지 않았습니다. 점혈을 제대로 못 한 것일까요?”
혁련운은 점혈의 위치만큼은 세진이 정확한 부분을 짚었지만 지혈이 제대로 되지 않은 점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당가 정도라면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해박할 텐데……. 자기 자신의 몸에는 점혈을 잘하지 못하는 유형인가?’
점혈의 미숙, 성향 문제, 또는 과도한 흥분으로 인한 일시적인 출혈 등 여러 가지 요인을 고민하는 혁련운.
영의는 저 멀리로 사라지는 남매를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글쎄…… 여러 가지로 사정이 있겠지.”
한편, 세준은 세진을 업고 당가의 식솔들이 머무는 숙소에 도착했다.
“의약당주! 약당주 계시오!”
아무리 가주의 아들이라고 해도, 당가는 가족이 아니면 잘 받아들이지 않는 폐쇄성 때문에 식솔 중 누구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물론, 호위 무사들은 방계나 제자인 경우가 있어 지위가 낮은 게 맞았지만 당주라는 직함이 있다면 당가에서 낮은 사람은 아닌 것이다.
“무슨 일이냐? 또 무슨 일이 있어서 이 난리를 치는 거야?”
이내 숙소 안에서 피곤한 얼굴로 걸어 나오는 한 중년인.
“세진이가, 세진이가……!”
세준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겠는지, 세진의 이름만 연달아 말하고 있었고 중년인은 오히려 그런 상황이 익숙한지 알겠다는 듯 손을 휙휙 휘저었다.
“네놈이 목소리 높일 때가 동생 말고 또 있더냐? 지난번처럼 살짝 긁힌 거로 온 거면 내가 가주한테 말할 거다.”
다 큰 남자가 울고불고 매달리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던 건지 평온한 태도를 보이는 중년인.
“에휴, 뭐 보기나 해 주마. 등에 업혀…… 있…….”
그는 귀찮다는 티를 팍팍 내며 세준에게 다가왔고, 세준의 등에서 피 칠갑이 된 세진을 발견했다.
“약당주…… 아니, 백부님…… 세진이를…….”
세준은 이제 아예 울먹거리기 시작했고, 백부라 불린 중년인도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았는지 곧바로 품속에 손을 넣었다.
“금창약은?”
그는 세준이 제대로 된 대답을 못 할 거란 걸 짐작한 듯, 뒤를 따라온 호위 무사들에게 정보를 얻기 시작했다.
“가, 갖고 있는 걸 다 발랐습니다!”
“하긴 그랬겠지. 점혈은…… 했군. 수혈까지 짚어 뒀구나. 안쪽에 눕히고 지혈부터 해라.”
손에서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 수준이었지만 그런 모습에도 점혈을 했다고 판단하는 중년인.
“약당주…… 아니, 송현 백부님. 세진이는 살 수 있는 겁니까……?”
세준은 잠든 세진을 방 안에 눕힌 뒤 그녀의 손목을 잡고 혈관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피가 나오는 기세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이 보이자, 의약당주 당송현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른다. 그래도, 손이라서 다행이구나. 여차하면 묶어서 지혈하면 되니.”
송현은 확실히 치료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지혈 자체에 대해서는 나름 희망적인 관측을 가지고 있었다.
압박대를 사용한 거의 반강제적인 지혈을 고려하는 송현.
“그, 그렇게 되면 무공은…….”
세준 또한 어느 정도의 지식은 있었기에, 압박대를 사용하는 경우에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 지혈 부분의 괴사 내지는 손상.
생명력의 원천과도 같은 피가 통하지 않게 조치하는 것이니, 피를 받지 못한 그 부분이 죽어 가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못 쓰겠지. 하지만 목숨은 건질 수 있겠지. 어쩌면 무공을 쓸 수 없으니 다칠 일 없는 인생을 살 수도 있을 테고.”
* * *
사실 세준에게는 세진 이외의 동생들이 있었다.
아니, 그 이외에도 많은 형제들이 있었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었고, 그때만 해도 세준은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철없기만 한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가문을 이을 필요도 없었고, 소가주가 되려면 적어도 세 명의 형이 모종의 이유로 가주직을 포기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어느 날, 사천에 돌림병이 퍼지게 되었다.
어른들이야 별다른 피해가 없었지만, 약한 아이들이나 노인들은 그 병에 걸리기 쉬웠고 또 증상도 심했다.
-당가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사천에서 약과 독을 가장 잘 다루는 당가 또한, 그 병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던 과정에서 내부 인원들이 병에 걸리고 말았다.
-가주님, 도련님이 병에…….
-의약당의 인원이 병에…….
그 당시 세준은 외조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장례식을 위해 다른 지역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무가의 여식이 아니라 조정 대신의 집안이었기에, 반쯤은 정치적 목적으로 한 혼인이었던 세준의 외가.
세준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가족이라는 말에 외가의 집에 다녀오며 장례식 장면을 생애 처음으로 목격했다.
향을 피우고, 사람들이 침울해하고, 가끔 집에서 봤던 근육이 발달한 승려가 아니라 마르고 늙은 승려가 기도를 하고 있었으며, 관이라는 생소하면서도 어딘지 모를 꺼림칙함이 느껴지는 물체가 있었다.
누군가 죽었다는 것을 제대로 깨달을 나이는 아니었지만, 세준은 그 장소의 가라앉은 분위기와 사람들의 슬픔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장례란 건, 안 좋은 거구나.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있을 수는 없었지만, 조의를 표하고 생전 처음 보는 친척들과 인사를 나눈 뒤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세준.
일이 끝나고 집에 간다는 생각을 하자, 그제야 이런저런 문물과 신비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가에 없던 것! 신기하다! 바깥에는 저런 것도 있었구나!
그렇게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면서 도중에 쉬기 위해 멈춘 곳에서 기념할 만한 물건들을 하나씩 사서 주머니에 담았고, 주머니가 가득 찰 정도가 되자 그런 울적한 기분은 금방 날려 버릴 수 있었던 세준.
시간이 흘러 자신이 봤던 것과 사천 바깥의 풍경을 이야기해 주기 위해 신나게 집에 들어온 세준은, 외가의 장례식에서 보았던 것들을 자신의 집에서 보게 되었다.
-어……?
평소 제사를 지낼 때가 아니라면 거의 피우지 않았던 향의 냄새.
외조부님의 집…… 아니, 그것보다 몇 배는 더욱 무거운 침묵과 암울한 분위기.
아니, 오히려 그런 암울한 분위기를 치우기 위해 사람들이 더더욱 바쁘게 움직이며 이상할 정도로 멀쩡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어렸던 세준에게도 확연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었다.
평소에 그와 잘 어울려 주던 동년배 형제들, 툴툴거리면서도 챙겨 주던 형들, 자신보다 어리지만 의젓한 모습을 보여 주던 동생들.
그런 그의 형제자매들이…… 그들의 방에 없었다.
그리고, 차마 정리할 틈이 없었던 건지 아니면 누군가 보기라도 한다면 가까스로 다잡아 놨던 마음이 흔들릴 거라 생각한 건지 눈에 띄지 않는 세가의 한구석에 쌓여 있는 관들.
그런 관들 중에서, 유독 크기가 작은 관들이 눈에 보였다.
-하나, 둘…….
세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관의 개수를 세기 시작했고, 그 수가 늘어 갈수록 공포감은 커져만 갔다.
마침내 그 수를 모두 세었을 때, 그 작은 관들의 개수는 그를 제외한 형제자매의 수에서 단 하나가 모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