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5화 (1)
뜬금없이 호랑이가 등장하는 상황에 대회장 내부의 사람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지만, 그 호랑이 위에 타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그 상황을 납득했다.
무대 위 또한 예외 사항은 아니었기에 세진과 소민, 둘은 호랑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두목님. 와 줬구나.”
야수궁의 궁주인 야율천락과 함께 있는 남만 야수의 왕, 천호를 보며 미소 짓는 소민.
“……두목님? 호랑이가?”
그리고 호랑이, 천호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그런 천호를 보며 두목이라 칭하는 소민이 의문스러운 세진.
“무리를 이끄는 대장은 가장 노련하고 현명해야 해. 궁주님도 강하지만 두목님은 더 오래 살고 아는 게 많아.”
중원의 입장에서야 야수궁주인 야율천락이 최고 지도자인 것으로 보이지만 남만의 사람들은 천호를 지도자로 생각한다.
다만 궁주인 야율천락이 그들을 이끌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따르는 것은 단순 서열상의 관계이기도 하고, 또 야수의 왕이 교감하는 상대는 궁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야율천락 본인의 권력도 권력이지만 야수의 왕인 천호의 대리인이기 때문에 원활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특성 탓에 남만 출신이 아닌 야율천락이 궁주가 될 수 있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두목님이 제일이지만, 궁주님의 명령도 듣는 거지. 이제 알겠어?”
하지만 세진은 소민이 의외로 친절히 설명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말이 많아. 싸울 거야……? 아니면 다과라도. 가져올 거야?”
말이 많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발끈하며 소리치는 소민.
“네가 물어봤잖아!”
실제로 소민은 세진이 의문스러워하길래 말해 준 것에 불과했지만, 세진은 의문스러워하긴 했지만 질문까지 할 마음은 없었다.
그저 의문스럽기만 할 뿐 그것을 굳이 물어볼 만큼 궁금해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세진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서 상대방이 주저리주저리 떠든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 물었어? 난…… 호랑이가 아닌데.”
“으으으으! 못 참아!”
“시, 시작!”
그렇게 둘 사이의 열기가 상당히 고조되자, 심판은 곧바로 시작 신호를 알린 뒤 빠져나갔다.
둘의 싸움이 시작되자, 먼저 움직인 것은 소민이었다.
“기어 다니는 것들의 떠오르는 독!”
소민은 단련된 육체와는 달리, 독이 특기인 듯 소매에서 흰색의 가루를 허공에 뿌렸다.
반면 아직까지 자신이 뭔가를 잘못했나 싶은 생각을 하던 세진은 공중에 퍼지는 독을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벌레?”
벌레라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그녀는 독을 피하지 않았고, 역으로 암기를 소민에게 던졌다.
“치잇.”
날아드는 비수를 피해 내며, 세진을 노려보는 소민.
세진은 공기 중에 퍼진 독의 냄새를 맡고, 직접 혀를 내밀기까지 했다.
“응, 벌레. 으음, 아냐. 뱀독? 독샘 분말, 섞었어?”
“잘 아는군. 역시 어쭙잖은 독은 안 된다 이건가.”
독 또한 사전에 검증받은 것만 써야 했기에 치명적인 것을 사용할 수 없었던 소민.
그리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독을 쓸 수 없는 세진.
독공과 독공이 만나자,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이변이 발생했다.
그 모습에 어느덧 제법 훌륭한 사회자가 된 용준이 흥분하여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아!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독과 독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같은 성향의 무인끼리 만났을 때엔 으레 더욱 치열해지지만! 이 경우에는 서로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같은 종류의 무인끼리 만났을 때는 통상적으로 그 치열함이 극에 달한다.
검수와 검수의 만남은 해볼 수 있는 수단을 서로 알고, 특정한 기운을 사용하는 무인들의 만남은 방금 전 혁련운의 대결이 증명했다.
물론 조금 다르긴 했지만, 동종의 대결 간에는 서로의 실력과 순간의 판단이 전부이기 때문에 더욱 치열하고 다양한 변수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같은 경우는 조금 달랐다.
서로의 독 중 누가 더 잘 버텨 내, 나와 누가 더 강하고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는지를 겨루는 독공의 대결.
독으로는 중원에서 따를 이가 없다는 독심의 당가, 그 일원인 당세진.
마찬가지로 독에 대한 명성은 당가와 비슷하거나 특수성으로 따지면 그 이상이라는 남만의 독술사, 소민.
하지만 지금 그들의 독은 수준을 제한당했기에,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래도 독공을 쓴다는 자존심이 있는 건지, 아니면 하나라도 먹히는 것이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서인지 그녀들은 서로 독을 주고받았다.
“날아드는 것들의 파고드는 독.”
“미혼독.”
서로 맞는 것을 각오하고 실제로 맞아 가면서 뭔가를 던졌지만, 효과가 없었다.
“찌르는 것들의 타오르는 독.”
“마비독.”
뿌리기를 해도, 효과가 없었다.
“피 흘리는 바위의 좀먹는 독.”
“부식독.”
마찬가지로…… 효과가 없었다.
이내 둘은 모든 독을 소진한 채,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강한 독이 있었다면…….”
“극독, 필요해. 근데…… 못 써.”
서로에게 독이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고, 검증까지 끝낸 그녀들.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
“무공, 귀찮은데.”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허리와 다리를 굽혀 무게중심을 낮추기 시작하는 소민.
그리고 품속과 소매 속에서 암기들을 꺼내 드는 당세진.
독공이 서로에게 안 먹히니, 다른 방법으로 서로 싸움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무대 위에서 2차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영의는 무대를 보고 있지 않았다.
“…….”
나타날 때부터 지금까지, 천호의 등에 올라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무대를 지켜보고만 있는 야율천락.
그리고 무대 위에서 독을 뿌리든, 피를 뿌리든 자신과 아무런 관계 없다는 듯이 뇌영의 촉감을 느끼고 있는 혁련운.
둘을 슬쩍 번갈아 보던 영의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런 영의의 한숨 소리를 듣자, 무아지경과도 같았던 혁련운이 흠칫 놀라 영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귀인, 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러고 있었습니까?”
“음, 조금. 아니, 조금 많이?”
만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다음 시합의 시작, 양 참가자 간의 기 싸움, 서로 독을 뿌리며 견제하다가 마침내 격돌에 이르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영의는 그 시간을 조금이라고 표현했다.
그 와중에 많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뇌영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그 대답에 주위로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더니 아직 세진의 시합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뇌영에게로 눈을 돌리는 혁련운.
참고로 영의에게 물어보고 주위를 둘러보는 와중에도 그의 손은 계속 뇌영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런 혁련운의 손길에 계속 쓰다듬어지던 뇌영이었지만, 그는 전문가답게 어디를 만져 줘야 새가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꾸르륵…… 꾸우욱(나도 모르겠다 이젠…… 썩 나쁘지도 않고).”
“그보다 귀인, 어째서 남만의 야수궁주가 옆에 있는 겁니까?”
시선은 뇌영에게 고정한 채 방금 주위를 둘러볼 때 목격했던 장면에 대해 물어보는 혁련운.
“나도 몰라. 저 아저씨가 그냥 와서 앉더라. 아, 호랑이도 같이. 구경하러 온 거 아닐까? 저 위에서 시합하는 애도 남만 출신이라며?”
영의는 무림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태연함을 보여 주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개인적으로는 남만의 새…… 아니, 영물들도 나름 관심이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뇌령조만큼 흥미롭고 멋진 새…… 아니, 영물은 없어서 말입니다.”
그리고 영의만큼 태연할 수 있는 동시에 뇌영에게 흠뻑 빠졌기에 야수궁주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아니, 그냥 더 이상 신경 쓸 생각도 없는 혁련운의 대답.
어지간해서는 새외가 아니라 정파의 무인이 와도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둘의 태도에 화를 내고도 남았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야수궁주는 그런 둘의 말을 들었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무대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그러는 한편, 무대 위에서는 상당히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암기, 맞았는데. 멀쩡해? 그거, 불합리.”
“말이 많은 것을 보니 패배를 직감했구나!”
세진은 눈에 잘 띄지 않고 빠르게 날릴 수 있는 침 계열의 암기를 비수들에 섞어서 날려 소민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독의 명성이 높은 남만이라고 해도 거기서 독만 수련하지 않았다.
“튼튼한 가죽과 강인한 근육 앞에서는 그런 자잘한 침 따위! 소용없어!”
외공 계열로 단련된 듯, 세진이 던지는 침들이 박히지 않았다.
다만 그런 소민도 비수같이 크기가 조금 있는 것들은 피하거나 쳐 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어느 정도 중량이 있으면 부상을 입을 것이라 판단한 듯했고, 실제로도 외공은 보조 격으로만 배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런 불완전한 외공에도 불구하고 세진을 압박하기에는 충분히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으음. 곤란해.”
비수에 독과 검을 사용하는 오빠 세준이 여러 수단을 가진 것과 달리 암기술과 독에 더욱 치중했던 세진은 가진 암기가 대부분 사용 난이도가 높았지만 가볍고 눈에 띄지 않는 침 계열이었다.
자신에게 남은 암기의 수와 상대방의 능력을 고려한 다음 계산에 들어가는 세진.
사방만화나 팔방만화를 사용하기에는 충분했지만 침도 어디까지나 독을 묻히는 보조 수단이었지, 주된 공격 수단까지는 아니었다.
“나, 강기는…… 못 쓰는데.”
만약 침에 강기를 담아 쏘아 낼 수 있었다면 넓은 범위에 가하는 공격으로서는 가히 손색이 없었겠지만…… 아직 그 정도의 경지에는 오르지 못한 세진.
하지만 그녀는 이내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미소를 지었다.
“아, 그거다.”
소민은 세진이 미소 짓는 모습을 보자 잠깐 불안해졌지만, 이내 자신의 단련된 육체와 무공을 믿고 달려들었다.
‘저년은 독과 암기만 빼면 별 쓸모가 없다!’
“여기서 쓰러져라!”
소민이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들던 그때, 갑작스럽게 연막이 피어올랐다.
퍼엉!
“쿨럭, 크윽! 뭐가 남아 있었냐!”
그리고 그 순간 무대 아래에서 세준의 외침이 들려왔다.
“잘했다! 세진아! 이 오라비의 조언을 들었구나!”
이전 시합에서 팔방만화에 모든 암기와 독을 갖다 쓴 세진에게 우려를 표한 세준.
물론 이겼으니 별문제야 없었지만 만에 하나 상대가 피하거나 독을 버텨 낼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그는 연막탄을 무장에 넣으라고 했다.
‘본인이 직접 내력을 불어 넣어서 터트리는 용도인데…… 이 정도면 바닥의 모래를 집어도 가능한 기술 아닙니까?’
시야를 가리는 용도에만 국한되어 있고, 화약성이 아니라 단순히 분말을 채워 넣은 구슬에 불과했기 때문에 허가도 받았다.
그리고 그런 연막탄이 터지며, 소민의 시야가 차단되고 말았다.
“남만에서 단련된 후각을 우습게 보지 마라!”
이내 시야가 안 된다면 냄새로 찾기 위해 코를 벌름거리는 소민.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코를 막고 인상을 찌푸렸다.
“크윽…… 냄새.”
단순히 시야 차단용 분말만이 아닌, 냄새를 감추기 위한 가루까지 섞어 넣었기에 소민은 세진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었다.
소리는 주변 관객들의 소리 탓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고, 또 주변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추정되는 발소리도 없었다.
‘오냐, 숨어서 일격을 노리겠다 이거지? 나도 똑같이 상대해 주마. 누가 먼저 쓰러지나! 어떤 야수든 간에, 최후의 발악이 있다고!’
소민은 세진의 작전이 기습이라고 직감했고, 세준의 시합에서 검을 봤기에 숨겨 둔 검을 이용한 최후의 일격이 그녀의 계획일 거라 직감했다.
한 대를 맞더라도 마지막 일격을 꽂아 주겠다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연막 속에서 공격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숨어서 기습하는 데에는 숲속의 야수들도 대책이 없지. 하지만, 때로는 역으로 죽는 놈들도 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연막이 조금씩 옅어지던 그때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거기냐!”
숲속의 표범처럼 날렵하게 몸을 돌리며 주먹을 날리는 소민.
‘쳐 내고, 곧바로 주먹을 꽂는다!’
어느 정도 위치를 특정했기 때문에, 그녀는 날아드는 검을 쳐 낸 다음 세진의 몸에 주먹을 꽂으려 했다.
아무리 외공을 단련했다 하더라도 검을 그대로 받아 내면 다음 비무에 지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타악!
성공적으로 들어오는 무언가를 쳐 낸 소민.
하지만 그녀는 검을 튕겨 내거나 옆으로 비껴가게 만들지 못했다.
“크아악!”
아니, 애초에 검도 없었다.
무언가를 쳐 내려 했던 소민의 왼팔에는, 비수와 침들이 빼곡히 박혀 있었다.
정확히 뭔가를 쳐 내려 했던 그 부분에만 박혀 있는 암기들.
자신의 몸에 뭔가 박히자 당황한 소민은 세진을 쳐다보았고, 이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미친년이!”
“아프네, 많이. 그래도…… 효과 있어. 오빠한텐…… 미안하지만.”
세진의 손에는 수많은 암기들이 들려 있었고, 그것을 그대로 소민에게 냅다 꽂아 넣은 것이었다.
그리고 침 같은 암기의 특성상 손잡이라고 부를 만한 부분이나 딱히 날카롭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옆을 잡는다면 모를까, 손안에 가득 채울 만큼 잡기 위해서는 한쪽 부분을 손바닥으로 받쳐야 했고 그 탓에 세진도 손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미소가 사라지진 않았다.
“……한 번, 더 할래? 너, 죽을지. 내가, 죽을지.”
세진이 소매 속에서 다시 암기들을 꺼내 피 흘리는 손안에 가득 그러모아 쥐는 모습을 보자, 소민은 문득 공포감을 느꼈다.
살면서 처음으로 고슴도치…… 아니, 고슴도치는 그저 방어기제가 뛰어날 뿐 공격자는 아니다.
고슴도치를 뛰어넘는, 대놓고 공격까지 해 대는 공격 특화 고슴도치인 호저를 마주한 야생동물들은 빠르지도 않은 그 모습에 쉽게 보고 잡아먹으려다 그 가시에 찔려 고통스러워한다.
물론 동물들도 바보는 아니니 찔려서 아프면 그대로 도망가지만, 간혹 굶주림을 참지 못하거나…… 아니면 호저 쪽에서 역으로 공격을 해 올 때가 있다.
그렇게 가시에 찔리게 되면, 대부분은 사망하게 되며 죽기 직전까지 가시에 대한 공포와 분노를 느끼다 죽어 가는데, 소민 또한 그런 공포감을 느꼈다.
‘이년은…… 호저다, 그것도 아주 독한 녀석!’
그리고 그때 문득, 소민의 머릿속에 당가의 독심이라는 말이 스쳐 지나갔다.
‘가장 지독하고 두려운 독은…… 당가의 마음속에 담긴 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