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23)
2일 차의 비무에서도 특이한 사항은 발견되지 않았다.
신직과 관인의 대결이 너무 싱겁게 끝났다는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한 점이었지만, 치러진 경기들이 많았던 데다가 다소 특징이 없다는 점 또한 한몫했다.
사실, 2일 차는 1일 차의 굵직한 시합들에 비하면 박진감이나 볼거리가 모자랐기에 관객들도, 운영진 측도 다소 시시하다고 느낀 건지 대회 진행의 속도를 늘리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구파일방, 마교, 세가들과 종신이나 영의 등, 눈에 띄는 이들을 모아 둔 경기들과 달리 다소 눈에 띄지 않는 이들을 모아 둔 다른 대회장.
물론 모든 인원을 눈에 띄는 이들만 모아 둘 순 없으니 신직과 관인의 대결 같은 의외의 시합도 성사되었지만.
그렇게 두 대회장에서 치러지던 본선의 크기를 키워, 본선을 네 배의 속도로 진행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혁련무강과 독고휘가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늘어났지만, 그들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겼다.
‘무슨 수를 쓰든 끄나풀 녀석은 후기지수들보다 강할 테니 상위에 입상할 터. 차라리 이렇게 빠르게 걸러 내는 게 더 좋은 방법이겠지.’
‘서른두 명만 남으면 그 이후로는 모든 경기가 이 대형 무대에서 치러지니 나쁘지는 않군.’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무대에서 일어나는 수상한 일들을 지켜보는 것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아아, 회심의 일격이 작렬했습니다. 정말 운 좋게 승리를…….”
비무 도중, 절초를 서로 주고받던 무인들 중 한 명이 안타깝게 패배하는 광경을 보며 탄식하던 용준.
하지만 독고휘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저놈 저거 소매 뒤져 봐라.”
“뭔가 숨겨 뒀군. 암기를 발사하는 장치인가? 들키면 안 되니 독은 없을 테고.”
“예?”
사전에 허가받지 않은 장비를 쓰는 것과 같은 몇몇 부정행위들을 직접 잡아내기도 하는 등, 앉혀 놓은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렇게 2일 차에서 나름의 선별 작업이 끝나고, 용봉비상전에는 64명의 참가자들만이 남게 되었다.
대회가 3일 차에 접어들고, 영의는 또다시 비무를 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하루를 쉬고, 누군가는 비무 다음 날 다시 비무를 하게 되었지만…… 뭐, 어떻겠습니까? 운이 없었던 것을.”
영의의 앞에 선 상대는 그와 동갑이면서도, 영의와 나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렇게 보면 저도 참 운이 없는 것 같습니다. 형님에게 밀려 둘째가 된 데다, 또…… 누군지 모를 사람이 동생들의 존경과 아버지의 관심을 빼앗았기 때문이지요.”
두 번째 비무의 상대는 다름 아닌 혁련무강의 둘째 아들, 혁련진이었다.
“……말 참 많네. 그리고, 성격도 꼬였고.”
다소 비꼬는 듯한 말을 계속 늘어놓으며 영의를 노려보는 혁련진.
“말이 좀 많은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꼬이진 않았지요. 당신의 관계만큼 꼬인 게 이 하늘 아래에 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냈던 그의 형 혁련강과는 달리 혁련진은 은근하게 영의를 싫어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한 채 영의만을 노려보고 있는 그 눈빛은 무공을 전수받은 스승이자 숙부인 검마 혁련무성의 면모를 닮은 것 같았다.
“하아, 또 귀찮……. 아니 골치 아픈 타입이야…….”
영의는 이상한 인물을 한두 번 만나 본 게 아니었기에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대놓고 적대하면 싸움이라도 하지.’
그렇게 둘의 적당한 기 싸움이 끝났다고 판단한 심판이 다가와 둘 사이에 섰다.
“준비됐나?”
“됐소. 내 검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지.”
혁련진은 연신 검의 손잡이를 잡은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검을 뽑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조금씩 움찔거리는 것으로 보아 지금 당장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빨리 시작 안 외치시면 손 잘리실 것 같은데.”
영의는 그 모습을 보며 나지막하게 조언했고, 심판은 급히 시작 신호를 외치며 뒤로 물러섰다.
“시, 시작!”
스르륵-
혁련진은 시작 신호가 울리기도 전, 심판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발검하며 영의에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재빨리 검을 뽑았음에도 마찰음이 별로 들리지 않았다는 점이, 그의 검술이 얼마나 노련하고 정확한지를 보여 주었다.
“혈사풍검, 유온사풍(柔穩沙風).”
사풍검.
사막에 가까운 마교에서 드물게 나온 정공에 가까운 무공으로, 대부분의 교인들이 한 번쯤 배우는 정통 무공에 가까웠다.
이름답게 때로는 여행자의 더위를 식혀 주지만 때로는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매서운 사막의 바람을 표현하듯, 가볍고 부드러운 면과 무겁고 거친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다만 어지간해서는 사람을 흉포하게 만드는 마교의 심법들과 맞지 않기 때문에 거의 입문 검술 정도로 배우고 넘어가는 무공이었다.
하지만, 검마 혁련무성이 사풍검을 직접 개량하고 마기에도 맞게끔 초식이나 운용 방식을 바꾸었고 절초 세 개를 추가하자 아예 새로운 무공으로 탈바꿈했다.
도를 휘두르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호선을 그리며 날아든 혁련진의 검은 영의에게 닿았지만, 뜻밖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앙!
금속끼리 부딪쳤을 때에 울리는 쇳소리.
“……수갑(手鉀)인가.”
영의의 양손과 팔목을 덮는, 금속과 가죽 재질로 만들어진 듯한 보호대가 검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 뭐. 새로 하나 뽑았어.”
카드득, 까앙!
혁련진의 검도 상당한 명검이었지만, 영의의 수갑은 그런 검에 질 수 없다는 듯 거친 소리를 내며 검날 위로 미끄러졌다.
“칫.”
의외로 수갑이 튼튼하자, 혁련진은 뒤로 물러나며 검을 뺐다.
기수식을 취하며 검을 슬쩍 훑어보며 상태를 점검하는 혁련진.
“……대체 뭐로 만든 거지? 한철? 현철? 색을 보아하니 묵철은 아닌데. 만년한철을 썼다면 못 알아볼 리가 없고.”
그의 검날은 평소와 같이 잘 연마되어 있었지만 영의와 충돌했던 순간 이가 나가 버렸다.
물론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자신이 쓰고 있는 검보다는 튼튼한 게 틀림없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부딪치고 나서도 멀쩡해 보였으니까.
“글쎄, 알려 줘도 별 의미는 없을 것 같아. 안 그래?”
“좋다! 권은 검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직접 보여 주마!”
혁련진은 검을 고쳐 잡고 영의에게 덤벼들었고, 영의 또한 새로 장만한 장비를 앞세워서 그와 맞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둘의 비무가 박빙이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서로 맞부딪치기만 하던 그때, 혁련진이 승부수를 띄웠다.
“일풍이사(一風移沙)!”
한 번의 바람으로 모래 산을 옮기듯, 묵직하고 강한 일격이 장점인 초식.
강맹하고 힘이 가득 담긴 검이 영의를 향해 위협적으로 날아들었지만 영의는 보호대마저 사용하지 않고 그것을 막아 냈다.
“무기 밟기.”
공중으로 뛰어 자신에게 날아드는 검과 그것을 잡은 혁련진의 손목을 살포시 밟고는 위로 뛰어오른 영의.
“방금 일풍이사를 밟아서 피했군. 물론 잘못된 판단은 아니지만, 나였다면 공중이 아니라 옆으로 피했을 거야.”
“아니, 옆으로 피했다면 이어지는 초식에 맞았을 것이다. 이풍래산이나 다른 초식으로 연계 가능한 초식이니.”
“그게 그렇게까지 가능했던가?”
독고휘와 혁련무강 대신, 오늘은 팽소운과 권마 강자성이 해설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권마의 해설대로, 혁련진은 곧바로 다음 초식으로 연계를 시작했다.
“혈사폭풍(血沙爆風)!”
검에 실은 힘을 바깥에 두고 자신의 몸을 축으로 이용해 둥글게 회전하여 적을 추격하는 일검.
하지만 영의는 공중에서 뇌기를 끌어 올린 뒤, 곧바로 받아쳤다.
“뇌창!”
번쩍!
회전하던 도중에 뒤로 튕겨 나간 혁련진.
영의는 그가 튕겨 나는 그 짧은 순간 동안 재빨리 착지하여 자세를 가다듬었다.
“와아아아-!”
쉴 새 없이 밀어붙이는 혁련진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게 모든 것을 피하거나 받아친 영의에게 관객들의 환호가 쏟아지고 있었다.
“……숨길 생각이란 게 있는 건가? 저럴 거면 뇌섬문으로 출전하지.”
“크흠, 아직 비무는 끝나지 않았다. 이공자님께서 뭔가를 준비하시는군그래.”
권마의 말대로, 혁련진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마지막 절초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풍검에서 혈사풍검으로 바뀌며 새롭게 추가된 세 개의 초식 중 마지막.
“혈풍십이난검(血風十二亂劍)!”
한 호흡에 혈사풍검에 담긴 초식들을 열두 번 내지르는, 단순하다면 단순한 초식이었지만 한 초식이 끝났을 때의 동작을 곧바로 이어 가야 했으므로 단순히 열두 번 내지르는 것보다 배는 더 힘든 기술이었다.
그리고 이 초식의 가장 특이한 점은 어떤 초식이건 간에 연결해서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동일한 초식이라 할지라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이공자님의 혈풍십이난검이 나왔군.”
혈풍십이난검은 혈사풍검을 완전히 다 배웠다는 증거와도 같은 초식이었다.
모든 초식을 완벽하게 이해해야만 서로 간에 연결할 수 있었으니까.
“마지막 승부수라, 이건가? 벌써 저걸 다 통달했다니.”
해설 위원 자리에 앉은 권마와 권왕, 둘 다 지금이 비무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저건 아까처럼 피할 수 없는 초식이지. 하나나 두 개야 어떻게 막아 내도 나머지가 계속 이어져 들어오니.”
무대 위에서 달려드는 혁련진을 마주한 영의 또한, 그들의 해설을 들었다.
‘그러니까 아까 같은 게 연속으로 열두 번이 온다 이거지…….’
“그렇다면…… 열두 번 전부! 받아치기만 하면 내가 이기는 거잖아!”
영의는 뇌기를 끌어 올리기 시작하며 혁련진을 노려보았고, 혁련진 또한 영의를 노려보며 검을 뻗어 왔다.
“뇌신무, 약.”
“일풍……!”
콰앙!
보호대로 감싸진 영의의 주먹과, 검기가 맴도는 혁련진의 검이 부딪쳤다.
첫 번째의 격돌 이후, 곧바로 다음 공격을 가하는 혁련진.
“죽어라!”
혁련진은 영의를 반드시 이기겠다는 집념이 생긴 듯, 영의에게 살의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아, 죽이면 안 됩니다.”
“죽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마는.”
한편, 그런 혁련진을 보면서도 여유로운 해설 위원들.
뚜둑, 뚝.
“흐읏-차.”
이미 승부가 났다는 듯, 그들은 기지개를 켜거나 목을 꺾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쾅, 콰앙!
그리고 무대 위에서는 계속되는 검과 권의 격돌이 이어지고 있었고, 마침내 그 격돌의 횟수가 열 번째 되던 순간이었다.
파직!
“크윽!”
순간적으로 튀어 오르는 뇌기에 움찔하며 물러서는 혁련진.
“나름 조절한다고 한 건데, 계속 쓰니까 누전이 생기네.”
영의는 지금 뇌신무를 최소화한 상태에서 싸우고 있었고, 검기와 맞서 싸우기에 충분할 정도의 위력을 갖췄지만 너무 축소해서인지 뇌기가 조금씩 새고 있었다.
“나를 능멸하는 거냐……!”
하지만 혁련진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일종의 놀림이라 생각했다.
제대로 뇌기를 쓰지 않아도 이길 상대라고 조롱하는 의미라 받아들인 혁련진.
이내 그는 손대선 안 될 것에 손을 대고 말았다.
“크으아아아-!”
머리 부분부터 목을 타고 점점 온몸의 혈관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혁련진이 이성을 잃은 듯 괴성을 내질렀다.
일전에 혁련운이 사용했던 광혈술을 사용한 것이다.
다만 혁련운이 썼던 것과는 그 궤를 달리했는데, 위력의 조정이나 후유증을 고려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광혈술이었다.
“저건……!”
“이공자님이, 폭발해 버렸나 보군.”
권마, 강자성이 이성을 잃기 시작한 혁련진을 쳐다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했지만 끼어들기 위해 달려 나가진 않았다.
“이런, 씨…… 마교가 괜히 마교가 아니네.”
갑작스럽게 미쳐 버린 혁련진을 앞에 둔 영의는 마교가 원래 저런 집단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원래 저런 게 마교의 일반적 모습이었지 아마…….’
그리고 이내, 영의는 뇌기를 몸 밖으로 분출하기 시작했다.
“대충 해서는 못 이기겠고, 어차피 뇌창도 쓴 거…… 본격적으로 가야겠네.”
마기를 개방하여 더 강해진 마교의 이공자와 섬전뢰란 별호답게 뇌기를 꺼내 든 영의.
관객들은 그 모습에 더욱 열광하기 시작했고, 객석의 한구석에서 그 장면을 노려보는 수상쩍은 눈들이 예전에 비해 조금씩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