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9화 (20)
화연과의 진땀 빼는 데이트 이후, 영의는 다시 무림으로 돌아왔다.
영의는 하루 이상을 지구에서 보내다 돌아온 것이지만, 그가 돌아온 시점은 본선 2일 차의 아침이었다.
그리고 하룻밤 사이에 수리된 비무대의 옆에 또 다른 객석이 생겨나있었다.
‘분명히 저건 없었는데…… 만들었나? 그사이에?’
인부들을 시켜 만든 것치고는 상당히 공이 들어가 있는 데다 몇 시간 안에 만들어질 물건이 아니었기에, 무인들이 여럿 갈려 나간 듯했다.
그렇게 영의가 무대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돌아다니고 있을 때, 그에게 다가오는 무인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 푸른 옷을 입은 청년이 영의의 앞으로 와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대협, 여기에 계셨소? 벌써부터 비무를 준비하고 계시다니 참으로 성실하십니다.”
1일 차에 혁련강에게 패배하고 무대 바깥으로 던져진 남궁우가,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그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어제 깨어난 이후 대협을 찾아 수소문하며 직접 뛰어다녔으나, 찾을 수 없어 난감해하고 있었던 차입니다. 간악한 마교의 대공자에게 내던져 지는 저를 받아 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협!”
남궁우는 영의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고, 그 뒤에 있는 인원들은 아마 영의를 찾기 위해 동원하던 이들인 것 같았다.
“아아, 뭐…… 걸어 다니는 걸 보니까 멀쩡한가 보네. 멀쩡하면 된 거지.”
영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 준 뒤, 자리를 뜨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무대가 깔끔하게 수리된 것과 해설 위원석을 만든 것을 확인했으니, 영의는 자신의 순서가 올 때까지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굳이 비무를 볼 필요는 없었고.
하지만 영의는 무림인의…… 특히 정파인의 은원 관계에 대한 굳은 마음을 낮게 평가하고 있었다.
덥석.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대협! 제가…… 그리고 가문에서 준비한 보답이 있습니다!”
남궁우는 영의에게 감사 인사와 함께 보답을 하기 위해 그를 찾았고, 영의가 다시 어디론가 가려는 듯하자 그를 붙잡고 늘어졌다.
“내가 그런 걸 받으려고 구해 준 게 아니라서 말이야. 가 볼 곳이 있는데 가면 안 될까?”
그리고 영의는 어쩐 일로 보답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며 자리를 서둘러 떠나려 했다.
‘겨우 그 정도 일로 뭘 받기에는 내 마음이 조금 불편한데…….’
짜장면값으로는 보검을 건네도 고개를 젓는 영의였지만, 사소한 선행에 있어서는 보답을 거부하고 있었다.
만약 독고휘가 이 광경을 봤다면 다소 불만을 품을 상황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독고휘가 그렇게 할 일 없는 노인처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인물은 아니었기에 이런 모습을 볼 일은 없었다.
“그래도, 뭘 받을 생각은 없어.”
영의가 다시 떠나려고 하자, 남궁우는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며 그를 붙잡았다.
“아무리 협객이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협행을 한다고는 하지만, 제가 아무런 성의 표시도 못 하면 남궁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됩니다! 거절하셔도 좋으니까! 보답을 하려 했다는 체면치레라도 하게 해 주십시오!”
남궁우는 영의가 진심으로 보상을 받기 싫어하는 듯 보이자, 서둘러 보답하려 한 시도라도 있어야 한다며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흐음…… 거절해도 된다고?”
영의가 잠시 멈칫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남궁우는 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네! 그렇습니다! 물론 거절하면서도 받을 때는 받는 게 관행이지만, 의와 협을 추구한다면 정말로 거절하지요!”
“그러면 일단 가기는 해야겠지. 거절해도 문제는 없고?”
“없습니다! 생기더라도 제가 없어지게 만들 겁니다!”
아직 소가주의 직위를 얻지 못하고 형제들과 경쟁 중인 남궁우였지만, 그렇다고 내놓은 자식도 아니었기에 작게나마 권력을 사용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영의를 찾는 데에 사람을 풀 수 있게 된 건 그 권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의 뒤에 붙은 인물의 덕이 더 컸다.
“그럼 가자고. 안내 정도는 부탁해도 되겠지?”
“예! 제가 모시겠습니다, 대협!”
영의는 남궁우를 따라 비무대회장을 빠져나와 남궁가의 숙소로 향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먼발치에서 목격한 이들이 있었다.
‘섬전뢰가 남궁가에……?’
‘어제만 해도 못 찾았는데, 아침에 갑자기 나타났다라……. 외곽에서 지내는 건가?’
‘어이쿠, 어느새 이동했구먼. 빨리 따라가야겠어.’
궁장, 무복, 누더기를 걸친 제각각의 인물들은 영의의 움직임에 따라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며 각자 다른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금천관.
하북에 있는 고급 여관 중 하나로, 금천이란 이름답게 푸르고 검은 실내에 금빛으로 빛나는 장식이 돋보이는 여관이었다.
‘……조금 언밸런스한데.’
물론 현대인의 감각을 가지고 있는 영의는 그 모습에 조금 어색함을 느꼈지만, 장사는 잘되는 걸 보니 무림인들에게는 별 관계가 없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금천관의 안, 한 탁자에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던 중년인에게 다가가는 남궁우.
“백…… 가주님, 대협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소협이 바로…… 내 아들을 구해 준 사람이로군.”
중년인은 다름 아닌 남궁세가주 남궁진의 형이자 무림맹주인 남궁선이었다.
정파 최고의 권력자이자, 상황만 따라 준다면 사파도 관여할 수 있는 거물.
물론 무림맹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날뛰는 일곱 고수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도 어지간해서는 무림맹이 편의를 봐주는 게 있었기에 멋대로 월권을 하진 않았다.
“구해 줬다기보다는 그냥 날아오는 걸 받아 낸 건데요.”
영의는 겸손……이라기보다는 사실을 말했지만, 남궁선에게는 그것이 겸손한 모습으로 비친 듯했다.
“나 또한 다른 이들과 함께 본선을 본 사람이니, 소협이 우를 받아 내지 않았다면 크게 다쳤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네. 그리고…… 소협의 비무도, 제법 관심 있게 보았지.”
남궁선은 지위와 나이가 제법 있었기 때문에 남궁우와 달리 영의를 소협으로 지칭했다.
물론 영의도 그런 것에 불편을 느낄 인물이 아니었고.
“자네는 다소 자유분방한 인물인 점도 알고 있으니, 빠르게 본론부터 꺼내도록 하지.”
남궁선은 무림맹주답게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고, 상대방에 따라 일 처리 방법을 다르게 적용할 줄도 알았다.
허례허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영의를 보고 곧바로 용건을 꺼내는 남궁선.
“자네, 무림맹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나? 무력대의 대주 직위를 주지.”
“싫은데요.”
영의는 남궁선의 권유를 칼같이 거절했고, 즉답이 돌아오자 남궁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대주 직위라면 응할 줄……. 응?”
“그보다, 저는 여기에 보답인지 뭔지에 대해서 듣고 왔는데…….”
영의의 칼 같은 거절과 그 뒤에 이어진 말에 당황하는 남궁선.
“으음? 아, 아아. 그, 그래. 줘야지.”
그는 이내 옆에 있는 무인에게 손짓했고, 무인은 나무 상자를 가져오더니 탁자 위에 올려 두고 사라졌다.
“열어 보게.”
끼익.
영의가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은은한 빛을 반사하고 있는 은원보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은 한 관일세. 사실 금으로 사례를 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내가 가주는 아니다 보니 돈을 쓰는 데에 제약이 있어서 말일세.”
남궁선은 영의가 무림맹의 대주 직위 대신 돈을 얘기한 것으로 보아, 금전으로 어떻게든 설득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돈으로 얘기가 통하면 더 좋지. 돈만 지불한다면 그동안은 잘 따라 줄 테니…….’
영의의 비무를 본 이들 모두가 똑같은 감상을 품었고, 남궁선 또한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저 녀석은 반드시 잡아야 한다!
물리적으로 잡든, 목숨 줄을 잡아 뜯어내든 영의는 비무 한 번에 요주의 인물로 떠올랐고 남궁우의 구명에 대한 보답을 빌미로 그를 데려온 것이다.
“그래, 사실 남궁가의 재력이라면 그 돈의 몇 배를 줄 수 있네만 혹시 남궁의 식객이라든가…… 데릴사위로 올 생각은…….”
본격적인 본론을 꺼내기 시작하는 남궁선을 두고 영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거절하고 가 보겠습니다. 애초에 거절해도 된단 이야기를 듣고 온 거라.”
“아니……?”
영의는 이내 곧바로 금천관에서 나가 버렸고, 금천관 안에 있던 남궁의 무사들은 영의가 아무것도 받지 않고 나가는 모습에 당황하여 그를 붙잡지 못했다.
“백부님, 섬전뢰 대협은 진정한 협객이십니다. 협행을 하는 데에만 뜻이 있을 뿐, 그에 따른 보답은 한사코 거절하는 그런 협객 말입니다.”
남궁우는 떠나는 영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그런 그의 말을 들은 남궁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높게 올라가겠단 야망도, 돈에도 초연한 후기지수라…….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정파에서 영의를 붙잡지 못한다면 사파나 마교로 넘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한편, 금천관에서 나온 영의는 방금 전 대화를 생각하며 걷고 있었다.
‘흠, 생각해 보면 그거 전부 거절할 필요 없이 그냥 구색내기용으로 하나만 받아 올 걸 그랬나? 여기 돈 없으면 의외로 불편할 텐데.’
은원보가 든 궤짝을 다 받는 건 거절해도, 은원보 하나 정도는 받아 오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고민을 하며 걷던 영의.
그리고 그런 그에게 다가오는 손길이 있었다.
툭툭.
“?!”
영의는 누군가의 손길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며 걷고 있었다고 해도, 영의가 알아채지 못하게 다가온 인물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거지?’
“헤헤헤, 생각이 많은가 보지? 생각이란 건 나이를 충분히 먹고 해야 하는 법이야. 젊을 때는 몸으로 움직이기만 해도 바쁠 것을.”
영의의 앞에는 개방의 방주, 취광개 화운이 실실 웃으면서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죄송한데, 제가 돈이 없어서요.”
“아니, 아니! 가지 마! 나는 뭘 달라고 온 게 아니라 자네가 걱정돼서 뒤따라온 거야!”
사실 화운은 아까 영의가 남궁우를 따라갈 때, 그를 지켜보고 있던 이들 중 하나로 영의를 뒤따라왔었다.
“절 따라와요? 걱정해서?”
“그래, 혹시나 뭔가 안 좋은 일을 당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말이지. 아, 나는 개방주인 취광개 화운이라네. 안 믿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개방의 높은 사람인 건 믿을 수 있겠지?”
영의는 눈앞의 늙은 거지를 잠시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지만, 이내 의심을 거두었다.
‘무림에서 거지면…… 개방이 맞겠지. 나이도 제법 있으니까 지위가 높은 것도 맞겠고.’
“글쎄…… 안 좋은 일은 별로 당하거나 하지는 않았는데요?”
“정파를 너무 우습게 보지 말게. 얼마든지 악독해질 수 있는 인물들이니까. 마음에 드는 인재가 정파보다 사파에 가깝다고 평가되면 언제든지 제거할 만큼 비정하기도 하다네.”
화운은 개방의 방주답게 이런저런 정보를 많이 들었기에 정파와 사파의 비밀스러운 면모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의는 정말로 부당한 대우를 당하지 않았기에,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뭐?! 무림맹 대주에 은 한 관? 흐음, 의외군. 맹주가 아낌없이 제시하다니. 자네를 어지간히 높게 사고 있나 봐?”
화운은 남궁선이 영의에게 제시했던 조건을 듣고 놀라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사실 그는 영의가 본선에서 북주혜와 맞서 싸웠던 광경을 직접 보지 못했기에 이런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정보야 들었으니 그가 직접 살피러 왔지만 그 모습을 보지 않았으니 다소 낮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음? 누가 오는군. 일단 자리를 피하세.”
“아니, 저는 피할 이유가…….”
“일단 가게나!”
영의는 화운의 손에 이끌려 갑작스럽게 골목으로 끌려가게 되었고, 그런 둘의 뒤를 몰래 쫓던 인물들이 몰래 따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빠르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 * *
북해의 무인, 북주혜는 아침부터 대회장 주변을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없네요.”
누군가를 찾으려는 듯, 비무대회장의 주변의 골목을 이리저리 맴돌다 이내 포기한 듯 저잣거리로 나온 그녀.
그리고 원래 하던 것을 포기한 채 북해로 돌아가기 전까지 중원의 문물을 구경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 골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진짜!”
“이 목소리는……!”
이내 그녀는 목소리가 움직이는 방향을 감지하고 방금 전까지 한참 돌아다녔기에 지리를 외워 둔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목소리의 주인이 오는 경로와 자신이 지나는 경로가 우연히 일치하게끔 한 뒤, 주혜는 모퉁이를 돌았다.
툭.
눈을 감고 목소리의 주인인 그 누군가와 ‘우연히’ 부딪친 주혜는 이내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어머, 소녀가 실수로…….”
하지만 그 부딪침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투둑.
툭.
터억.
“?!”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앞서 있는 사람을 쫓아가고 있었다.
“섬전뢰 대협! 남궁가의 숙소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저희 세가에도 한번!”
“내가 이럴 것 같아서 안 가려고 했던 건데!”
앞서서 도망가는 영의와, 어느새 그를 데리고 가던 입장에서 그를 쫓아가게 된 입장으로 변한 화운을 비롯한 여러 무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이런저런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북주혜.
“대체…… 무슨 일이…….”
그녀는 멍하니 서서 그 광경을 쳐다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