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13)
영의는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위치를 바꿔 가며 3차 예선의 무대를 계속해서 지켜보았지만, 달리 수상한 이는 발견하지 못했다.
“슉, 슈슉. 슉! 이것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나의 섬전과도 같은 쾌난검무…… 아니, 쾌…… 쾌난권무……를! 받아라!”
“대체 뭐라는 거냐! 하나만 해라!”
“크어억! 나의 쾌난검무가!”
종신의 눈에 띄는 화려한 승리 이후 여러 무인들이 자신도 같은 인기를 얻어 보겠다고 어설프게 권법을 쓰려다가 역으로 지는 사태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하하! 그대로 가만히 있어라!”
“크윽…… 졌소.”
“이것이 바로 차기 천하제일인이 될 재목인 원조온 님의 무공이다!”
다소 화려하고 실력도 제법 있어 보이지만, 가진 실력에 비해 자만심과 허세가 가득한 무인 하나가 조금 눈에 띄었을 뿐, 나머지는 딱히 수상하거나 눈에 띄지 않았다.
‘아무리 눈에 안 띄게 위장을 하려고 해도, 어느 정도의 느낌은 올 줄 알았는데…….’
영의는 3차 예선의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라온 혁련운을 보며, 이 비무를 마지막으로 본 뒤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흥…… 마교의 공자라고? 딱 얼굴부터 샌님처럼 생겼군! 이 흑사방의 황종 님께서 너를 쓰러트려 주마!”
혁련운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드는 듯, 얼굴을 찡그린 채 자신만만하게 손에 쥔 도를 휘두르며 노려보는 황종.
“이……긴다……!”
하지만 혁련운은 그런 황종의 태도는 아랑곳 않고 거친 숨을 내쉬며 그를 노려보았다.
“……시작!”
시작 신호가 떨어지자, 황종은 곧바로 도를 좌우로 휘두르며 혁련운에게 접근했다.
“받아라! 흑표탐조!”
검은 표범이라는 말이 괜히 들어간 초식이 아닌 듯, 표범처럼 날래고 유연한 움직임으로 달려드는 황종.
하지만 혁련운은 그런 황종에게 특별한 대처를 하지 않고, 역으로 그의 도에 달려들었다.
“크아아!”
이름 그대로, 표범이 먹잇감을 사냥하듯 상대를 추적하여 계속 몰아붙이는 게 특징인 초식인 흑표탐조는 역으로 달려드는 방식에는 약했다.
“무슨?!”
갑작스러운 맞공격에 당황한 황종은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초식을 계속 이었고, 도의 옆면을 혁련운의 주먹 앞으로 끼워 넣었다.
카앙!
어떻게든 방어로 연결한 덕분에 초식을 급히 중단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예상외의 일격을 맞을 뻔한 황종은 다소 혼란스러워졌다.
‘뭐지?! 내 초식의 특성을 보자마자 알았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보다, 일격이 엄청나게 무겁다!’
흑사방이 작은 세력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파의 수많은 무공들 중 굳이 하나를 꼽아서 기억할 이유는 없었다.
한편, 황종이 당황한 사이에 혁련운은 그를 노려보며 짐승 같은 숨소리를 내뱉었다.
“크후욱……! 이 자식!”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던 관객들과 영의는 마음속에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보게, 저것 혹시…….”
“마인이라고?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마공의 특성상 빠른 성취를 위해 부작용을 감수하는 면이 있었고, 그 부작용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마인화였다.
머리의 백회혈로 내기가 역류하며 생기는 부작용으로, 무공은 강대해질지 모르나 이성을 쉽게 잃고 광폭해지기 쉬웠다.
“마인은 아닐세. 마인이었다면 저렇게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할 리가 없지.”
“다소…… 광기가 끓어오르는 마공의 경우일 수 있지만, 그런 게 한두 개여야 말이지.”
마교의 공자라고 해도 마공을 익히지 말란 법은 없었다.
애초에 위험성이 높은 마공 중에도 위험에 따른 성취가 큰 것들이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일단, 각 문파와 마교 쪽의 고수들이 모두 가만히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문제는 안 생긴 듯하니 지켜보도록 하세.”
마공과 평생 싸워 오고 연구해 온 곤륜파의 도사들도, 마공에 가장 통달해 있을 마교의 고수들도 혁련운의 모습에는 그저 침묵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장 예민해야 할 이들이 가만히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관객들.
그리고 영의는 이성이 약간…… 아니 상당히 맛이 간 듯한 혁련운을 보며 마교의 사람들을 의심하고 있었다.
‘권마 영감님은 굴리면 굴렸지, 저러진 않을 거고…… 그 할머니인가?’
2차 예선 탈락으로 인해 충격을 받은 마의가 무슨 짓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는 영의.
사실, 그 의심은 거의 대부분 들어맞았다.
2차 예선에서 동반 탈락이라는 황당한 이유로 떨어졌기에 마의가 충격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고, 3차 예선을 대비해 무슨 수를 쓰려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의가 뭔가 하려던 것보다, 혁련운이 먼저 손을 쓴 게 조금 더 빨랐다.
-이대로…… 이대로라면 본선에 나갈 수 없게 된다. 어떻게든 이겨야만…….
승리를 확신하다가 예상치 못한 이유로 떨어진 혁련운은 빠르게 대책을 강구했고, 장외라는 변수가 존재하는 이상 추구할 방법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숨겨둔 방법들 중 가장 확실하고 들켜도 별 부담되지 않을만한 것이 공력의 증진.
이미 수명을 조금씩 깎아먹으며 무공을 빠르게 익힌 혁련운.
그의 몸은 이미 혹사당할 대로 당했기에 수명을 부담으로 한 일시적인 증폭은 손해가 더 컸다.
-……위험에, 손을 대야 하나.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체내의 몇몇 혈도를 자극하여 내기의 순환을 더욱 빠르게 하는 것이었다.
광혈술(狂血術).
내기의 순환 속도를 올려 일시적으로 강해질 수 있었지만, 그렇게 얻는 강함에 비해 잃는 게 조금 많은…… 마교 병사들 최후의 수단 중 하나였다.
평소보다 빨라지는 속도에 혈관의 내벽과 몸이 버틸 수 없으며, 결정적으로 백회혈이 손상되며 뇌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물론 재능을 타고난 혁련운이라 하더라도 그 부작용을 피할 순 없었지만, 그는 타고난 신체와 마의에게 전수받은 의학으로 보완했다.
그렇게 효능을 조금 포기하고 신체에 가해지는 부작용을 제법 줄였으나 머리의 백회혈과 뇌에 가해지는 부담만큼은 어떻게 보완할 수 없었기에, 다소 이성이 맛이 간 광인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으어어어!”
다소 겉모습이 조금 흉하고, 불안정해 보였지만 혁련운의 움직임 자체는 절제되고 확실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비무대회를 참관 중인 무인들도, 그 점에 착안하여 아직 개입하지 않은 것이고.
‘겉모습은 광인이지만, 몸은 아직 제대로 움직인다. 내기가 일순 머리로 치민 것이겠지.’
‘삼공자께서, 마공에는 조금 익숙지 못하신 듯하군. 마의께서 부작용을 다스리는 방법을 차마 못 가르치신 건가?’
황종은 계속해서 혁련운과 합을 나누다가, 이대로라면 밀릴 것을 직감한 건지 비장의 수를 꺼내 들었다.
“제길! 받아라! 흑사풍!”
얇고 부드러운 가죽을 잘 가공하여, 주머니의 형태로 만든 뒤 그 안에 독을 담아 입 안 공간에 머금다 결정적 순간에 터트린 뒤 내용물을 뱉는 흑사방의 비기.
사실 비기라고 쓰고 치사한 수법이라고 읽지만, 사파에게 있어서 최후의 일격을 위한 장치는 얼마든지 허용되었다.
푸화악-!
황종은 입에서 검은 물을 뿜어내어 혁련운에게 적중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미 사전에 얘기해 둔 부분이었으니, 독은 간단한 산공독이나 마비독의 수준에 그쳤다.
입에 머금는 특징 때문에 시전자도 약간 흡입하게 되지만, 흑사방의 기본 수련 중 독 내성 수련 또한 있었기에 황종은 버틸 만했다.
“이제 이걸로 끝이다! 쌍두사격!”
검은 독이 혁련운의 얼굴을 뒤엎는 데 성공하자, 독은 몰라도 시야 차단은 확실히 했다고 판단한 황종은 재빨리 도를 휘둘렀다.
머리가 두 개 달린 뱀이 양쪽을 동시에 베어 무는 듯, 빠르게 좌우로 도를 휘두르는 황종.
여기까지만 본다면, 누구라도 황종의 승리를 점쳤겠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탁, 채앵!
“후우…… 산공독에, 마비독인가. 정신이 좀 드는군.”
양쪽에서 거의 동시에 날아드는 도를 오른손으로 튕겨 내며 왼손으로 얼굴의 독을 닦아 내는 혁련운.
“어떻게……?!”
당황해하는 황종의 앞에서, 혁련운은 독을 닦아 낸 왼손을 그대로 황종의 복부로 뻗었다.
“일단…… 승리부터 챙겨야겠지. 타진장.”
자신에게 날아오는 혁련운의 묵직한 일격을 막기 위해 황종은 도를 몸 쪽으로 끌어왔다.
하지만 직선으로 나아가던 혁련운의 타진장은 그 경로를 순간적으로 변화시켜 좌우로 꺾였고, 이내 황종의 도를 피해 몸을 가격하는 데 성공했다.
뻐엉!
가죽 북을 힘껏 때리는 듯한,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흑표탐조……였나. 상당히 쓸 만하군.”
“어떻게, 어떻게 흑표탐조를…….”
“보고, 베꼈지. 그리고…… 독의 배합은 쓸 만했소. 내가 산공독에 대한 내성만 없었다면 그대가 이겼을 것을.”
“젠장…….”
황종은 중원 천지에 산공독에 대한 내성을 굳이 키우는 미치광이가 왜 있냐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털썩.
“스, 승자! 혁련운!”
“후우…… 다음번에는, 보완용 약에 산공독을 조금 섞어서 먹어야 하나…….”
패자인 황종을 직접 들어다가 무대 바깥으로 데려다 내려 준 뒤, 혁련운은 자신이 왔던 곳으로 걸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그에게 날아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휙!
척.
날아오는 물건을 잡아챈 혁련운.
“……수건?”
잠시 어리둥절하게 수건을 바라보던 혁련운은 그것이 날아온 방향을 보았고, 거기에는 적당히 얼굴을 가린 채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귀인…….”
그 정체가 영의란 걸 곧바로 꿰뚫어 본 혁련운은 그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낸 뒤, 그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 여러 처자들이 가슴을 부여잡게 되었지만, 그건 혁련운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영의는 혁련운이 자신에게 웃어 보이자, 눈에 띄기 싫어 곧바로 대회장을 빠져나갔다.
“자! 3차 예선이 모두 끝났소! 이상, 140명의 후기지수들은! 내일, 용봉비상전의 본선에서 최선을 다해 맞서 싸울 것이오! 용봉비상전의 우승자에게는 영약을 비롯한 엄청난 보상이……!”
대회장을 빠져나가는 영의의 뒤로, 용준의 인사말과 함께 2차 예선의 종료가 선언되었다.
* * *
2차 예선 종료 이후, 후기지수들은 내일 있을 본선을 대비해 가벼운 수련이나 여독을 푸는 등의 이유로 각자 몰려다니거나 개인적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빙화를 봤나?”
“아아, 엄청나더군.”
“엄청난 미인이었지…….”
“엄청난 고수이기도 했고…….”
객잔에 모여 앉아, 만두 한 접시 시켜 놓고 술을 들이켜고 있는 예선 탈락 후기지수들.
“흑사방의 황종이란 녀석이 껄떡거리다가 하반신이 얼어붙었었다며?”
“음, 하마터면 그대로 내관으로 취직할 뻔했다지.”
“마화는 어떤가?”
“음…… 마교의 공녀 말인가? 확실히, 객석 먼발치에서 보기만 했는데도 바로 알아보겠더군.”
“근데, 차마 접근할 수가…….”
“음, 그렇지…….”
혁련연화의 미모에 대해서는 확실히 감탄할 만하지만, 그나마 접근이라도 해 볼 수 있는 북주혜와 달리 그녀는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비무대회에 참전이라도 한다면 무슨 구실이라도 붙여 보겠지만 단순히 구경을 온 것이었으니 언제나 호위에 싸여 있을 수밖에.
“매화도 나쁘진 않네.”
“화산의 진서유…… 음, 청순하고…….”
“성격도 좋다지……. 지나가면 정말 매화 향이 난다고들 하더군.”
한 명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때, 누군가가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솔직히, 나는 독화도 나쁘진 않다고 보네.”
그러나, 다른 모두는 그 말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건 나쁜 거네.”
“나쁜 게 맞네.”
“나쁘지 않다고 보는 자네의 눈이 나쁜 게 아닐까?”
그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던 이들이 있었는지, 그런 의견은 그들이 앉아 있는 탁자뿐 아니라 옆자리에서도 나오고 있었다.
“그건 당신이 이상한 게 맞소.”
“당가나…… 독을 전문으로 다루는 문파가 아닌 이상에야, 그건 좋지 않은 게 맞지.”
“나, 나만 이상한 건가? 나만 그 특유의 맹함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고양이 같은 매력이 마음에 드나?”
당세진도 독을 먹이려 드는 이상한 부분만 빼면 뭔가 고양이 같은 매력이 있는 여자였다.
알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아름다운 그런 매력이.
하지만 그런 좋은 부분이 있어도, 단점 부분이 너무 컸기에 사람들은 꺼리는 듯 보였다.
“그 부분은 우리도 괜찮다고 보지만, 마음에 드는 상대한테 냅다 독을 먹이려 하는 괴짜의 면모는…….”
“그리고 항상 붙어 다니는 오라비가…….”
이내 대화를 더 이상 이어 가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젓는 사람들.
“여자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누가 제일 유망주라고 보나?”
“오오, 그건 당연히……!”
사람들은 어느새 하나가 되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용봉비상전의 우승자를 예상하는 이야기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한편, 비무대회장에서 상당히 떨어진 산속.
객잔에서 지낼 돈이 없거나 객잔에 자리가 없는 무인들은 산속에서 자리를 잡고 야숙을 하고 있었다.
3차 예선 합격자인 신직 또한, 그런 무인들 중 한 명이었다.
“후우…… 여기서 좋은 성적을 내어, 월하장의 명성을 드높이겠다.”
이름난 문파는 아니지만 나름 명망 있는 무인인 스승의 아래에서 열심히 수련해 온 신직.
그는 스물다섯에 일류에 오른 나름의 수재로, 차기 장주로 평가받고 있었다.
“흐음, 마을에서 먹을 것이라도 사 올 걸 그랬나……? 배가 고프군.”
잠들기 전, 갑자기 느껴지는 허기에 문득 자리에서 일어선 신직.
그는 주머니를 뒤져 약간의 묵직함이 느껴지자 이내 마을로 잠시 돌아가기로 했다.
“내일이 본선인데 그래도 고기는…… 아니, 어차피 자고 일어나면 배가 꺼질 테니 간단하게 국수나…… 으음. 일단 얼마가 남았는지부터…….”
쩔그럭, 쩔럭.
신직은 내일 비무대회에서 자신에게 걸 돈과 아침 식사에 쓸 돈을 제외하고 쓸 수 있는 돈이 얼마나 될까 계산하기 위해 철전을 세기 시작했고, 도중에 은자 하나가 보이자 화색을 띠었다.
“아! 이 정도면 내일……!”
푸욱.
“어…….”
신직의 가슴팍에서, 피로 물든 누군가의 손이 튀어나와 있었다.
“미안하군, 마음 같아선 오늘 식사까진 하게 해 주고 싶었지만…… 더 이상 늦어지는 건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털썩.
짤그랑, 짤랑.
신직이 쓰러지며, 그가 들고 있던 철전과 은자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었지만 그 소리를 듣고 그곳에 찾아올 이는 아무도 없었다.
“후우…… 본래 주요 인물들의 동향만 신경 쓰려 했다만, 오백년하수오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는 손에서 불을 만들어 내더니, 신직의 몸에 붙이고는 이내 그의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