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0화 (11)
금방이라도 칼부림…… 아니, 검강부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정, 사파의 무인들은 독고휘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가 젊어진 것을 보고 반로환동의 경지에 올랐으니 마교와 싸워도 승리할 것이라 확신했었다.
그러나 비무대회에 모습을 드러낸 혁련무강 또한 독고휘와 비슷할 정도로 젊어진 상태였고, 그 결과 승패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지금 또한, 인원수가 한 명 정도 차이 나지만 상성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전장 자체를 장악할 수 있는 천마군림보의 압력을 독고휘가 막고는 있지만, 제대로 싸움을 시작한다면 그것을 막아 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닥에 쓰러져 있는 고수들이 하나둘 일어났지만, 그들은 차마 앞으로 나설 수 없었다.
아니,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검에 손을 올린 채, 누구 하나가 움직이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태극검 운광.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며, 상대 쪽에 있는 권마와 눈싸움을 하고 있는 권왕 팽소운.
인자한 웃음을 거두고, 싸늘한 눈빛으로 마교 쪽을 쳐다보며 주먹을 쥐는 신승 혜윤.
숨을 쉴 때마다 조금씩 덩치가 커지며, 옷이 팽팽해지기 시작한 패왕 갈성천.
그에 맞서서, 마교 측의 고수들도 각자 화답하듯 반응을 보였다.
“운광…… 운광……!”
아주 작게 중얼거리며, 검의 손잡이를 연신 잡았다 놓는 것을 반복하는 검마 혁련무성.
뚜둑, 뚝.
손가락 관절을 뚜둑거리고 손목을 돌리며 몸을 푸는 권마 강자성.
스륵, 슥.
천에 감긴 무언가를 꺼내더니, 거기에 감긴 천을 풀어내 식도를 드러내보이는 폭혈도, 장화관.
그 식도는 무기로 쓰기에는 적합해 보이지 않았지만, 거기에 서린 예기와 살기만큼은 이름 높은 명검 못지않았다.
‘역시 엄청난 기세로군, 절대고수들이 이렇게 모인 것을 보다니…….’
‘목숨이 달아날 판인데 감탄할 때인가?!’
‘검강을 뽑는 것도 최후의 일격이나 기습용으로 하는 우리가 저기서 무슨 수를 쓰겠나?’
이곳에 모인 이들은 검강을 쓸 수는 있지만, 눈앞의 고수들처럼 검강의 탑재를 기본 전제로 하지는 않았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벌어지면 도망치는 것을 고려하고 있는 이들.
물론 초절정들이 모여 있으니 떼로 덤벼든다면 화경의 무인을 이기는 것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저들은 화경 중에서도 극에 달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난전에서 가장 흉악하고 강한 위력을 발휘해 악명 높던 신승과 폭혈도가 대치 중이었으니 뭔가 할 방법도 없었다.
‘내 사백님께서 폭혈도와 신승의 싸움에 휘말려 돌아가셨지. 저 둘 앞에서는 같은 화경도 죽어 나갈 거요. 도망치는 게 낫소.’
‘그럼 사문의 원수가 아닌가? 복수를 해야 하지 않나!’
‘그것도 딱히 원수는 아닌 게, 스무 장(60m) 밖에서 날아온 검기와 권기에 맞고 절명하셨소. 피하면 될 것을 굳이 호신강기로 막으려다 돌아가셨다고 들었지.’
‘……그냥 복수하기 무섭다고 하게.’
‘사실 무섭소. 그것도 엄청나게.’
눈먼 공격에도 사람이 죽어 나가는 치명적 일격만 골라서 하는 둘은, 마주한 채 으르렁거리는 다른 이들처럼 서로의 기세만 끌어 올리고 있었다.
“…….”
“…….”
하지만 그런 이들과 달리, 정작 가장 치열해야 할 수장 둘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독고휘. 정말 보고 싶었다. 지난 수십 년간 네놈을 생각했었지.”
“본좌는 사내놈과 연정을 통하는 그런 괴악한 취미가 없다.”
“이런, 그렇게 나올 건가?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는, 할 이야기가 한두 개가 아니란 걸 잘 알 텐데……!”
혁련무강은 독고휘에게 이런저런 감정이 쌓여 있었지만, 방금 전 영의의 행동을 보고 그 감정이 안 좋은 쪽으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손을 쓰진 않을 거다. 본좌와 네놈, 둘의 승패를 제대로 가리기 위한 무대를 앞두고 그걸 무산시킬 정도로 우매하진 않으니까.”
둘이 서로 대치하며 대화만을 나누고 있을 때, 뒤늦게 상황 파악과 인원 구성을 마친 각 세력의 정예들이 달려왔다.
“……윗세대의 일 때문에, 후기지수들까지 쓸데없는 분쟁을 일으킬 필요는 없겠지? 일단은 물러나서, 젊은 녀석들끼리 겨루는 거나 보며 만족하고 있자고.”
“교는…… 우리는 지지 않을 거다. 한번 보도록.”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자, 사안이 커지는 것을 걱정한 독고휘가 먼저 물러나는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혁련무강 또한, 무슨 생각에선지 그 제안에 응했고.
‘……네 녀석, 나중에 따라오너라.’
하지만 둘은 물러나는 와중에도 영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둘이 동시에 영의에게 전음을 날렸다.
“검황님! 괜찮으십니까! 여기서 아주 마교 녀석들을 작살을……!”
“지존이시여! 여기서 중원의 녀석들을 깡그리 도륙을 내고……!”
각 세력의 혈기 넘치는 이들이 달려오며 외치는 소리에, 험악했던 분위기의 고수들은 그들을 진정시키려 급히 그들을 붙잡았다.
“진정하게, 우리가 나설 부분이 아니야!”
“내 저 마교 놈들 저럴 줄 알았어!”
정, 사파들은 다소 잡음이 있었지만 마교 쪽은 혁련무강의 명령 한마디에 모두가 고개 숙인 뒤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간다.”
“존명!”
다만, 돌아가는 와중에도 서로 노려보는 이들이 있었다.
“운광…… 두고 보자…….”
“저 검마 놈…… 언젠가는…….”
그렇게 생긴 작은 다툼 위기는 독고휘의 명령으로 인해 대외적으로는 마교 쪽 인사와 사파 쪽 인사의 사소한 시비로 바뀌어 알려졌다.
사람들은 그 소식에 정마대전이 다시 일어나거나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 대신, 오히려 안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 오히려 싸움이 안 난 게 특이했다.
-어쩐 일로 마교가 너무 평화롭게 나온다 해서 함정인 줄 알았는데, 나름 참고 있던 거였구나.
어차피 정마대전도 상호 간의 세력 싸움이 아니라 천외천의 고수끼리 맞붙는 일기토가 된 지 오래였고, 사람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전쟁에서 완벽히 승리하려면 세력과 병력이 많아야겠지만 고수들끼리는 서로가 비등하여 전황을 압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소한 다툼이 하나 생기고 나자, 비무대회의 분위기는 다소 안정되었다.
그러나 안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 또한 있었으니…….
“영의, 이 녀석아. 말을 해 봐라!”
“이봐, 약속한 게 있지 않았나!”
바로 독고휘와 혁련무강이었다.
“이 자식이? 본좌가 먼저 침 바른 녀석이다!”
“본좌는 천마군림보까지 전수해 주었다. 제자나 다름없지.”
대치 상황 이후,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진 영의는 몰래 빠져나와 독고휘가 머물던 별채로 향했고 거기서 둘을 만나게 되었다.
정확히는, 둘이 그곳으로 도망친 영의를 쫓아온 것이지만.
“본……. 에이, 나는 이미 제자란 확언까지 받았어!”
“그 제자란 것, 앞에 임시가 붙지 않나? 본좌는 그렇게 들었다만.”
아까야 사람들 앞이었으니 서로 체면을 세우며 멋진 모습만을 보여 주었지만, 지금은 서로 거리낄 게 없으니 다소…… 유치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둘.
“그보다…… 두 분, 아까는 피 터지게 싸울 것 같더니 지금은 음…… 평소 같네요.”
“그거야, 보는 눈이 많으니까 그렇지. 나는 이래 보여도 검황이며, 또 정파에서 알아주는 고수이자 협객이었지.”
“저놈이 협객이 아니란 건 자네도 알지 않나? 본좌는 비록 마인들의 정점에 서 있지만, 적어도 치졸하게 살아온 적이 없다는 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네.”
“치졸이라니, 내가 언제!”
“하, 과거를 부정하는 건가?”
보는 눈이 있을 때만큼은 천마와 검황이란 이름에 걸맞은 고고하며 품위 있는 무인이었지만, 보는 눈이 없어지자 거리낌이 없어져도 너무 없어졌다.
“후우…… 그래서, 저를 찾아온 이유는요?”
“제자를 강요하지 않겠다고 말은 했지만, 적어도 내 가르침은 받았다고 공언하러 왔지. 뇌기를 다루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 최소한의 변명거리는 필요할 게 아니냐?”
“본좌는 제자니 뭐니 강요하거나 저렇게 은근히 들이밀지 않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연화를 어떻게 생각하나?”
은근 슬쩍 영향력을 강화하려 한 독고휘와 그를 비웃듯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혁련무강.
“이 자식이?! 치사하게 미인계를!”
“그럼 예쁘고 참한 딸을 하나 낳지 그랬나.”
독고휘의 슬하에는 아들밖에 없었기에, 차마 혁련무강의 수법을 따라 할 순 없었다.
“그, 그렇지. 팽가의 딸들이 제법 참하니…….”
“그게 본인 딸인 줄로 아는건가? 참으로 딱하군.”
또다시 유치한 모습을 보여 주기 시작하는 둘.
하지만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질린 영의는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두 분 싸우는 게 재미는 있지만,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죠. 진짜 목적이 뭐죠?”
“밥 좀 줘.”
분명히 독고휘에게 빵과 술을 준 적이 있었건만, 갑자기 다시 달라는 이야기를 듣자 영의는 당황했다.
“어제 드린 간식은요?”
“하나만 먹었는데 소운이 녀석이 다 털어 갔다.”
유감스럽게도, 독고휘 나름대로 아껴 먹겠답시고 하나만 먹고 남겨 뒀다가 팽소운이 남은 빵들을 홀랑 다 먹어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둘 사이에 뭔가 오간 게 있어 보이자 혁련무강마저 당황했다.
“본좌 몰래 뭘 줬나?!”
“와…… 그 영감님, 그걸 혼자 다 털어 먹었네.”
“본좌 몰래 뭘 줬느냐?!”
혁련무강이 두 번째로 물어 오자, 영의는 비로소 그를 눈치채고 대답해 주었다.
“아, 네. 뭐 이것저것…….”
“그래…… 그것을 탓하지는 않겠다. 독고휘를 본좌보다 좀 더 오래 보긴 했을 테니, 그만큼 쌓인 정도 있었겠지……. 본좌는 요리만 있으면 된다. 그보다, 정말 연화에 대해 별다른 마음은 없느냐?”
혁련무강이 연화를 은근히 밀어주는 동시에 치킨을 요구하고, 독고휘도 그것을 은근 견제하면서도 영의의 음식을 더 신경 썼다.
“이 자식……. 아무튼 일단 요리부터 꺼내 보거라. 셈은 비무대회 보상으로 걸어 놨다. 알아서 가져가거라.”
그리고 셈을 비무대회의 보상으로 걸어 뒀다는 이야기에 영의는 놀랐다.
“네? 보상요?”
‘뭐지? 방수기함 열고 알아서 가져가세요 그런 건가?’
“그래, 비무대회…… 용봉비상전 우승 상품으로 전에 말한 오백년하수오를 걸어 두었다.”
“독고휘, 그게 네놈 거였나……?! 언제 그런 걸 얻었나!”
“산에서 풀뿌리 캐 먹다가 얻었다. 그보다, 네놈은 뇌령조의 내단 일부를 걸었지?”
“……그렇다. 아무리 본좌의 아들들이 나간다 해도 이 녀…… 아니, 이 친구가 나가는 이상 우승은 못하니까. 선물인 셈 치는 거지.”
이제 대략적인 설명이 끝났다는 듯, 독고휘는 영의에게 손짓했다.
“그래…… 그러니까, 일단 요리나 줘 보거라. 비무대회 동안은 기대해도 되겠지?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자꾸나.”
“먹으면서 얘기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리고 그 두 개 중 하나라도 팔면 방 하나를 금으로 채울 수 있을 거다. 요리의 셈은 치르겠지.”
두 노인의 계속되는 요구에, 영의도 포기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후우…… 그래요. 일단 먹으면서 얘기하죠.”
후룹, 후웁-!
쩝쩝.
각자의 요리를 신명 나게 흡입하고 있는 두 노인을 앞에 둔 영의.
“그보다, 왜 드시던 것만 드시는지……?”
혁련무강은 계속 양념치킨을 뜯고 있었고, 독고휘는 꿋꿋이 짜장면을 흡입하고 있었다.
영의가 그 이유에 대해 물어보자, 둘은 이렇게 답했다.
“저놈이 이 요리의 멋짐을 알 리가 없으니까.”
다른 것에 대한 관심을 보일 법도 했지만 가장 싫어하는 이가 먹는 것이라 그런지 먹고 싶어도 굳이 안 먹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흐음…… 네. 그럼 일단 드시면서 제 얘기 좀 들어 주세요.”
끄덕끄덕.
먹으면서 얘기하자고 한 둘이지만 정작 먹느라 바빠서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영의는 둘이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지금 비무대회에 무슨 암중 세력의 끄나풀이 하나 있어요. 세상천지를 혼란하게 만들려는 미친놈들 집단인데.”
영의가 갑자기 암중 세력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자, 두 노인은 먹던 것을 멈추……진 않고 입을 바삐 움직이며 대답했다.
“흠흐흐(뭐라고)?!”
“그, 드시고 말하세요.”
영의가 다 먹고 말하라고 했으나, 별채의 방 안에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보거라.
-암중 세력이 뭐라 하였느냐?
전음 대신, 어기전성을 사용하여 대화하는 둘.
둘은 그 와중에도 입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영의는 그 모습을 보며 일단 설명부터 다 해 놓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 설명하기 이전에 다 먹을 것 같은데?’
두 노인은 젊어진 겉모습에 걸맞게, 엄청난 먹성을 실시간으로 자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