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2)
비무대회는 두 개로 나뉘어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무림명숙이나 이름 날리던 고수들의 복수전 겸 명성 증명 겸…… 이 대회의 메인이벤트 매치가 될 예정인 용호박투전.
그리고 비무대회라는 것의 본래 의의에 초점을 맞춘, 무림초출이나 명성을 그리 날리지 않은 젊은 후기지수들을 위한 용봉비상전.
정파의 이름 있고 유망한 후기지수들에게 붙였던 용이나 봉의 칭호를, 비무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낸 이들에게 붙이기로 한 것이다.
실제 용호박투전에 참여하는 이들 중에는 옛 정사칠룡의 구성원들도 있었고, 그들 모두 쟁쟁한 강자였기에 용호상박이라는 말이 제법 어울려 그리 작명하였다.
그러나 용호박투전이 만들어 낼 부작용이나 생사결 또는 승패 불복과 같은 우려가 있었기에, 그 용호박투전은 용봉비상전이 끝난 이후에 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이름난 무인들이 나서는 용호박투전은 조건 자체가 이름난 강자인 만큼 별다른 접수 과정이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용봉비상전은…… 상당한 부작용이 뒤따랐다.
당장 접수에서부터 혼란이 빚어졌고, 은자 하나라는 비싼 참가비에도 불구하고 참가 희망자의 수가 너무 많아 잠시 업무에 마비가 빚어졌을 정도로.
접수 희망 인원은 시간이 지나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아, 석양이 지고 있을 때에도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북새통과도 같은 접수처에, 영의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비켜 주세요, 지나갈게요!”
예의를 갖춰 양해를 구했지만, 젊은 혈기 탓인지 시끄러운 분위기 탓인지 누구도 비켜 주지 않았다.
결국 한 명 한 명 직접 옆으로 젖혀 내며 인파를 뚫고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영의.
진작에 뇌섬문이든 마교의 일행이든 한쪽이라도 찾아갔더라면 이런 귀찮은 일은 피할 수 있었겠지만, 괜히 혼자 뭘 해 보려다 이렇게 됐다.
‘알림아, 이런 게 있다면 얘기를 해 줬어야지!’
영의는 이런 고난이 시작부터 존재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고, 알림이에게 약간의 불평을 했다.
[사용자의 능력이 있다면 별다른 문제 없이 접수가 가능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실제로 무력으로 밀어내고 접수를 한 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림이는 도리어 영의가 굳이 힘든 길을 선택하고 있다고 얘기했고, 첫 접수가 무력으로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긴 했다.
“에이, 진짜!”
영의는 알림이의 말에 약간 짜증을 내며 앞에 뭉쳐 있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옆으로 밀쳐 내기 시작했다.
진작 남들을 밀어내고 접수를 할 만큼 강한 이들은 진작에 접수들을 끝내 두었고, 명성 있는 문파에 속한 후기지수들은 이미 문파에서 접수를 끝내 두었다.
결국 영의와 경쟁하고 있는 이들은 힘없는 문파의 힘없는 후기지수들이었으므로 영의는 어렵지 않게 이들을 밀어내고 접수할 수 있었다.
“네, 접수하실 겁니까?”
업무를 시작한 지 채 반나절밖에 안 됐지만 엄청난 마음고생을 했는지 초췌해진 얼굴을 하고 있는 접수처의 인원들.
“네.”
영의는 그런 인원들을 조금 불쌍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그들의 일이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지역하고…… 문파…… 이름을 말해 주십시오…….”
“지역은…… 없고, 문파도 없습니다. 이름은 최영의.”
오늘 하루만 해도 이런 이들을 한두 명 본 게 아니었기에, 접수처에 앉은 남자는 기계적으로 모든 것을 받아 쓴 뒤 인장이 찍힌 종이를 영의에게 건넸다.
“네……. 재여의 님…… 끝났습니다……. 접수 확인처에서 참가비만 내면 됩니다……. 다음…….”
접수처의 남자는 피로에 찌든 탓인지, 이름을 잘못 표기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영의는 그걸 뒤늦게 알아채고는 남자에게 항의했다.
“어? 잠깐, 이름이 다른데요?!”
물론 이런 경우도 한두 번 있었던 게 아닌지, 접수처의 남자는 무표정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확인처에서…… 변경하세요……. 다음…….”
“아니, 그게 무슨…….”
영의가 접수처에 불만을 쏟아 내려 할 때, 영의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조언을 하는 남자가 있었다.
“이봐, 형씨. 여기서 자기 이름 제대로 받아 간 사람 별로 없어. 아까 정양(情陽)이란 사람은 정양(正羊)이라고 써진 채로 받아 갔다니까? 여긴 빠르게 받아쓰는 게 더 중요해. 인장은 확실하게 있고, 발음도 비슷하니 별문제 없이 받아들여질 거야.”
확실히, 접수할 때에 중요한 건 인장이었고 확인처가 이곳보다 조금 더 여유가 있으니 그곳에서 이름을 변경해도 된다.
“흠, 그게 맞는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뭘, 다른 쭉정이들 밀쳐 내는 걸 보니 형씨도 제법 한가락 할 것 같으니까. 예선에서 기대하지.”
영의는 남자의 조언이 충분히 그럴듯하다고 생각하였고 이내 인장이 찍힌 종이를 받아 든 다른 이들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래, 뭐. 정식으로 등록할 때 정확하게 하면 되는 거겠지.’
생각을 조금 전환하자 마음도 가벼워진 영의는 발걸음도 함께 가벼워졌다.
하지만 그런 영의의 발걸음도 접수 확인처에서 급히 가로막히고 말았다.
“은자…… 은자 하나라…….”
금화나 마정석은 가지고 있었지만, 은자만큼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영의.
다른 참가자들이 아깝다는 표정이나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은자나 그에 상응하는 철전 주머니를 접수 확인처에 내놓고 이름과 소속을 표기해 갈 때, 영의는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젠장…… 어떡하지……?”
물론 저기 쌓인 은자 더미와 그 아래 있는 궤짝으로 봐서 환전이야 충분히 가능할 듯싶었다.
하지만 영의는 여기서 아리안델의 금화를 냈다가 괜스레 이목이 끌리게 되는 것이 껄끄러웠다.
‘지금 그냥 뇌전으로 지져서 금덩어리로 만들어 버려? 아니, 그러면 너무 아까운데.’
정말 급박한 상황이면 그런 선택지를 고를지도 모르겠으나 접수 기간은 해시, 즉 자정까지였고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기에 시간적 여유는 충분히 있었다.
‘아, 그래. 이렇게 사람들이 많으면 환전 같은 걸 해 줄 곳도 있을 텐데.’
영의는 문득 현물이나 고액의 물품을 바꿔 줄 만한 곳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떠올렸고, 이내 그런 장소를 찾기 위해 접수처의 바깥으로 나가려던 순간 누군가와 부딪쳤다.
퍼억.
철푸덕.
“윽.”
양쪽 다 예상치 못한 사고였으나 영의는 멀쩡했던 반면 부딪친 상대는 바닥에 넘어졌다.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 응?”
이내 영의는 바닥에 넘어진 상대를 일으켜 주기 위해 손을 뻗었고, 그때 상대방의 얼굴을 목격하였다.
한번 보면 잊기 힘들 것 같은 미남의 얼굴에다 고급진 검은색 비단옷.
옆구리에는 책을 하나 끼고 있었고…… 무엇보다, 과거에 한번 만났던 인물이다.
“……천마 영감님 막내아들?”
영의와 부딪친 것은 혁련무강의 아들인 혁련와룡이었다.
“어, 어어? 귀……인이시군요.”
누이와 이복형이 그러하듯, 영의를 귀인으로 부르는 와룡.
“너도 그렇게 부르냐……. 아무튼, 여기엔 왜 온 거지? 무공엔 별로 재능 없다고 들었는데.”
영의는 와룡이 어째서 이런 곳에 온 건지 의문을 품었다.
“무공에 재능이야 없습니다만, 지금 이 순간도 수련을 하고 있는 형님들에게 대진 목록을 가져다 드릴 순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중원을 구경해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와룡에게 말을 놓고 상당히 편히 대하는 영의였지만 와룡은 영의에게 예를 갖추며 존대까지 했다.
문득, 자신에게 존대하며 예를 갖추는 와룡을 보자 뭔가가 떠오른 영의는 와룡의 어깨에 손을 걸쳤다.
“그래……? 그보다, 잠깐 나 좀 따라와 봐.”
“에…… 예? 저, 저는 참가자들의 목록을 구해 가야……!”
갑자기 영의에게 끌려가기 시작하자 와룡은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에게 붙은 호위를 찾기 위한 행위였지만, 어째서인지 그를 지키기 위해 나타나야 할 호위들은 곧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건 좀 나중에 해도 되니까. 따라와 봐.”
영의는 와룡을 인적이 드문 으슥한 골목으로 데리고 갔고,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 같다는 판단이 서자 이내 본론을 말하기로 했다.
“……돈 좀 있냐?”
학창 시절, 직접적으로 한 적은 없지만 당해 보고(물론 박살 냈다) 목격한(마찬가지로 박살 냈다) 경험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금품 갈취를 시전하는 영의.
“예?”
“아니, 내가 그냥 달라는 건 아니야.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다?”
영의는 자신의 진심을 말하고 있었지만, 옆으로 보나 뒤집어서 보나 ‘그런 상황’에 걸맞은 ‘그런 대사’였다.
“어, 어어…….”
그리고 지금까지 귀공자로 살아온 와룡은, 갑작스러운 누군가의 금전 요구에 당황하여 어버버 하기 시작했다.
“그냥 까놓고 말해서, 은자 하나만 빌려줘. 너도 나 알고, 나도 너 알잖아? 못 할 사이는 아니지?”
“그게, 저…… 그러니까…….”
혁련와룡.
그의 나이 약관, 인생 최초의 금품 갈취를 접하다.
하지만 결과만 말하자면 영의는 와룡에게서 참가비를 대출(?)할 수 없었다.
“저, 죄송합니다. 귀인. 저는 은자 같은 작은 돈이 없습니다……. 호위들이 가지고 있어서……. 이런 건 어떠신지요?”
은자같이 사소한 푼돈(?)은 부잣집 중의 상부잣집인 마교의 도련님인 와룡에게는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는 금액이었고, 그에게 있는 돈이라고는 주머니 속의 금자와 금원보뿐이었다.
그걸 받았다가는 금화보다 더 이목이 끌릴 게 뻔했기 때문에 영의는 차마 와룡에게서 돈을 빌릴 수 없었고, 대신 선물을 하나 쥐여 준 뒤 돌려보내기로 했다.
“이거나 가지고 돌아가. 천마 영감님한테 주면 좋아할 거야. 그리고, 영감님한테 나 찾지 말라고도 하고. 내가 찾아간다고 해.”
영의는 적당한 술을 한 병 골라 전언과 함께 와룡에게 쥐여 주었다.
“와아……! 참으로 아름다운 세공입니다! 서역의 유리를 이만큼이나 아름답고 완벽하게 가공하다니!”
견문과 지식이 상당했던 와룡은 영의가 건넨 술병을 보자 곧바로 유리란 걸 파악하고 감탄했다.
“그래, 그래. 호위한테 데려다줄게. 아마 바닥에 쓰러져 있을 텐데.”
이내 와룡을 데리고 골목 바깥으로 나간 영의는 또 다른 골목으로 향했고, 거기서 바닥에 쓰러진 검은 옷의 무사를 찾아냈다.
“앗, 호위가 왜 여기에…….”
와룡을 주시하고 있는 호위가 있다는 걸 안 영의가 전룡과 뇌영을 시켜 삥 뜯기(?)를 하기 전 미리 기절시켜 두었던 것이다.
“내가 기절시켜 놨어. 조금 있으면 깨어날 거니까, 데리고 돌아가. 알겠지?”
“아, 네! 살펴 가십시오, 귀인!”
와룡의 인사를 받으며 환전을 해 줄 만한 장소를 찾기 위해 떠나려던 그 순간, 뒤에서 급히 달려온 와룡이 영의를 붙잡았다.
“귀인! 등록에 쓸 돈이 없으시다면 좋은 정보가 있습니다!”
“뭐?”
돈을 빌려주지 못해 미안하고 앞으로는 푼돈도 꼭 지니고 다니겠다는 말과 함께, 와룡은 영의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해 주었다.
“이름 없는 문파나 몇몇 도사들의 경우에는 금전의 여유가 없고 은자 하나가 큰 지출인 경우가 많으니 그런 경우를 대비해 시험을 치르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돈이 없는 사정이 있을 수밖에 없는 몇몇 도사나 승려, 가난한 문파의 무인들의 경우에는 은자가 큰돈이었으니 낼 수 없었고 그걸 편의로 봐주다가는 악용될 우려가 있었기에 별도의 시험이 하나 더 있다는 이야기였다.
와룡이 해 준 말에 따르면 접수 확인처의 뒤쪽에 있는 집의 마당에서 추가시험이 치러진다고 들었던 영의.
“……여기 어디였다고 했는데.”
영의는 그 집으로 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시험은커녕 사람 하나 없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진짜로 시험이 있는 거 맞아?”
와룡이 자신에게 거짓을 말할 리는 없었으니, 뜬소문을 잘못 들었거나 이 장소가 아닐 거란 생각을 하던 도중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났다.
“으아악!”
이내 집의 안쪽에서 문을 부수며 바깥으로 나가떨어지는 한 남자.
남자는 여기저기 기워 놓은 낡은 무복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계속할 테냐?”
집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남자는 바닥을 박차고 다시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합니다, 계속! 으아아아!”
그리고 그 광경을 본 영의는 곧바로 직감했다.
이 시험이란 게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시험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아, 뭔가 되게 귀찮을 것 같은데…….’
영의는 곧바로 금화를 냈을 때의 귀찮음과 이 시험을 치렀을 때의 귀찮음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저울질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