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23)
지금으로부터 13개월 전, 남미의 유명 A급 각성자 ‘마체테’ 호세 세르반테스의 사망.
사망 원인은 누군가의 암살.
평소 범죄행위를 밥 먹듯 하고, 카르텔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그였기에 암살당한 것이 논란은 되었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 지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오래 이어 가는 각성자는 없었으니까.
12개월 전, 영국의 ‘채리엇’ 존 베넷의 사망.
원인은 위의 사례와 동일한 방식의 암살.
그는 평소에 행실이 바른 신사와도 같은 남자였기 때문에 큰 논란이 되었으나 영국 의회와 왕실은 모든 힘을 동원해 그 사건을 묻어 버렸다.
집 안에서 사망한 그의 시체 옆에 그가 몰래 저지르고 있던 범죄와 치부에 관한 증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7개월 전, UAE의 ‘알라의 전사단’ 간부 4인의 사망.
모든 것이 동일했고, 그들이 ‘이단 심문’이라는 명목 아래 가톨릭 성직자들을 납치하여 고문 후 살해했다는 증거가 대낮에 길거리에 뿌려지며 그 실체가 드러났다.
그리고 얼마 전, 러시아에서 ‘그리즐리’ 이반 페콜스키의 사망 및 치부 유출.
이번에는 암살과 동시에 증거들을 인터넷으로 방송하며 뿌려 버렸고, 전 세계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며 문제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상이, 지금까지 한 인물…… 또는 한 단체에서 지속적으로 일으킨 암살 행위의 보고서이며, 저희는 그것을 테러로 규정하기로 했습니다.”
한 방에 정장을 입은 남성이 프로젝터로 하던 발표를 마쳤고, 그와 동시에 각 통역사들이 통역을 했다.
이곳은 회의실이었지만, 보안상 문제로 실제 사람은 통역사들과 발표자인 남성뿐이었다.
그리고 그 발표들을 자리에 앉아 지켜보고, 고민하기 시작한 세계 각국의 정상들.
“그래서…… 이걸 UN에서 우리를 모아다가 발표한 이유가 뭐지?”
이 자리에 모인 인물들 중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할 정도의 인물은 없었지만, UN이 추구하는 목적을 확실히 하기 위해 묻는 미국 대통령.
“또 다른 피해를 막기 위해…… 그리고, 범인들이 점점 과격하게 변해 가기 때문입니다.”
지속되는 암살을 막아야 하는 건 당연한 문제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게 죽음으로 심판하는 방식은 옳지 않다.
“지금 범인은 범죄를 저지른 유명 각성자들을 암살한 뒤, 그들이 저지른 범죄의 증거를 뿌리는…… 일종의 의적이나 영웅과도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UN의 남성이 암살자를 영웅이라고 말하자, 영국 쪽에서 발끈했다.
“그놈을 영웅이라 말하는 건가!”
“진정하십시오. 그런 흉내를 낸다는 겁니다. 비록 죽은 이들이 범죄자일지라도, 각 국가에서는 소중한 인재고 또 적합한 법의 심판을 받았어야 할 사람들이니까요.”
그들이 잘못한 건 맞지만 적법한 재판과 절차를 거쳐 법으로 심판하는 것이 옳았다고 말하는 UN 측의 남성.
“그렇긴 하지.”
영국의 수상은 고개를 끄덕였고, 각국 정상들도 각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들도 어느 정도는 고위 각성자들의 일탈을 알지만 눈감아 주는 경우가 있었고 때로는 그걸 약점으로 이용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제로 각성자들의 범죄가 발각되더라도 적당히 거래를 하여 중간에 풀어 주거나 편의를 봐줄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몇몇 국가는 그런 마음이 없었으니, 대표적으로 러시아와 중국이었다.
“러시아는 그 범인 놈을 잡으면 재판이고 뭐고 사형을 할 예정이다.”
그리즐리가 죽었다는 그 사실이 더욱 화가 나는 것인지 암살자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러시아의 대통령.
“중국은 그런 적이 없고, 그럴 일도 없으니 빠지도록 하겠소.”
암살당한 적도, 암살을 당할 일도 없을 거라며 적당히 여기서 빠지려 하는 중국.
“글쎄…… 특무대와 그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보가 조금 있는데, 각국이 극비로 해 온 정보까지 아는 암살자가 그걸 모를 리가 없지 않나?”
미국은 중국이 빠지려 하자, 그 발목을 곧바로 낚아챘다.
“우리는 그런 바 없소.”
“다들 솔직하게 임하도록 하지. 정말로, 모를 리가 없지 않았나? 국가에서 은폐를 도우기도 했을 테고, 각성자들도 멍청하진 않으니 알아서 최대한 숨겼을 텐데.”
‘저쪽은 오히려 장려했을 것 같긴 하지만…….’
미국의 대통령은 그 말을 하며 UAE 측을 살짝 쳐다봤다가 이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여기, 녹화는 안 되지 않나?”
대통령의 질문에 UN의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녹화나 녹음은 없습니다.”
“좋아, 그럼 솔직하게 가진 정보들을 털어 보고 얘기하지. 우리는 패트리어트가 있고 그 생활도 건실해서 걱정할 게 없지만 다른 부분은 걱정이 되니.”
의외로, 패트리어트라는 믿음직한 각성자가 있음에도 미국이 협조적으로 나오는 듯하자 다른 국가들도 조금씩 눈치를 보며 끼어들기 시작했다.
‘저번에 마약 살인 건을 정부에서 뒤를 봐줬다는 게 들키면…….’
‘가장 강력한지 아닌지는 몰라도, 가장 튼튼한 각성자 중 하나인 그리즐리가 죽었다. 암살자가 얼마나 강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벙커에 숨었을 때 그 문을 도려낼 정도겠지.’
‘토르를 영입하긴 했는데…… 기행을 일삼긴 해도 범죄는 안 했겠지……?’
각 국가의 수뇌들은 암살자의 정보 수집 능력과 암살 능력이 두려웠고, 강함으로 손꼽히던 각성자들도 살해하는 암살자를 자신들이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죽기 전에 암살자, 또는 암살자들을 잡아내는 것.
그들은 이내 상당히 긴 시간 동안 회담을 이어 나갔고, UN 측은 이럴 거란 예상을 한 건지 각국의 A급 이상 각성자 명단을 뽑아 놓고 자료를 대조하는 등 협조를 했다.
3시간 뒤.
“그럼…… 결론이 대충 나온 건가.”
미국 측이 회담을 끝내려 했고, 각 국가들도 이제 결론에 다다르자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정보력을 동원하도록 하지.”
“우리는 거리가 멀어서 힘들지만…… 그 나라에 관련된 비자를 취소하겠다.”
UN의 회의실 내부 프로젝터에서는 은색의 헬멧을 쓴 한 남자의 사진을 비추고 있었고, 각 국가의 수뇌들이 거기에 이것저것 주석을 단 듯 여러 가지 메모가 써져 있었다.
-근래에 갑작스럽게 활동 시작.
-그리즐리가 암살당했을 당시 과격해진 행보와 비슷한 시기.
-똑같이 영웅적인 행보, 그리즐리와 동급 또는 그 이상으로 평가받던 ‘권왕’과 대등하게 싸움.
-이동 경로나 정보 수집 방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한 시간 준수와 이동 속도.
“그럼, 지금부터 인터폴에 이 인물에 대한 국제 수배 협조를 요청하도록 하겠습니다.”
UN의 남자가 서류들을 정리하며 말하자, 몇몇 국가의 수뇌들이 조건을 걸기 시작했다.
“우리 UAE에서는 현상금을 추가로 걸겠소. 체포해 온 사람에게 10년간 연 수입의 0.1%를 떼어 주도록 하지.”
거리가 멀어 정보 수집이나 수사는 힘들지만 비자 취소와 현상금을 거는 UAE.
사실 국제 수배범이라 해도 체포하는 위험성에 비해 포상금은 적은 편이었다.
그렇게 점점 더 매혹적인 조건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체포에 필요한 핵심 정보를 제공하기만 해도 시민권과 세금 감면 및 연금을 보장하겠소. 핵심 정보의 기준은 FBI나 CIA에서 제보받던 기준을 적용하지.”
“영국은 그 모든 것에 귀족 작위와 훈장을 수여하겠습니다.”
그 뒤로도 이런저런 조건들이 걸렸고, 사상 최대의 현상금이 걸린 수배범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용의자일 뿐, 범인이란 확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수장들은 은색 헬멧의 남자가 범인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럼, 회담을 종료하도록 하겠습니다.”
UN 측에서는 모든 정보를 종합한 뒤 회의를 끝낸다고 선언했고, 각국 정상들도 그 말 이후에 연결을 끊기 시작했다.
백악관.
미국의 현 대통령 고든 맥클레인은 방금 전까지 업무용 컴퓨터로 하던 회담을 끝낸 뒤 곧바로 자신의 노트북을 꺼냈다.
“용의자 특정…… 각국 협조 요청…… 인터폴 수배 내림. 한국에서 자주 목격됨. 한국에 추가적인 압박. 중국, 경고했음에도 중간에 빠짐…….”
고든은 방금까지 회의를 하며 나왔던 내용들을 정리하듯이 상세하게 기록하기 시작했고, 그의 옆에서 대기하던 비서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역시, 새벽까지 한 회담에 피곤하실 텐데도 곧바로 회담 내용을 정리하시다니. 우리한테 맡기셔도 될 텐데.’
비서들에게 맡겨도 될 회의 내용을 스스로 기록하고 정리하는 것을 보며 비서는 자신이 모시는 대통령에게 감동하고 있었다.
“음, 미안하지만 지금부터는 나가 주지 않겠나? 내 개인적 견해를 조금 써야 해서 말이네. 특히, 중국에 대해서.”
“아, 네. 알겠습니다.”
고든은 비서에게 개인적인 내용을 써야 하니 집무실에서 나가 달란 요청을 했고, 비서는 곧바로 바깥으로 나갔다.
애초에 업무용 컴퓨터와 노트북을 따로 쓸 때부터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지만, 고든이 개인적으로 욕할 것이나 따로 생각할 게 있다고 판단한 비서.
‘바깥으로 유출되기에 적합한 내용은 아닐 테지. 욕하고 싶어도 공개적으로 욕하면 문제가 될 테니까.’
그는 바깥으로 나가 다른 이들에게도 당분간 집무실에 들어가지 말라고 전한 뒤, 자신이 직접 문지기를 자처하듯 집무실의 문 중 하나의 앞을 지키고 섰다.
하지만 비서와 그 말을 들은 다른 인원들이 생각한 것과는 달리, 고든은 그 내용들을 모두 복사하여 누군가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 * *
띵-
“이 소리는…… 이메일인가?”
선지자라 불리는 한 남자가 자신의 휴대폰에서 울린 소리를 듣고 그것을 확인하려 하였다.
목제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을 들고 자신에게 도착한 알림의 세부 사항을 확인하는 선지자.
[UN 주관 임시 정상회담 주요 사항 및 지시 이행에 관한 보고]
“음! 일을 잘해 주네. 역시 고든이야.”
테이블 건너, 선지자와 함께 앉아 있던 파드레가 호기심이 생긴 듯 질문을 해 왔다.
“고든? 미국 쪽 고든 말입니까? 아니면 유럽에 있는 고든 말입니까?”
“미국 쪽, 대통령 고든. 흠, 각국에서도 은색 헬멧을 쫓게 놔뒀고…… 혹시나 우리를 방해하러 나타나도 세계의 공권력들이 먼저 나서겠지. 그럼 이제 우리들이 할 일을 해야겠지?”
선지자가 이메일을 대충 읽어 내려가며 파드레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예, 샤오롱 그 친구가 아주 좋아하겠군요.”
“그렇겠지, 중국을 되게 싫어하니까. 오? 이것 봐. 중국이 중간에 나갔다고 되어 있네. 마침 딱 명분도 생기고 아주 좋아.”
선지자가 휴대폰의 내용을 파드레에게 보여 주자, 파드레는 노안이 있는지 휴대폰과의 거리를 조절해 가며 화면을 읽었다.
“호오…… 그럼, 암살을 하러 가야 하는 겁니까?”
“그래, 그리고 지금을 위해 내가 준비한 게 있는데…….”
선지자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자신의 짐을 보관해 두는 여행용 가방 쪽으로 다가가 그것을 열고 안에 있는 쇼핑백을 꺼냈다.
툭.
부피와 크기에 비해 생각보다 가벼운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로 떨어지는 쇼핑백.
“……옷, 입니까?”
파드레는 그 소리로 내용물을 추측했고, 선지자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은색 헬멧…… 그 녀석이 입고 다니는 거랑 최대한 비슷하게 맞췄어. 똑같은 브랜드의 옷을 구해 보려고 알아보고 물어보기도 했는데…… 차라리 하나 새로 만들라고 하더라고.”
‘무명 브랜드에서 나온 옛날 옷을 시중에서 구한다고요? 차라리 의류 수거 창고를 찾아보거나 똑같은 걸 만드는 게 더 빠를 텐데?’
한국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정확히 같은 것을 구해 보려 한 선지자였지만, 한국 출신인 나연의 조언에 그냥 포기하고 아예 똑같은 옷을 새로 만들었다.
그렇게 파드레는 선지자가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었고, 그 모습이 매우…… 눈에 띄었다.
“으음…… 조금, 안 어울리지 않습니까?”
“그렇네……. 체격과 신장의 차이가 조금 있는데, 수선을 한번 해야겠네.”
영상이나 사진에 남은 은색 헬멧…… 영의의 모습을 기반으로 제작했고 그 탓에 영의의 신장과 체격에 맞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영의보다는 작았던 파드레는 그 옷이 컸고, 결과적으로 상당히 헐렁한 옷을 입게 되어 젊던 시절의 옷을 꺼내 입은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음, 뭐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파드레는 옷을 갈아입으며 선지자가 종이에 끄적이는 계획을 슬쩍 살펴본 뒤 자신의 견해를 내뱉었다.
“텐징이 서울에서 난동을 부리고 도주하여 중국까지 은색 헬멧을 유인하게 한 뒤, 공산당의 간부들을 암살한 걸 누명 씌우는 계획이라. 썩 나쁘진 않군요.”
“뭐…… 전에 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는 모양새지만 한번 효과가 나왔다는 게 증명됐으니까. 그리고, 다시 붙어 볼 기회가 생기니까 좋아하던데?”
“하아…… 한국은 안 그래도 좁아서 숨어 지낼 곳도 없건만…….”
“그래서 전격 계열 각성자를 하나 붙여 줬어. 닷지가 추천해 준 CCTV 무력화 전문이라더라.”
“흐음…… 하긴, 그 수많은 은행을 털면서도 한 번도 CCTV에 잡히지 않은 팀을 운영한 남자니 믿음은 가는군요.”
선지자와 파드레는 서로 계획을 상의하며 보완할 부분을 보완했고, 그렇게 그들의 누명 계획이 조금씩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