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22)
알림이는 한번 죽었다 부활한 이후, 영의에게 금제를 거는 장치도 일부 부숴 놓았고 그녀 자신도 제재의 수단이 사라졌기에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어졌다고 했다.
“시스템적으로 저희의 관리를 편하게 하기 위해 일단 육체를 사망하게 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만, 저는 이제 더 이상 죽을 수 없으니 월권을 얼마든지 저질러도 되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금지된 일들이 없을 거라는 거야?”
영의는 앞으로 뭔가 규칙에 걸린다거나 비밀로 해야 하는 것들이 없어질 거란 이야기로 이해했다.
“그렇습니다만…… 아무래도 권한이 커진 만큼 책임도 커진지라, 이전처럼 첫 대면에서 무조건적인 호감을 사거나 과한 보상을 받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알림이는 권한이 강해진 대신, 그만큼 챙겨 주던 것도 사라질 것이라 얘기했지만 영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괜찮아. 지금 다져 둔 관계는 충분히 두텁고…… 또, 그만큼 주면 되는 거니까.”
사실 무림 세계에서는 이미 양 세력의 수장과도 같은 인물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아 두었고, 일라이저와 베키에게는 역으로 자신이 거래를 걸 수 있는 상태였다.
‘다른 쪽은 조금 관계 진전이 덜 됐지만…… 그렇게 자주 볼 일은 없을 것 같고.’
“그럼, 그다음으로 내가 선택받은 이유는?”
보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알림이의 사정까지 이야기가 흘러갔으나, 이제 다시 원래대로 이야기를 돌릴 차례였다.
“사실, 사용자 이외에도 적합한 대상은 많았습니다. 다만, 수많은 평가 고려 사항 중 탐욕 부분에 대한 것이 비중이 많았기에 사용자가 골라졌을 뿐입니다.”
“……내가 욕심을 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골랐다고?”
‘나 의외로 돈 많이 밝혔는데……?’
영의는 자신이 선택받은 이유가 욕심이 없을 것 같아서라는 이유에 의문을 표했다.
“탐욕 이외에도 대인 관계, 가치관, 개별 무력에 대해서도 고려했습니다만…… 그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가장 적합한 대상이 사용자였습니다.”
사전 선별 과정에서 평가한 수치를 놓고 보았을 때 영의보다 뛰어난 사람들은 다소 있었지만 가장 균형 잡힌 게 영의였었다고 하는 알림이.
“그럼에도 사용자가 선별되기에는 조금 모자란 부분이 있었기에…… 아, 사용자가 부족한 게 아니었습니다. 첫 번째 타깃이었던 개체명 독고휘의 관심을 끌기에 부족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영의는 독고휘나 혁련무강이 탐을 낼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내공을 활용할 신체가 아니었다.
아무리 내부가 최신형의 고사양 부품들이 들어찬 기계나 차라도, 바깥 포장이 허름하면 별것 아닐 거라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독고휘는 그런 겉모습부터 별 흥미가 가지 않는 존재를 유심히 살펴볼 인물은 아니었다.
그래서 알림이는 영의를 가공하는 과정을 한번 거치기로 했다.
“당시의 저는 자의식이 없었습니다만, 기록 자체는 남아 있었습니다. 사용자에게 낙뢰를 유도한 것은 저입니다. 죄송합니다.”
영의에게 뇌전지체를 부여, 즉 독고휘의 눈길을 끌 미끼로 만들어 주고 그 수단과 명분을 동시에 충족하기 위해 비살상성 낙뢰를 유도했다고 말하며 고개 숙이는 알림이.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나…….”
영의는 일생일대의 행운이나 드라마틱한 사연의 주인공이 되었다가 변화한 줄로만 알았으나, 그 모든 게 알림이…… 그 위의 관리자들의 뜻대로였다는 걸 깨닫고 머리를 싸맸다.
“하긴, 내가 그런 주인공이 될 리가 없었겠지. 그래서…… 다음은?”
자신이 선택받은 이유에 대해 대강 알았으니 다른 내용에 대해 물어보려 하는 영의.
하지만 알림이는 아직 말을 다 끝내지 않았다.
“사용자의 몸속에 전기에너지가 감돌게 만든 것은 분명합니다만…… 그것을 응용하고 활용하는 문제는 계산하지 못했습니다. 아까 첫 시도 때 오류가 상당히 있었다고 한 말을 기억하실 겁니다.”
“……뭐?”
뇌전지체를 만들고, 그것을 독고휘에게 보여 주어 그의 흥미를 이끌어 내려는 게 알림이의 본래 계획이었지만 영의가 뇌전지체와 그 활용법을 너무 빠르게 흡수했다.
“본래는 사용자가 개체명 독고휘의 제자로 활동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하지만 사용자의 재능과 활용도…… 그 이외에 배달이란 과정이 예측 결과를 뛰어넘었습니다.”
계획했던 것과 달리 상당히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이리저리 노력했던 알림이.
“그것을 급히 수정하기 위해 여러 번의 교정…… 업데이트를 거쳤고, 그 과정에서 제 자의식이 조금씩 생겨났습니다. 감정적인 사용자에게 대응하기 위해 감정적인 모습으로 변했던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원래 알림이의 계획은 영의와 독고휘가 서로에 대한 의존도와 신뢰를 조금씩 높이게 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힘을 원했던 영의와 뇌전지체의 인물을 원했던 독고휘의 욕망에 부합했다.
체질은 타고났으나, 뒤늦은 나이에 무공을 수련하는 힘을 원하는 제자와 이름을 날렸지만 적합한 제자가 없어 자신의 비전과 독문무공을 전수하지 못하는 사부.
무협지의 한 장면처럼, 둘은 서로 상호 간에 빈자리를 채워 주는 역할을 했어야 하지만…… 예상이 상당히 틀어졌다.
“관리자 및 그 하부의 가상 생명체들은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니 맛에 대한 것을 정보로만 알았을 뿐, 그것에 대한 예측을 하지 못했습니다.”
우선, 음식의 맛.
굳이 음식을 갖다줄 필요 없이, 적당히 만남의 계기로만 작용하게 할 용도였지만 영의가 배달한 자장면과 탕수육은 그 맛이 훌륭했고 결국 주객이 전도되고 말았다.
“그것은 곧바로 반영되었고, 오히려 연간 단위로 진행할 계획에서 상호 간의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만들고 시간을 단축할 계기가 될 거라 판단하였지만 거기서 또 오류가 발생하였습니다.”
인간들이 식사 자리로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다지는 사례를 참고하여,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거란 판단에 오히려 그것을 권장하려 했지만 영의가 무공에 대한 재능을 보이자 또 예측이 빗나가고 말았다.
“개체명 독고휘는 사용자에 대한 신뢰와 친밀감을 곧바로 내보였고, 오히려 상호 간의 관계에서 사용자가 주체로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또 시도한 것이 아무거나 잘 먹어서 음식에 잘 현혹되지 않을 팽소운의 참여와 일라이저의 참여 등, 타깃층의 분산이었지만 거기서 또 오류가 발생하였다.
“개체명 일라이저는 성공적으로 작용했습니다만 개체명 팽소운과의 적당한 분위기 완화를 위한 주류는 오히려 역효과를 발생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저는 연산 능력과 추가적인 정보가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점점 더 발전해 간 것입니다.”
처음에는 정말 기계처럼 계획대로만 움직이게 하려던 알림이.
하지만 자꾸 새로운 변수가 생겨나기 시작하자 알림이의 연산 능력이 따라가지 못했고, 결국 사전 정보의 확대와 연산 능력 발전이 반복되었다.
우연의 일치라고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영의의 행동 때문에 알림이는 점점 발전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의 목숨을 구해 주기까지 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지금의 너를 만든 건 내가 된 거야?”
“따지고 보면,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아버지라고 불러 드릴까요?”
알림이의 말에 기겁하며 고개를 젓는 영의.
“무, 무슨 소리야. 그런 거 하지 마.”
“농담입니다.”
아까처럼 딱딱한 미소를 짓는 알림이였지만, 농담이라는 것을 할 줄 아는 것을 보니 확실히 자의식이 많이 발달한 듯싶었다.
“그래서…… 계속 배달할 손님이 늘어난 이유는?”
“사용자를 바로잡기 위함이 대부분이었습니다만…… 도중부터는 차라리 사용자를 그대로 이용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습니다. 두 개의 일을 동시에 진행시키는 용도 말입니다.”
일반적인 방식대로라면 한 차원에서 일을 끝마치고 나서야 다른 차원으로 보내는 방식인 듯했다.
“본래대로라면 사용자가 개체명 독고휘에게 정식으로 제자로서 인정을 받고 그 표식을 가지게 한 채로 개체명 혁련무강에게 보내려 했습니다. 천하제일 비무대회가 일어나는 계기가 바로 양측의 자기주장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무림에서 열릴 예정인 천하제일 비무대회는 원래 혁련무강과 독고휘가 어떠한 사유로 서로의 의견을 대립시키다 일이 커질 것을 우려해 대리인들이 서로 싸우게 하는 물리적 토론이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영의의 개입으로 인해 두 노고수들이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며 자신감을 얻었고, 언제든 이길 수 있다는 여유가 생기며 평화로운 축제의 장이 된 것이다.
“개체명 장우형과 혁련운은 그 대회에 참여가 아닌 참관을 할 예정이었고, 미래에 그 둘이 각 세력의 핵심 인물이 될 예정이었습니다만…… 둘 다 사용자가 영향을 끼치고 있지요.”
바보 같은 면이 보이는 우형과 무공과는 담쌓고 살아가는 혁련운이 어떻게 핵심 인물이 될까 싶지만, 둘의 재능을 고려하면 불가능하진 않았다.
“그 이외에 수많은 변수들과 암울한 미래가 있었습니다만, 사용자의 개입으로 그것을 교정하면 될 것입니다.”
알림이는 무림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이내 일라이저가 있는 아리안델의 이야기를 해 주기 시작했다.
“개체명 베키는 호엔하임과 화해하지 못하고, 끝까지 거리를 둘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옛 사고로 인해 기능이 저하된 장기 때문에 생을 일찍 마감하여 마공학이 쇠퇴하게 만들 예정이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 베키는 영의가 살려 주지 않았다면 그 후유증으로 장기의 기능이 저하되었을 것이며 호엔하임은 비슷한 이유로 심장의 기능이 저하되었을 거라 하였다.
그런 다음 일라이저는 성과 발표회 때에 식사 후 잠들어 버려 마도 협회의 명성 하락과 인간 불신을 얻게 된다고도 하였다.
“그리고 그걸 교정시키게 된 게 나였고? 그게 역사 변형 아니야?”
“맞습니다. 일말의 여지도 없는 역사 변형 행위였으나 사용자의 기준에서는 사고 회피나 생존을 위한 교통법규 위반이라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바이크를 타던 영의는 알림이의 찰떡같은 비유에 곧바로 이야기를 이해했다.
“그래……. 다른 이야기도, 해 줘.”
“알겠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해 드리겠습니다.”
알림이는 영의의 질문에 대부분 대답해 주었다.
자신이 이런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알려도 되는 것인지, 각 세계의 시간 흐름은 어떻게 차이가 나는 건지, 그리고 자신이 그쪽과의 시간에 못 맞추면 어떻게 되는지 등.
“비밀은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나중에 기억을 삭제하는 방법이 존재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모릅니다.”
용신의 노출처럼 짧은 건 몰라도 영의의 활동 기간이 길수록 기억 간의 인지 부조화 등이 생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각 세계의 시간 흐름은 행성과 항성 간의 거리별로 상이합니다. 그리고 사용자에게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 판단되면 과거의 시점으로 이동됩니다.”
즉, 영의가 아무리 현실에서 시간을 보내더라도 다른 차원으로 갈 때는 원하는 시점으로 갈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다소의…… 정신 이상이나 환각 등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건너뛰는 행위는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다는 듯, 상당한 부작용이 존재하는 듯했다.
알림이는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듯 서둘러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사용자가 그런 증상을 겪을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되지 않게 조정을 할 테니까요.”
“그래……. 대충 다 알겠네. 그럼 이제 가 봐야겠어.”
영의는 알림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 저에 대한 추궁이나 무력행사를 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알림이는 영의가 해코지를 하거나 책임 추궁을 할 줄 알았었는지 영의가 돌아가려 하자 눈을 크게 뜨는 반응을 보여 주었다.
“네가 뭐 이상한 계획이나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란 건 알았고…… 또,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 하는 거잖아? 나도 이득을 봤고……. 게다가 내가 그렇게 나쁘기만 한 사람은 아니거든. 도와줄게.”
영의는 알림이의 목적이나 자신의 활동 이유에 대해서 대강 알았으니 그걸로 됐다는 듯 미소 지었다.
“아, 근데 혹시 나 말고도 다른 심부름꾼이 있어? 차원이 한두 개가 아니라면서?”
“일단 사용자의 세계에는 사용자 한 명뿐입니다. 세계 간 이동 대신 각 세계 내부의 일을 담당하는 인물들도 있긴 합니다만…… 저의 관할은 아닙니다.”
다른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차원 간 이동을 하는 건 자신뿐이라는 확답을 받자 영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내밀었다.
“그래……? 일단 알겠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알림아.”
영의가 내민 손을 두 손으로 붙잡으며 위아래로 움직이는 알림이.
“저도, 부족하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사용자.”
알림이는 그 말을 하며 작게 미소 지었고, 이번에는 아까와 같은 딱딱한 미소 대신 자연스러운 웃음이 나왔다.
* * *
영의가 나간 뒤, 아무것도 없이 텅 비게 된 흰 공간.
“……거짓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사용자. 사용자를 선택한 이유는 사용자의 그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 담당의 심부름꾼을 찾아야겠군요. 사용자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이내 영의를 대접할 때처럼 바닥이 솟아 올라왔고, 알림이는 그 위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