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21)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에서 갑자기 들려온 여자 목소리.
영의는 갑작스럽게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곧바로 물러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경계를 하며 대응하려 했으나, 이내 눈앞에 있는 존재를 보자 경계심이 낮아졌다.
“…….”
아무런 장식도 없는 흰 정장 바지와 흰 셔츠 차림의 여성.
똑같이 아무런 색도 없이 하얗기만 한 이 공간에 똑같이 흰색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여성은 삐져나온 머리 없이 뒤로 잘 묶어 정리한 백금발에 청록색의 눈동자를 가진 미인이었으나, 그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당황해하고 있었다.
“으음…… 어떻게 해야 할지……. 우선은 손님이니 대접을 하는 게 예의에 맞을 것 같습니다.”
방금 전 목소리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여성은 영의…… 그 이전에 사람 자체를 대하는 것이 매우 서투른 듯, 영의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영의를 앞에 세워 둔 게 적합한 응대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한 듯, 의자를 비롯한 뭔가를 찾으려는 듯 불안하게 어떤 행동을 하려다 중단하는 것을 반복하는 여성.
영의는 그런 여성을 쳐다보며 나지막하게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던 말을 꺼냈다.
“……알림이, 맞지?”
평소에 들었던 목소리와는 조금 달랐지만, 말투와 정황으로 봐서 알림이 말고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던 여성은 영의의 목소리를 듣자 움직임을 멈추었고, 이내 영의를 청록색의 눈동자로 빤히 바라보며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변경된 개체명, ‘Alrim’을 언급하시는 거라면 본 개체…… 저를 지칭하는 게 맞습니다.”
여성이 바뀐 것은 태도만이 아닌지, 지금 여성의 목소리는 아까의 목소리와 달리 평소 영의가 전해 듣던 알림이의 목소리와 제법 흡사해졌다.
영의는 알림이의 평소와 같은 기계적인 모습을 보자, 온통 하얀색만이 가득한 공간과 옷이 인간성을 더 없애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런 느낌에 곧바로 떠오른 의문을 물어보는 영의.
“진짜 사람일 줄은 몰랐었는데. 그리고, 왜 말 잘하면서 평소에는 기계처럼 말을 한 거야……?”
알림이가 프로그램의 일종인 줄로만 알았으나, 실제로는 눈앞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멀쩡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본 개체…… 저는 본래 사용자가 원하신 것처럼 감정적인 모습이 없는 인형에 불과했습니다. 다만, 사용자와의 교류를 지속한 결과 조금씩 바뀌어 간 것입니다.”
영의 덕분에 감정이 없는 인형 신세에서 어느 정도 감정 비슷한 게 생겨났다고 말하며 어색하게 미소 짓는 알림이.
외형은 용모가 수려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인이었지만 미소를 짓자 마치 웃기 싫은데 억지로 딱딱한 미소를 짓는 듯한 모습이었다.
“……으음, 원래 그런 게 없었다는 건 잘 알 것 같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우선 사용자와의 대화를 위해…… 적당한 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스윽-
알림이의 말과 동시에, 바닥이 솟아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저 사각형의 기둥이 땅을 뚫고 솟아오르듯이 올라오던 바닥은 이내 녹아내리듯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고, 흰색으로만 이루어진 의자의 모습을 갖추었다.
“거기에 앉아 주십시오.”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라 주는 영의.
“본래 수많은 대접 문화가 있고, 그만큼 많은 방식이 있지만 저는 사용자가 가장 많이 접한 방식으로 대접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싫어하는 차나 음료가 있으십니까?”
바닥에서 올라온 의자처럼, 같은 방식으로 솟아 올라오는 테이블.
테이블의 위에는 갓 구워 낸 듯 온기를 머금은 쿠키와 주전자가 있었고, 차를 끓이기 위한 찻주전자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영의는 딱히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었기에, 알림이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어.”
“그렇다면, 개체명 베키가 사용하던 것과 같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알림이는 이미 영의가 여러 번 먹어서 검증된 것을 사용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영의가 싫어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베키가 주로 쓰던 찻잎으로 차를 우려내기 시작했다.
달그락.
차를 한 잔만 타고 영의의 앞에 찻잔을 내어 준 후, 알림이 본인도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던 알림이는 이내 무언가 실수했다는 듯, 눈을 잠시 크게 뜨고는 양손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이제, 대화를 할 준비가 모두 끝난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네.”
영의는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잠시 보다가 이내 알림이를 쳐다보았다.
‘눈을 안 깜빡이네…….’
겉모습은 누가 봐도 사람이었지만, 마치 기계처럼 눈의 깜빡임이나 호흡하는 동작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 원하시는 모든 것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어떤 것부터 들으시겠습니까? 사용자가 선택받은 이유? 비밀로 처리되는 것에 대한 정보? 그 외에 어떤 것이든 말씀하십시오.”
“글쎄…… 일단, 용신…… 그 인물에 대해서부터 알려 줘.”
영의는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용신이 가장 의문스러웠다.
칼라미트를 타고 모크란으로 돌아가던 때, 영의는 용신이 주고 갔던 녹색 액체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정보 표시 기능을 사용했었다.
그리고 그때 떠오른 것이 바로 이것.
[이름 없는 칵테일 - 수없이 희귀한 재료들을 이용하여 만든 음료. 복용 시 신체를 최적의 상태로 바꾸는 효능 있음. 노화에 효과 없음. 과다 출혈에 효과 없음.]
상당히 귀해 보이는 물건을 아무렇지 않게 주고 간 인물인 데다, 세계를 관리하는 관리자들까지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했으니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용자가 용신이라 부르는 상대는 개체명을 특정할 수 없습니다. 본인 스스로가 스스로의 지칭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많은 곳에서 그를 여행자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름이 없다고?”
용신의 이름이 없다고 생각한 영의였지만, 의외로 그건 아니었다.
“그 반대로, 많기 때문에 정해지지 않은 겁니다.”
“음.”
그 이후로 알림이는 용신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했지만, 명쾌하게 해결될 만한 답변은 없었다.
그의 행적은 상당히 화려했고, 또 놀라웠다.
그는 수많은 세계를 여행하며 관찰하고 조사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 목적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뭔가…… 다 겉도는 느낌인데. 핵심적인 정보가 없어.”
“당사자의 요청으로, 정보 열람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과거에 관리자에게 협조 요청을 받으면서, 이런저런 수작을 부려 둔 모양이었다.
“좋아……. 일단 나는 왜 선택받은 거지? 그리고, 왜 첫 보상이 무공이었던 거야?”
자신이 선택받은 이유와 왜 첫 번째 보상이 무공이었던 걸까 하는 의문을 품는 영의.
‘로버트의 사례를 예로 들어 보면 돈이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사용자가 선택받은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후술하겠습니다. 우선, 사용자에게 첫 번째 보상으로 무공이 제시된 것은 사용자의 욕망에 가장 부합했기 때문입니다.”
무공이 보상으로 제공된 이유는 본인의 욕망이었다는 알림이의 말에, 얼빠진 표정을 짓는 영의.
“내…… 욕망?”
“그렇습니다. 보상 시스템은 차원의 심부름꾼들의 의욕 고취와 그들의 행동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고, 처음에는 가장 큰 가치를 지니는 금전이 주가 되었으나 이내 개별 성향과 욕망에 맞춘 방식을 채택하였습니다.”
알림이는 초기의 보상 방식이 모두 영의의 내면 속 잠재된 욕망을 반영해서 표기된 것이라 설명했다.
“자, 잠깐. 그럼 그때 여자가 표시된 것도 내 내면의 욕망이었단 말이야?”
혁련무강에게 첫 배달을 갈 때, 분명히 무공을 포함한 보상들 중에 여자도 표기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욕망이었다는 소리를 본인이 아닌 타인에게서 듣자 수치심에 급히 묻는 영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설명을 계속 이어 가겠습니다.”
“그건 대답해 줘야지!”
알림이는 그런 영의의 부탁에도 아랑곳 않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사용자는 무의식중에 힘을 갈망하고 있었고, 사용자의 성격과 주변 환경에 가장 적합한 방식을 고려하여 배달이란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물론, 첫 번째 시도는 실험적이었고 조금…… 아니 상당히 오류가 있었습니다만.”
“……내가, 힘을 갈망했다고?”
영의는 문득 자신이 힘을 갈망했었던가 싶은 생각을 했지만, 첫 번째 배달 이전 화연을 만났던 적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무의식중에…… 화연이를 보고 나서 그런 생각을 했었던 건가?’
“사용자가 첫 배달을 마친 후, 힘을 얻으며 내면의 욕망이 희석되기 시작하자 보상은 더욱 다양해졌습니다. 사용자의 욕망이 옅어졌기에 여러 방면으로 자극해야 했으니까요.”
독고휘 이후, 일라이저에게서 금화와 마정석이 보상으로 나온 것이 그런 연유인 듯싶었다.
수연의 아카데미 입학이 다가오고 있었고, 모아 둔 돈이 모자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번에 많은 지출이 예정되어 있었으니까.
‘물론 장학금을 타긴 했지만…… 장학금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지.’
영의는 그 이후의 배달 행보에도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사용자의 활동 범위를 넓히며 자연스럽게 적응하게 만든 뒤 세계의 오류를 수정하는 데에 동원하려 했습니다만…… 도중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 문제란 아마도 아카데미 습격 사건을 말하는 것이리라.
“내가 죽을 뻔했을 때…… 말이지?”
영의가 자신의 생각을 물어보자, 알림이는 반응이 없던 아까와 달리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까지 쉬었다.
“맞습니다. 하아…….”
웃어 본 적이 없다는 듯 어색했던 미소와는 달리, 한숨만큼은 자연스럽게 내쉬는 알림이.
“사용자에게 대피를 권고하기 위해 경고했습니다만, 거기서 정면으로 대치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알림이의 예상과 달리 영의는 권왕과의 전면전을 택했고, 거기서 알림이는 일반적인 가상 생명체(지금은 발전했기에 가상이 아니게 되었지만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들…… 그녀의 자매들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본래라면 거기서 사용자를 포기했어야 하나, 저도 계획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었던 사용자에게 감화가 되어서인지…… 사용자를 살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알림이는 부상을 당해 죽어 가던 영의를 살리기 위해 월권을 저질렀고, 영의를 강제로 영원의 숲으로 보냈다.
거기서 다른 차원의 삶을 잠시 살던 용신을 만나게 하는 것과 동시에 그가 예정에 없던 능력을 얻게끔 만든 알림이.
“당시의 월권이 바로 들키진 않았지만…… 나중에 저를 처분하기 위해 시스템이 제 생명 기능을 끊었고 저의 자매들이 저를 습격해 왔습니다. 사용자도 아실 겁니다, 제가 잠시 사용자와 연락이 끊어졌던 그때를.”
아마 역사 변형을 시도하여 알림이가 동작을 멈췄던 때를 말하는 듯했다.
“자매들……?”
영의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예전에 알림이는 용신과 협력하여 다른 가상 생명체들의 방해를 뚫으며 무언가를 탈취한 적이 있었다.
“예, 지금의 저와는 상당히 다른…… 정말 인형과도 같은 존재들입니다. 살아서 숨도 쉬고, 생체 반응도 보이는 살아 있는 존재들이지만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존재들이지요.”
알림이는 살아 있다는 말을 할 때 자신의 손을 아련하게 쳐다보았다.
“그럼에도…… 저는 그들을 자매라 칭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저같이 감정 비슷한 게 생기는 자매가 있을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비록 절 죽인 존재들이지만…… 저는 죽지 않았으니까요.”
자신이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는 모순되는 말에 영의는 깜짝 놀랐다.
“뭐? 죽었다고?”
“예, 정확히는 생명 활동이 끝난 것이지만…… 사용자를 지원하는 행동 자체는 이어 갈 수 있으니 문제없습니다. 사용자도 이미 예상하고 있겠지만 이 몸은, 죽었던 저의 몸체를 재활용한 것입니다.”
알림이가 영의와의 연락이 두절되었던 당시, 알림이는 처벌을 받았고 이내 그녀의 몸도 모든 생명 활동을 정지했다.
하지만 다른 가상 생명체들과 달리 월권을 저지르고 있었던 알림이는 보험을 들어 두려 했고, 자신의 신체가 활동을 정지해도 계속 통신을 지속할 수 있게 뒤 통로를 뚫어 두었다.
“그렇게 사용자에게 언어 팩을 보내었고, 여행자…… 용신에게 구조 요청을 보냈습니다. 생명체 중 가장 가진 권한이 크면서도 제 부탁을 들어줄 만한 존재였으니까요.”
용신은 어째서인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이내 관리자들이 구축한 시스템의 서버실에 해당하는 관리 창고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사용자에게 걸려 있는 제한을 관리하는 장치들을 파괴하고 폐기 예정이던 저의 코어를 다시 빼 와 이 몸에 집어넣었습니다.”
처음부터 생명체가 아니었기에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알림이였지만, 이미 몸은 사망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눈을 깜빡이거나 호흡하는 것은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육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요. 그럼, 다음 얘기로 넘어가도록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