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16)
영의의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남자는 실크로 추정되는 남색의 고급진 정장 바지에, 풀을 먹인 듯 깃이 빳빳하게 세워진 셔츠를 입고 있었다.
마치 식사를 하러 온 직장인과 같이 정장의 재킷은 벗어서 한쪽 손에 걸쳐 둔 남자.
어느 퇴근 시간대의 지하철에서 흔히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짧은 흑발에 특징 없는 외모의 남자는 재킷을 들고 있지 않은 빈 팔 하나로 영의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크윽!”
영의는 남자의 방해에도 아랑곳 않고, 칼라미트를 공격하려 했으나 이내 손에 들린 철봉이 꿈쩍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에 철봉을 잡은 손의 힘을 뺐다.
‘엄청난 힘……! 칼라미트의 기도에 나타난 걸 보면 드래곤들의 신인가?’
남자는 영의가 주는 힘이 줄어든 것을 느꼈는지, 철봉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렸다.
“흐음, 좋아. 격차를 빠르게 알면 좋은 법이지. 안 그런가, 젊은 심부름꾼 친구?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물론, 내가 난쟁이들에 대한걸 알려 주긴 했지만…… 그게 이렇게까지 되다니. 흐음, 그렇군.”
이것저것 중얼거리며 납득했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이는 남자.
그리고 영의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심부름꾼이란 단어에 멈칫했다.
“심부름꾼……? 설마?”
하지만 남자는 그런 영의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래, 숭배와 신앙, 폭압과 반란…… 매번 있는 일이지. 이것 또한 섭리겠지.”
남자는 서로 싸우던 것을 멈추고 이 광경을 구경하기 시작한 난쟁이들에게 연민의 시선을 잠시 보낸 뒤 칼라미트와 영의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법 심하게 다쳤구나. 그리고 심부름꾼 친구는…… 지난번에 내가 남겨 둔 선물을 못 받은 건가? 아니, 받았지만 쓰지 않은 건가?”
남자는 아직도 엎드려 있는 칼라미트의 비늘을 쓰다듬으며 걱정하는 듯 이야기했고, 동시에 영의에게 뭔가를 질문했다.
“그걸 썼다면 이 녀석은 지금쯤 잘하면 중상, 잘 안 돼도 불구는 됐을 텐데.”
영의는 남자의 말을 듣고 혹시나 싶던 의문이 확신으로 바뀌었고, 이내 남자에게서 정확한 확답을 듣기 위해 입을 열었다.
“혹시…… 당신이 처음으로 차원의 심부름꾼을 했던 분인가요? 베키와 발레리를 구해 주고, 저한테 정령도 남겨 주고, 시라에게 정령술도 가르쳐 준 그 사람?”
남자는 다른 것들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발레리란 이름은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고민하는 듯 턱을 짚었다.
“흐음, 내가 보통은 이름을 기억하지 않지만 발레리란 이름은 기억에 있군. 한겨울의 한 도시에서 나로 인해 죽은 여자아이였던가.”
발레리의 이름 자체는 기억하는 듯했지만, 그 정확한 사연이나 당시의 정황 같은 것은 잘 모르는지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정도로만 답하는 남자.
“아니, 어떻게 자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영의는 그런 남자를 보며 감정이 메마른 기계와도 같다고 느꼈다.
“생명의 소중함과 그 덧없음을 알기에, 죽음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거지. 그보다, 여기는 대화하기에 적합하지 않군. 자리를 옮겨야겠어.”
남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는, 공중에서 파리를 쫓듯 팔을 한번 휘저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별것 아닌 동작이었지만, 그 간단한 동작이 만들어 낸 변화는 매우 놀라웠다.
물론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이야 영의도 충분히 할 수 있었고, 남자가 예전에 자신과 같은 일을 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을 보는 건 상당한 차이가 있었고, 손짓 하나만으로 타인을 이동시키는 것은 현재의 자신과 남자와의 격차를 보는 듯했다.
“이게…… 대체…….”
놀란 것은 영의뿐만이 아니라 함께 이동된 칼라미트도 마찬가지였던 것인지,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하긴, 방금 전까지 어두운 지하에 있다가 햇살이 내리쬐는 해변가로 오면 누구라도 놀라긴 할 것이다.
“그래, 그래도 일족은 일족인데…… 치료 정도는 해 둬야지. 심부름꾼 친구? 잠시만 기다려.”
남자는 영의에게 나지막하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칼라미트에게로 다가갔고,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영의는 자신을 옥죄어 오는 감각을 느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기계 팔이나 바이스 같은 공구로 온몸의 뼈와 근육들이 꽉 붙들리는 듯한 느낌에 당황하는 영의.
‘뭐지?! 움직일 수가 없는데? 이게 그 용언인 건가?’
영의는 흔히 드래곤들이 사용하는 용언이라는 것에 당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남자의 정체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알림아, 이거 어떻게 해결 못해?’
알림이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았지만, 물리적인 간섭을 하지 못하는 알림이로서는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사용자, 정말 죄송합니다만 저는 사용자의 몸이 구속당한 것에 대해서는 도움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용언이라는 것은 듣는 이가 자의 없이 행동하게 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는 답변과 함께, 용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듣고 영의는 체념했다.
‘이런……. 그럼, 전에 했던 정보 띄우는 기능은 해 줄 수 있어?’
행동을 하지 못한다면 정보라도 얻기 위해 영의는 알림이에게 전에 꺼 두었던 기능을 요청했다.
[상당히 방대한 양의 정보가 한 번에 쏟아져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래도 진행하시겠습니까?]
‘정보라도 하나 얻어 놔야지. 진행해.’
영의는 남자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나 하다못해 이름이라도 알기 위해 약간의 부담을 감수하고 진행시켰지만, 그 부담은 작지 않았다.
“윽, 크윽!”
정보 표시 기능을 활성화한 뒤 남자를 쳐다보았을 때에는 지난번에 겪었던 것과 차원이 다를 정도의 정보가 떠올라 시야에 들어왔다.
[??? - 수명 추정 불가, 신체 나이 30세(변환 가능 추정), 신성 보유(용신, 투신, 화신…….)]
수없이 떠오르는 정보들.
영의는 수많은 정보들을 일일이 살펴보려 했으나 정보들은 엄청난 속도로 표시되고 이동하여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고, 앞부분의 일부만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칼라미트의 머리에 손을 얹으려던 남자는 영의가 자신을 살펴봤다는 것을 인지한 건지, 고개를 돌려 영의 쪽을 바라보았다.
“음? 날 보려고 하는 건가? 미안하지만, 사생활이 있으니 거기까지.”
남자의 말에 영의에게 표시되던 정보들은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고, 이내 남자를 쳐다보아도 표시되는 것은 그가 입은 옷밖에 표시되지 않았다.
[정장 바지 - 수선한 적 없음. 실크 100%, 마력 강화 처리.]
[정장 재킷 - 수선 1회. 실크 100%, 마력 강화 처리. 무언가 들어 있음.]
영의의 편의성을 위해 몇몇 단어는 번역이 되기도 하고, 그가 모르는 정보가 표시되기도 하지만 남자는 그것마저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듯했다.
‘방금…… 신성이라고 적혀 있었지?’
칼라미트의 기도로 인해 나타났고, 나타날 때 신앙에 관한 이야기도 했으니 남자는 신 또는 그에 준하는 무언가로 보였다.
그렇게 남자가 칼라미트의 머리에 손을 올렸을 때, 영의는 남자가 신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투둑, 툭.
회색으로 물들고 부서진 온몸의 비늘들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검붉은 색의 비늘이 다시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지, 영의와의 전투를 통해 다시 회색으로 물들었던 가죽도 다시 색을 되찾고 상처가 낫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병자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처럼, 칼라미트는 자신이 깨끗이 나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몸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역시…… 역시 신은 실존하고 계셨던 거군요……! 감사드립니다!”
남자를 보며 고개를 깊이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칼라미트.
“나는 신이니 뭐니 하는 게 아니야. 그만큼 전능하지 못해.”
칼라미트의 찬양하는 말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자신이 신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너도 조용히 있어라.”
남자는 칼라미트에게도 조용히 있으라는 말을 했고, 이내 영의와 똑같이 용언이 적용된 듯 몸이 그대로 굳은 칼라미트.
“후우…… 그래, 그렇다면 이제부터 얘기를 나눠 봐야겠지? 까마득한 후배한테 조언을 좀 해 줘야겠으니.”
따악!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는 남자.
그리고 그 손가락을 튕기는 동작에 영의는 몸의 자유를 되찾았다.
아주 잠깐 동안의 시간이었지만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적응이 되지 않았는지 영의는 바닥에 발을 주춤거리며 비틀거렸지만 넘어지지 않고 서서 버텼다.
“흐음, 감이 아주 없진 않군. 어지간해서는 이질감 때문에 넘어질 텐데.”
“당신은…… 누구죠? 정확히는, 대체 정체가 뭐죠?”
남자의 정체와 그가 옛날에 수행했던 차원의 심부름꾼…… 그 정확한 정체를 알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영의.
남자는 영의의 질문에 땅을 향해 손짓했고, 이내 모래로 이루어진 의자가 두 개 솟아올랐다.
“일단 간단하게 자기소개부터 하지. 이름은 알 것 없고, 당장의 신분은…… 용들의 신 정도니 용신이라고 하면 되겠지. 물론 신처럼 전지전능하진 않지만, 신앙의 대상이니. 네가 하고 있는 차원의 심부름꾼을 처음으로 담당하기도 했다.”
마치 구슬 일곱 개를 모아가서 소원을 빌면 들어줄 것 같은 신분이었지만, 용신은 정확한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저는 최영의라고 합니다. 현직 차원의 심부름꾼을 하고 있고요.”
영의는 용신과 서로 자기소개를 나누었고, 용신은 영의의 대답에 팔짱을 끼고 그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뭔가 다른데……. 그건 나중에 알아보면 될 테고. 궁금한 것 있나?”
“네?”
영의는 용신의 갑작스러운 질문 요구에 당황하였다.
보통은 저런 엄청난 존재가 자신에게 뭔가를 물어보는 게 정상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한 영의.
“네가 뭘 어떻게 하든 간에, 난 너를 본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해 줄 말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 네 질문부터 전부 해라.”
용신은 영의에게 별다른 용건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럼, 이것부터 물어볼게요. 차원의 심부름꾼은…… 뭘 하는 역할이죠? 그리고, 어떤 기준으로 뽑히는 거죠?”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런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또 자신이 이렇게 배달을 하는 최종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영의.
“그래도 그렇게까지 멍청하진 않나 보군. 내 이름이나 정체를 꼬치꼬치 캐묻는 애송이들도 있었는데.”
용신은 영의의 질문이 상당히 마음에 든다는 듯,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을 해 주기 시작했다.
“차원의 심부름꾼은…… 말하자면, 너희들이 흔히 생각하는 신들의 따까리다. 말 그대로 심부름꾼이지.”
태연한 표정으로 엄청난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용신.
“……네?”
“사실 신이라고 부르기에도 모자란 놈들이긴 한데…… 결과적으로 그게 세상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한 행동이니 딱히 한다고 손해 보거나 하지는 않지.”
자신도 신에 해당하는 직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을 대차게 까 내리기 시작하는 용신.
“신의 심부름꾼이라니……? 헤르메스? 아니, 그것보다! 역사 변형을 일으키는 행동들을 골라서 하는 게 신이 시켜서 하는 거라고요?”
“호오? 역사 변형까지 알고 있다니. 역시 안내하는 아가씨가 주목할 만하네. 그 아가씨가 알려 줬나 봐? 수작을 좀 부리긴 했겠지만……. 우선, 일단 이거나 마시면서 이야기하지.”
용신은 어느새 손에 유리잔을 들고 있었고, 그 안에 담긴 녹색의 음료를 영의에게 건네주었다.
“……나중에 마시죠.”
영의는 그 잔을 받은 뒤 마시지 않고 그저 손에 들고 있었고, 용신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자…… 이야기가 조금 샜지만, 신 같은 놈들이 누구 하나를 골라서 역사를 수정하게 하는 건 맞아. 그게 같은 차원의 인물이면 예언자가 되거나 성인 또는 위인이 되는 경우고, 다른 차원이면…… 너 같은 심부름꾼이 되는 거지.”
그 말은, 역사 속 인물들이 영의처럼 차원의 심부름꾼이 된 적이 있었다거나 영의 또한 위인이 될 수 있다는 말로 들려왔다.
“참, 멍청한 짓의 결과물이야. 본인들이 잘못 건드린 걸 본인들의 규칙을 어길 수 없어 인간들의 손을 빌려 바로잡아야 한다니.”
용신은 영의를 가리키며 또 다른 잔을 들이켰고, 모래로 만든 테이블을 만들어 내 그 위로 올려 두었다.
그리고 그 충격적인 말들을 들은 영의는 그 충격에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