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12)
아리안델에서 가장 유명한 마공학자이자 가장 뛰어난 마공학자인 동시에 가장 광기 넘치는 마공학자라는 세 개의 타이틀을 석권한 주인공, 베키.
그런 유명인인 베키는 지금, 무언가가 상당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듣고 있어?”
“응? 아, 응. 어디까지 말했더라?”
“……솔직히 말해 봐, 너 무슨 일 있는 거 맞지?”
베키는 자택 내부에 있는 보조 연구실 겸 보조 실험실 겸 보조 침실 겸 응접실에서 눈앞에 있는 자신의 손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몇 없는…… 아마 유일한 친구인 손님, 영의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없다니까.”
“거짓말. 내가 옛날부터 사람 눈치는 정말 잘 봤거든? 너는 지금 뭔가 복잡한 마음을 안에 품고 있어. 당장 대화도 제대로 못 하고 있잖아.”
영의는 이곳에 오기 전, 알림이에게 여러 가지 비밀과 충격적 사실을 들었고 최대한 마음을 추스르고 베키에게 방문한 것이지만 아무래도 불안해진 마음이 무의식중에 계속 신경 쓰이는 듯했다.
“……아냐, 나는 멀쩡해.”
베키의 추궁은 계속되었지만, 영의는 시치미를 떼기로 마음먹었다.
‘이건 정말로 아무한테도 섣불리 할 수 없는 이야기니까…….’
차원을 넘나드는 능력이나 갑작스럽게 생긴 무공 능력에 대해서는 가족이나 가까운 사이의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있었다.
물론 차원을 오가는 능력은 화연에게만 털어놓은 것이지만.
하지만, 영의가 알림이에게 들었던 내용은 가히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정도의 충격과 엄중한 비밀 엄수가 요구되었다.
‘나는 관계자라서 그나마 알고라도 있을 수 있지만 발설하면 제재가 가해진다고 했었지…….’
이미 제재를 당한 로버트의 사례를 알고 있던 영의는 발설해서는 안 될 비밀이 하나 늘었고, 그 탓에 심란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 심란함을 읽어 낸 베키가 영의의 고민을 덜어 주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지만, 영의가 계속 부정하자 이내 그녀도 포기했다.
“……그래, 말하고 싶지 않은 고민이라는 건 알겠네. 네가 밤일이 시원찮아졌다는 건 내가 비밀로 해 줄게. 후…… 어쩌다가 그런 젊은 나이에…….”
베키는 영의가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게 차마 언급하기 부끄러운 안건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처럼 이야기했고, 자신의 기능(?)에 이상이 없는 것을 아는 영의는 곧바로 부정했다.
“그, 그런 거 아니야!”
무슨 말을 해도 무덤덤하게 부정하던 영의가 순간적으로 발끈하는 것을 본 베키.
“그래…… 알겠어. 히히히.”
영의의 모습을 본 그녀는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웃었고, 영의 또한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자 고민이 수면 아래로 조금 가라앉았다.
줄곧 같은 태도를 고수하던 영의에게 조금이라도 자극을 주기 위해 그런 말을 한 듯 보였다.
베키다운 방식의 배려와 분위기 전환에 영의는 남의 집까지 와서는 다른 일을 자꾸 생각했던 자신을 자책하듯 짧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궁상맞게 사람을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네. 미안해.”
‘그래, 일단 당장 나한테 닥친 일도 아니고…… 앞으로 고쳐 나가면 되겠지. 위험한 건 알림이가 알려 줄 테고. 당장 급한 일들부터 해결하면서 정리하자.’
영의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는 차를 들이켰고, 베키는 조금 괜찮아진 듯한 영의를 보며 안심한 듯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금방 괜찮아진 걸 보면 그렇게 큰 고민은 아니었나 봐? 아, 차 더 마실래?”
“그래, 고마워.”
* * *
시간이 지나고, 그룬이 말했던 날짜가 다가왔다.
모크레튼 산맥으로 곧바로 온 영의.
하지만 어째서인지 산맥 주변에는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어째서 비가?!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너무 많이 오는데!”
마정석 바이크의 주변에 생성되는 역장이 공기저항이나 비를 어느 정도 막아 주긴 하지만 그것을 모크란의 난쟁이들에게 노출시키는 것은 지양해야 했다.
뇌룡보를 사용하여 날아가는 것도 제법 눈에 띄는 행위였기에, 칼라미트를 격퇴하기 전까지 비밀을 엄수해야 하는 그로서는 최대한 열심히 달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영의는 가능한 한 속도를 올려서 차량에 가까운 속도로 산맥의 입구 쪽으로 다가갔지만, 이미 그는 비를 잔뜩 맞은 상태였고 옷의 안쪽까지 물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진짜 엄청나게 쏟아지네…….”
쿠르릉-
모크란의 입구에는 경비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방문객에 대한 배려인지는 몰라도 약간의 차양 같은 게 있었다.
그 차양 아래에서 비를 피하기 시작한 영의.
비가 오기 시작한 지 제법 된 건지, 모크란의 입구로 들어가려고 하는 방문객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모두들 들어갔거나, 비 때문에 오늘은 방문을 취소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뜻밖의 방문객이 오자, 상당히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비병 난쟁이들.
“……들어갈 텐가? 아니면, 그저 비를 피하러 온 건가?”
“들어가야죠.”
영의가 입구 쪽에서 들어가겠다고 말하자, 그의 얼굴을 보고 알은체를 하는 경비병.
“그래, 그러고 보니 예전에 봤던 얼굴이군그래? 어쩌다 오늘은 그렇게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건가?”
아마 지난번에 영의가 이곳을 통과할 때 경비를 서던 경비병이 다시 이곳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 듯했다.
“……여러 가지로 말이 길어질 것 같은데요.”
경비병은 난쟁이들 특유의 호기심과 오지랖으로 영의가 이 빗속을 뚫고 온 이유에 대해 물었지만, 영의가 대답을 회피하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지랖을 부리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과하거나 하면 피해를 보는 것을 인생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흠, 알겠네. 들어가도록 하게. 그리고 꼭 몸을 말리는 것을 잊지 말고. 지하에서는 병이 퍼져 나가기 쉬우니까 말일세.”
감기에 걸리지 않게끔 주의를 준 경비병은 영의를 들여보내 주었고, 영의는 발전된 내비게이션에 의지하여 이번에는 그룬이 있는 공방까지 직통으로 갈 수 있었다.
제3공방.
늘 쇠를 두들기는 소리와 수많은 작업 소음으로 인해 시끄러운 이곳은 지금 다른 쇳소리와 말소리로 시끄러웠다.
“오늘이 결행일이라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해 줘야 우리가 참여를 하지 않겠나!”
한 난쟁이가 그룬에게 무언가를 따지듯 물었고, 그룬이 침착하게 그 난쟁이에게 대답하고 있었다.
“말리, 자네의 마음은 알고 있네. 그러나 이번 계획에서는…… 아, 왔군. 그 해답이.”
그룬이 대화 도중 공방의 입구 쪽을 바라보며 해답이 왔다고 하자, 이내 공방 안의 모든 난쟁이들이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공방에 오자마자 수많은 시선을 받게 된 영의는 잠시 멈칫했다.
수십 쌍의 눈이 자신을 쳐다보기 시작하자, 없던 부담감도 생겨날 법했으나 이미 아카데미에서 겪었던 일이니만큼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있었다.
“……후우, 밖에 비가 엄청 오더라고요. 다 젖었네요.”
태연하게, 바깥 날씨를 언급하며 자연스럽게 공방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영의.
그룬은 그런 영의를 보며 자신의 옆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리로 오게. 불을 지필 테니 몸 좀 녹이고.”
“아, 감사합니다.”
화륵-
용광로에 작게 불씨를 유지한 채 잠들어 있던 불은 그룬의 손길에 금방 타올랐고, 이내 영의의 몸을 따뜻하게 데워 주기 시작했다.
“후우…… 좀 낫네요.”
“그래, 괜찮다니 다행이군.”
그렇게 영의와 그룬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쳐다본 수많은 난쟁이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서지 않고 있었다.
비밀리에 진행되는 자신들의 계획에 갑작스러운 외부인을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 심지어 동족도 아니고 인간이라니.
방금 전, 그룬에게 질문을 하던 말리라는 난쟁이가 총대를 메려는 듯 앞으로 나와서 영의와 그룬을 번갈아 가며 가리켰다.
“인간에, 그리고 그런 인간을 계획에 무작정 끌어들인 자가 우리의 대장이라니! 그룬, 내 자네의 망치질 솜씨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자네가 우리에게 이 인간을 동참시켜야 한다는 명확한 믿음을 주지 못한다면 나는 이 계획에서 빠지겠네!”
말리는 계획에 동참하고 그 비밀을 유지할 정도의 의리는 있었지만, 그룬이 하는 모든 일을 믿고 맡길 정도의 신뢰까지는 없는 듯 보였다.
“말리, 아무리 그래도 그룬과 함께해 온 세월이 있는데…….”
“내가 지금 우리 목숨 때문에 이러나?! 가족들은! 또 다른 동포들의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으니 이러는 거지!”
또 다른 난쟁이가 말리를 진정시키려 하였으나, 말리는 이번 계획이 실패했을 때의 뒷감당이 두려운 듯했다.
아니, 정확히는 실패한 이후의 후폭풍에 희생될 난쟁이들이 걱정되는 듯했다.
그룬은 그런 말리와 말리의 의견에 동조하듯 주변에서 무의식적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난쟁이들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래, 나도 자네의 마음을 잘 아네. 우선 내가 이 계획을 결행하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된 이 인간 친구의 능력을 보면 자네들도 생각이 달라질 걸세.”
영의의 능력과 비늘의 상세한 비밀에 대한 것을 본 적 없지만 의리와 난쟁이들의 미래를 생각해 이곳에 참여한 난쟁이들도 몇몇 있었으므로, 그룬은 계획의 신뢰성을 공고히 할 마음으로 영의의 능력을 보여 주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게. 내 금방 보여 주도록 하지.”
자신의 개인 공방으로 들어갔다가 곧바로 천에 감싸진 물건을 들고 나오는 그룬.
몇몇 난쟁이들은 칼라미트의 비늘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던 건지, 그것을 들고 나왔다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그룬이 숨겨 뒀던 비늘의 존재를 몰랐거나 그 특성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난쟁이들은 갑자기 들고 나온 새로운 물체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보게, 이 친구들에게 그걸 한번 보여 주게나. 우리들이 미래를 우리의 손으로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저 무시무시한 용들에게도 약한 구석은 하나라도 있다는 그 증거를!”
그룬은 열의에 가득 찬 눈으로 영의에게 비늘을 건네주었고, 아직 몸이 덜 마른 영의는 주변 난쟁이들을 조금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보다, 이거 훼손해도 되는 거예요? 귀할 텐데.”
귀하디귀한, 모크란에서도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용의 비늘을 손상시키는 일이니 주저하는 영의였지만 그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얼마든지 부숴 버리게. 놈이 차지한 국고에 일부만 손상된 비늘 따위야 얼마든지 있을 테니. 아니, 아주 가루로 만들어 버리게!”
“네, 그럼…… 갑니다.”
영의는 난쟁이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비늘을 양손으로 치켜올린 뒤 뇌기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파직, 파지지직!
아직 몸에 물기가 남아 있었으므로 평소보다 더 요란하고 눈부신 스파크가 튀어 올랐고, 그것의 시각적 효과는 굉장했다.
“허어!”
“인간의 몸에서 벼락이!”
그리고 그것을 보며 놀라는 난쟁이들.
“어떻게 하는 거지……?”
“인간들은 매번 놀라운 발상을 하는군그래.”
하지만 처음 보는 광경에 대한 그들의 놀라움은 호기심으로 바뀌었고, 이내 한 명의 난쟁이가 비늘에 생기는 변화를 발견했다.
“비늘이……! 비늘이 부서진다!”
“저, 정말이다!”
“비늘이……! 비늘이 마치 석고, 아니 활석처럼!”
영의의 손에 들린 비늘이 점점 그 특유의 색을 잃어 가더니, 이내 잿빛으로 변해 바닥에 가루가 떨어지는 것을 보자 난쟁이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거라면……!”
“놈이 회룡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겠군!”
난쟁이들 중 계획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감에 차는 이가 있는가 하면, 몰랐던 사실을 알아내어 호기심을 충족한 것에 만족하는 난쟁이도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비늘을 보며 웃음을 짓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좋아! 이거라면 가능하겠군!”
“그룬! 자네의 평가를 절하했던 무지한 나를 용서하게! 이 말리가 나이를 먹어 판단력이 흐려졌나 보군!”
모든 난쟁이들이 이미 용에게서 해방된 것처럼 기뻐하며 웃고 있는 가운데, 말리를 포함한 몇몇 난쟁이가 그룬에게 다가왔다.
비늘에 대해서도 알고 있던 상당히 친분 깊은 난쟁이들은 그룬과 영의를 번갈아 쳐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럼, 작전의 시작까지 기다리면 되는 건가?”
“그렇지. 그동안 조금 여유가 있으니, 뭔가 먹을 사람은 먹고…… 볼일을 볼 사람은 공방의 화장실을 다녀오도록 하게. 비밀 유지를 위해서 공방을 나가는 이는 없어야 하니.”
그룬은 기밀 중의 기밀까지 보여 줬으니, 이제 기밀 유지를 위하여 공방을 폐쇄하기로 했다.
이 자리에 모인 난쟁이들 중에 배신을 할 이는 없다고 자부할 수 있었기에 불만을 품을 이가 하나라도 있을 법했지만, 그들 또한 기밀 유지의 중요성을 알았기에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그때, 영의가 그룬에게 작게 속삭였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죠?”
“흐음, 대략 3시간 정도일세. 별것 아닌 물건 하나를 만들 시간이긴 하지만, 그리 길지도 않지.”
그룬의 대답에 영의는 대략적인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3시간…… 3시간이라.”
이내 뭔가 결론이 나온 듯, 고개를 끄덕인 영의는 주머니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툭, 툭.
주머니에서 나올 법한 크기의 것들이 아닌데도 계속 뭔가가 나오자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난쟁이들.
“그럼, 잠깐 뭐라도 먹을까요.”
영의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들은 비닐봉지에 싸인 이런저런 것들이었고, 그것들 중 하나의 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콩나물 : 국내산]
“오늘은 콩나물국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