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6)
그룬의 이야기는 상당히 어둡고, 슬픈 이야기였다.
‘……이야기로만 볼 때는 몰랐는데, 실제로 들어 보니 되게 암울한 부분도 많구나…….’
고아 출신으로 형제 같던 이들의 배신과 죽음을 맞이했지만 밝게 살아가고 있는 베키와 아직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세상을 뒤엎으려 하는 암중 세력이 도사리는 무림.
그저 살기 위해 연구를 했지만 원치 않는 명성을 얻어 버린 호엔하임.
인간들이 옮긴 전염병으로 가족을 잃는 고통을 겪었지만, 역으로 그 병을 치료하는 데에 인간들에게 도움을 받았던 숲요정족의 시라와 미딜까지.
‘내가 본 이야기들은…… 모두 밝은 부분만 봤었던 걸까, 아니면 세상 어디를 가든 어떤 종족을 만나든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은 걸까?’
영의가 문득 자신의 경험들을 되돌아볼 때, 그룬은 이야기를 모두 끝내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수많은 밀고자와 배신자들의 수작과 연구 도중 손실로 인해 지금 모크란에 남은 비늘은 이것 하나뿐이네.”
“네…… 그렇군요. 근데, 이 얘기를 저한테 해 주신 이유가 뭐죠?”
그룬은 용들의 비밀과 모크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다고 하였으나, 용들의 비밀은커녕 비밀 비슷한 무언가도 들은 기억이 없었다.
‘아닌가? 내가 뭔가 못 들은 게 있었나?’
영의는 순간 자신이 놓친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으나, 다행스럽게도 그룬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부정해 주었다.
“그것이 지금부터일세. 칼라미트의 앞잡이 놈들…… 그러니까 비늘을 파괴하고 다니거나 그 힘에 겁먹은 겁쟁이들 말일세. 그놈들이 권력을 잡고 정보를 통제하였기에 대부분 사람들은 모르지만 그래도 몇몇 나이 든 난쟁이들은 진실을 알고 있네.”
그 진실이란 것은 바로, 드래곤이 유독 벼락에 약하다는 점이었다.
용암과 파도, 바람과 같은 자연의 공포에도 아랑곳 않는 드래곤이었지만 벼락에는 어째선지 약하다는 것이었다.
‘……비행하고 다녀서 전기에 약한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아버님의 말씀과 다른 나이 든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고 검증을 해 보았네. 그리고, 자네의 도움으로 완전히 확신했고.”
영의의 도움으로 확신했다는 것은 벼락…… 즉, 영의가 쏜 뇌기에 의해 비늘이 약해진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면, 혹시 저한테 할 부탁이란 게…….”
그룬의 말에, 영의는 혹시나 싶은 마음을 가지면서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내심 부정하고 싶었다.
‘어쩐지 보상이 엄청나더라니, 진짜 드래곤을 잡으라고? 비늘이 보상인 이유가 있었던 거네. 대체 어쩌다가 내가 이런 걸 하게 된 거지……. 아니지, 그래도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알림이가 맡긴 게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이 분위기면 그 드래곤을 잡아 주시오! 라는 분위기인데?’
영의의 말에, 그룬은 그의 짐작이 맞다는 듯 매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네.”
‘아, 망했네.’
그룬이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영의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확답을 듣기 위한 질문을 던졌다.
“저보고 그 드래곤을 잡…….”
“놈을 쫓아내는 데 도움을 주게.”
둘이 서로 생각한 바가 다르자, 영의는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는 건 아니었군요.”
영의의 입에서 드래곤을 잡는단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이 놀랍다는 듯, 그룬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당연히 아니지. 벼락에 맞아 죽어 가던 녀석도 몸짓 하나만으로 모크란을 초토화시켰네. 그걸 어떻게 죽이란 말인가?”
“아니, 그러면 저기 만들어 뒀던 무기들은 뭔가요? 비늘을 뚫을 용도로 만든 것 같던데.”
드래곤을 죽일 게 아니라면, 굳이 비늘을 뚫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좋은 무기를 만들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영의가 그런 의문을 품고 물어보자, 그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계획에 사용해야 하니 만들어 둔 게 맞네. 일단 비늘을 뚫을 필요가 있었으니.”
“그럼, 그 계획이란 게 뭐죠?”
계획에 대한 질문을 받은 그룬은 아직 상세한 계획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것은 이르다고 생각한 건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이것부터 이야기해 주지. 칼라미트가 이 도시에 들어오고 나서 지금까지, 수많은 용기 있는 선조들이 칼라미트의 약점을 찾아내기 위한 시도를 했네. 칼라미트는 벼락에 맞은 자신의 비늘들을 떼어 내는 데 난쟁이들을 부리기도 했지.”
“……암살당할 위험이 있을 텐데, 본인이 하지 않고요?”
“그게 의문이지만, 아마 귀찮았거나 우리가 그럴 깜냥이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겠지. 아무튼, 비늘을 관리하는 작업에 불려 갔던 선조들이 정리한 게 있네.”
-칼라미트의 비늘 중 회색으로 완전히 물든 것은 뽑아내야 했고, 변색된 것은 최대한 회색 부분을 없애고 그 정도가 심하다 판단되면 뽑아야 했다.
-비늘의 바로 아래에 가죽이 있으며, 가죽은 비늘보다 연약한지 종종 작업 도구에 생채기가 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을 직접 찔러 볼 용기를 가진 난쟁이는 없었고, 생채기라고 해도 칼라미트가 반응하지 않은 것을 보아 별 효력은 없는 듯 보였다.
-드물게, 칼라미트 본인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가 있었다. 아마 권태가 그 원인이라 생각하지만 용의 비늘은 재생되지만 그것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뽑아내고 새것이 돋아나는 걸 기다리는 게 더 빠르다고 한다.
그룬이 이야기해 준 세 가지의 특징을 듣고, 영의는 뭔가 감이 잡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다 낫지 않은 거군요?”
“맞네. 아직도 정기적으로 난쟁이들이 그곳으로 가서 비늘을 관리하고는 하지. 사실은 관리라기보다는 감시지만.”
그 말을 마친 그룬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선 뒤, 공방의 벽으로 다가가 벽면을 두들겼다.
쿵, 쿵.
“이것, 이것들이 보이나?”
벽을 두들기자, 놀랍게도 벽 안에 숨겨진 쇠파이프 같은 것이 겉으로 드러났다.
“……이게 뭐죠?”
“환기구와…… 벼락을 연결하는 장치지. 아주 오랫동안 비밀리에 준비된 것이야.”
그룬은 그것을 매우 자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고, 이내 다시 쇠파이프를 숨겼다.
“즉, 계획은 간단하네. 모크레튼 산맥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불지. 우리의 역할은 그 번개를 끌어다가 곧바로 칼라미트에게 꽂아 넣는 것일세.”
자신들의 힘이 되지 않으니, 자연의 힘을 빌려 보겠다는 계획에 영의는 나름 그럴듯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동시에 허술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걸로, 죽을까요?”
“아니, 내 말을 듣지 못했나? 그저 놀라게 하는 것뿐일세. 놈은 지금 여기서 몸을 회복시킬 때까지 가만히 있을 것 같지만 여기서도 벼락을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면 곧바로 도망가지 않겠나?”
말로만 된다면 좋겠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잘 풀리는 경우가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영의였다.
그리고 영의보다 몇 배를 살았기에 그것을 익히 알고도 남을 그룬이 희망에 가득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자 오히려 불안해지는 영의.
“정말 그렇게 될까요?”
“유독 벼락이 심해 환기구에서 천둥소리가 지하 도시의 내부에 울려 퍼질 때, 칼라미트는 보금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경향이 있네. 아직도 자신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벼락을 잊지 않은 게야.”
그룬의 작전은 의외로 간단하면서도 생각보다 설득력이 있었다.
트라우마를 자극하여, 제 발로 이곳을 떠나게 하는 것.
잘만 통하면 바로 성공인 작전이고, 잘 통하지 않더라도 변명거리가 있다고 하는 그룬.
“지금 칼라미트의 방에 추가 환기구 개설 작업을 진행 중이고 막바지에 다다랐네. 그 환기구는 그저 굴만 파고 끝나는 게 아니라, 내부를 철제 받침대로 보강하는 작업이 있기에 벼락이 들이쳐도 받침대를 타고 들어온 벼락이라고, 우연이라고 넘기면 그만이지.”
조금, 아니 생각보다 많이 허술한 변명에 영의는 고개를 갸웃했다.
“과연 그런 변명이 통할까 싶은데…….”
“칼라미트는 의외로 이성적일세. 합리적이거나 합당하다는 판단만 내려진다면 가만히 있지. 실제로 이곳의 환경과 지리적 요건을 이유로 공물의 변경을 승낙하기도 했고.”
“공물의 변경이요?”
영의는 정말 안 해 줄 것 같은 부탁을 칼라미트가 들어줬다고 하니 되게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조공국의 조공을 받는 국가가 다른 나라의 형편을 헤아려 조공을 적게 받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갑의 입장에서는 윽박질러도 될 텐데…… 그걸 합의를 봐줬다고?’
그룬은 영의의 의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놈이 요구한 것은 다양한 야채와 신선한 식품들이었지만 모크란의 특성상 그런 것은 구하기 힘들었고 놈도 그걸 이해해서 다른 것으로 타협을 했지.”
“아…….”
생각해 보면 먹을 것이라면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드래곤의 덩치를 생각해 보면 뭘 먹더라도 먹어야 할 테니…….’
그렇게 일련의 설명이 끝나고, 그룬은 영의를 보며 진지한 태도로 부탁을 해 왔다.
“내가 부탁할 것은, 다음 비늘 손질 때 자네가 참여해서 몇몇 비늘들에 구멍을 내 달라는 것이네.”
생각보다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드래곤의 몸에 직접 접촉하라는 무모한 부탁.
“구멍이요……?”
“그래, 본래는 저 무기들로 위험성 높은 작업을 강행하려 했지만…… 자네가 도와준다면 매우 은밀하게 끝낼 수 있겠지.”
그룬은 본래 창고에 넣어 둔 무기들로 비늘에 구멍을 내고, 거기에 피뢰침처럼 철사 같은 것을 꽂아 둔 뒤 환기구에 낸 구멍으로 벼락을 유도하려고 한 것으로 보였다.
“벼락이 쇠붙이에 이끌린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 그래서 환기구 주변에 벼락 방지용 쇠말뚝도 여러 개 박아 두었고. 하지만, 지금 새로 공사 중인 환기구에는 벼락을 곧바로 유도하기 위해 특수한 장치를 해 두었네.”
바위 부분과 환기구 틈새에 따로 마감 처리를 해 두었고, 환기구의 안쪽에는 철제 받침대로 또 다른 쇠기둥을 넣어 벼락이 직접 타고 흐르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겉보기에는 그저 받침대지만 잘 보면 모두 이어져 있어 산꼭대기의 벼락이 이곳 지하까지 내려오도록 만들었지.”
따로 실험까지 해 봤다는 말을 하며 자신감 있게 가슴을 두드리는 그룬.
“놈의 가죽도 두껍고 튼튼해서, 어지간한 연장이 스치거나 긁은 것으로는 반응도 하지 않네. 자네의 벼락으로 비늘을 약화시키면, 그다음부터는 나와 동지들이 알아서 하겠네.”
칼라미트가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의 보금자리에 누워 있을 때, 작업을 마친 난쟁이들이 자리를 피하고 곧바로 환기구 공사를 끝낸다면 남은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어떤가, 내 부탁…… 들어주겠나?”
“눈치채지 않을까요? 눈에 띌 텐데.”
다른 생물도 아니고, 무려 드래곤이다. 그리고 과거에 번개를 맞고 그것에 트라우마가 있는 드래곤.
자신이 아무리 작게 뇌기를 뿜어낸다고 해도, 그것을 감지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영의의 마음속에 생겨났다.
“걱정 말게. 근래에 놈은 비늘을 재생시키기 위해 우리들이 작업을 하는 도중에도 계속 잠들어 있으니.”
이제 비늘들은 거의 다 회복이 되었고, 그것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고 했다.
“잠깐, 거의 다 회복이 됐다면 왜 계속 부르는 거죠?”
“그만 오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일세. 거사가 성공하기 전까지, 우리는 최대한 놈의 비위를 맞춰 줘야 해.”
때문에 요즘은 거의 비늘을 광내거나 장식을 달아 주는 작업을 하는 게 대부분이라고 답했다.
“광을 내주는 것은 놈도 제법 흡족해하더군. 하지만 곧 그 광이 죄다 회색으로 물들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거야……. 크크크.”
그룬은 희열에 젖은 웃음소리를 내며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지었고, 영의는 그것을 보며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림아, 이거 성공할 수 있을까? 그냥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닐까?’
[사용자, 저는 사용자가 개체명 그룬의 계획에 동참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사용자가 사용하는 힘이 개체명 칼라미트의 두려움과 동일하니 비상시에도 사용자의 목숨은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응할 시에 얻는 이득이 매우 큽니다.]
알림이에게서 확인과 추천, 심지어 설득력 있는 설명까지 듣자 드디어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영의.
그룬의 기나긴 계획 설명과 사연, 준비 과정까지 모두 들었음에도 반신반의하던 그였지만 알림이의 말 한마디에 곧바로 생각을 바꾸었다.
“만약 이번 일에 성공하고 살아남는다면 내 자네에게 일생의 역작을 만들어 주겠다고 맹세하지.”
그리고 영의의 마음이 바뀐 것도 모른 채, 영의를 설득하기 위해 필사적인 그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