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5)
본디 자연에 속한 것들은 자연을 거스르지 못한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기술이 발달할 만큼 발달한 인간들도 자연의 분노 앞에서는 맥을 못 추기 때문이다.
태풍과 허리케인, 해일과 홍수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물론 그것들을 피하거나 버텨 내는 쪽으로 기술을 연구하고 살아남는 인간들도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다.
매년 발생하는 자연재해에 피해를 본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니까.
하지만 그런 것마저 없는 자연의 동물들은 인간보다 더더욱 무력하다.
그들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본능과 직감이 더욱 발달했기에 잘 살아남기도 하지만.
그리고 그 말은 단지 지구뿐만이 아닌 다른 세계의 존재인 드래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그룬은 옛 동화나 전설을 이야기해 주듯이, 모든 생물이 생겨날 때를 이야기했다.
태초부터 모든 생물은 신이 창조했으며, 자연환경과 세상 모든 것을 만든 다음 알아서 살라고 한 뒤 은거했다고.
대다수 생물들이 죽기 전 자손을 만들고 그 자손을 독립시키는 것은 거기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하지만 그런 생물들 중, 정면에서 신의 의도를 거부하는 한 생물이 있다고 했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오래 살며, 지금껏 자연사라는 것이 관측된 적 없는 생물이지. 바로 드래곤일세.”
말 그대로 불멸이나 영생을 직접 보여 주듯, 엄청난 세월을 살아오며 마땅한 천적마저 없는 드래곤들.
그런 드래곤들은 자연마저 죽이지 못하는 듯, 뜨겁게 끓어오르는 화산의 용암에 사는 드래곤이나 차갑고 어두운 바다 깊은 곳에서 사는 드래곤들이 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고 한다.
“바람에 날려 가지 않을 정도로 강인하고 무거운 몸에, 용암마저도 버텨 내는 그런 생명체이니 지상의 모든 존재들은 그런 드래곤을 두려워했지.”
공포의 대상을 이겨 내거나 도망갈 수 없다면 결국 경외하고 섬기게 된다는 말과 함께, 드래곤은 신적 대상이 되어 갔다.
그리고 드래곤들도 그런 숭배를 썩 나쁘게 여기지는 않았는지, 자신을 섬기는 자들이 바치는 공물을 흡족히 받으며 자비를 베풀었다.
“하지만, 그런 세월이 너무 길어졌던 거지……. 어느 순간부터 그런 공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드래곤들의 성격이 바뀌기 시작했네.”
별것 없더라도 공물을 바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만족하던 드래곤들은 공물의 질과 양을 신경 쓰게 되었고, 이내 그것을 당연시 여기다가 결국 성격이 탐욕스럽게 변해 버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은 드래곤이 있다고 하면 냉큼 공물을 바치지. 드래곤들은 탐욕스럽지만 또 그만큼 영리해서, 과한 공물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축을 더 써먹기 위해 적당히 받아서 관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네.”
그리고, 모크레튼 산맥의 지하는 그런 드래곤이 없는 청정 지역이었다.
애초에 굴이고 뭐고 암반밖에 없는 탓에 뭐가 있으려야 있을 수 없었던 곳이니만큼 드래곤 또한 없었던 것이다.
그런 모크레튼 산맥의 지하를 개발하고, 파내어 넓힌 뒤 자신들의 도시를 건설했던 난쟁이들.
그런 난쟁이들의 도시 모크란은 드래곤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를 오랜 세월 동안 보내고 있었다.
공물이 없는 만큼 부는 고스란히 남았고, 그것이 축적되던 도중…… 어느 날 그들에게 재앙이 찾아왔다.
“……돈과 금의 냄새를 맡고, 탐욕스러운 드래곤이 찾아왔다고들 하지. 하지만 그건 잘못된 이야기일세.”
그룬은 그 이야기를 하며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내 할아버님께서 해 주신 이야기일세…….”
번개와 비바람이 유독 심해 산맥 바깥을 내다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날, 경비병으로 근무하던 때에 엄청난 천둥소리가 났고 도시의 입구에 무언가 거대한 것이 떨어졌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잘려 나가거나 떨어져 나간 산의 덩어리인 줄로만 알았다고 하셨지. 그만큼 거대한 것이 갑자기 나타날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바윗덩어리와는 너무 다른 모양새에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본 결과, 그것은 드래곤이었다. 그것도 살아 있는 드래곤!
“어째서인지 비늘이 대부분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그때 당시 그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하지는 않으셨지. 드래곤이란 걸 본 적이 없는 세대셨으니까.”
모크란이 생겨날 당시에도 드래곤을 본 난쟁이는 없었으니, 그룬의 조부가 모크란에서 처음으로 드래곤을 본 난쟁이가 된 것이다.
하지만 무지에서 오는 것이 공포란 말이 있듯, 역으로 무지하면 그 대상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일도 없는 것이다.
드래곤을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겪어 본 적 없는 세대였던 그룬의 조부는 그 발견을 곧바로 보고했고, 온 도시의 난쟁이들이 드래곤을 보기 위해 몰려왔었다고 한다.
“당장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작업 중인 난쟁이들을 제외한 모두가 왔다고들 하셨지. 세공이나 조형의 경우에는 작업물을 들고 왔다고 하시더군.”
그렇게 모크란의 앞에 쓰러진 드래곤의 모습을 현장에서 곧바로 조각해 내거나 그림으로 남긴 난쟁이들도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드래곤의 힘에 대해 무지했던 모크란의 선조들과 이미 쓰러진 상태이니 여차하면 죽일 수 있겠다 판단한 난쟁이들은 드래곤을 산맥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고 하네.”
지금은 2층집 하나 정도 크기에 불과한 모크란의 출입구들은 본래 군대가 너끈히 지나가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했다.
수많은 상인들과 여행객들이 오가던 도시였으니만큼, 입구의 확장은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지금은…… 그 정문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이 대부분 축소되어 있지. 정문은 칼라미트를 위한 문으로 지금은 사용되지 않고 있네.”
그리고 칼라미트…… 당시에는 이름 모를 드래곤을 도시의 안에 들여보낸 난쟁이들.
그 몸체를 보기 위해 나갔던 이들을 빼고 도시에 남았던 모든 난쟁이들과 여행객들, 그리고 상인들은 그런 칼라미트를 구경하기 위해 지하 도시의 중앙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드래곤이라니! 그것도 빈사 상태로! 저 몸에서 나오는 물건들을 빼다 팔면…… 나는 부자가 될 거야!’
드래곤을 보며 돈에 대한 욕망을 감출 수 없었던 상인들.
‘드래곤을 실제로 보다니! 고향으로 돌아가면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하지만, 비늘 하나라도 떼어 간다면…….’
모크란을 구경하기 위해 왔다가 더 큰 구경거리를 보고, 자랑할 마음에 작은 기념품을 챙기려던 여행객들.
‘드래곤이 신이니 뭐니 하더니, 결국은 이렇게 쓰러져 죽는 생물에 불과했군! 하하하하!’
그리고, 누군가가 쓰러진 드래곤을 보며 비웃는 말로 인해 모두가 동조하듯 크게 웃기 시작했다.
드래곤을 실제로 본 사람, 그중에서도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만큼 대부분은 드래곤을 이야기로만 들었기에 잘 믿지 않았다.
그렇게 광장에 널리 퍼지던 웃음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한 상인이 계산을 해 보며 쩔그럭거린 금 소리 때문일까? 어쩌면, 한 무모한 여행객이 비늘이나 가죽을 뜯기 위해 드래곤의 몸에 가져다 댄 칼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떠한 자극이 쓰러져 있던 드래곤을 깨워 냈고, 그 거대한 체구를 일으켜 광장에 가득한 난쟁이들과 인간들을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얌전히 듣던 영의는 이야기의 뒷부분을 짐작하면서도,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곧바로 물어보았다.
“……그걸, 막거나 하진 않았나요? 경비병들이 있었다고 하셨는데.”
틀림없이 광장의 혼란을 막기 위해 누군가가 통제를 하고 있었을 텐데, 난쟁이들은 드래곤에게 다가간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몰랐던 건가?
“그 많은 이들을 어떻게 막겠나? 그리고, 난쟁이들은 태생적으로 호기심이 강한 종족일세. 처음 보는 것을 살펴보는 행동을 막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경비병들 또한 알고 있었지. 그리고 뭔가 훔쳐 가려 한들 그렇게 큰 비늘을 어떻게 훔쳐 가겠나? 하는 방심도 있었지.”
그룬은 비늘을 손으로 가리켰고, 그 큰 크기에 영의는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놈이 선조님들…… 수많은 난쟁이들과 인간들을 보는 순간, 우리 난쟁이들에게는 재앙이 닥쳤지.”
칼라미트는 광장에 가득한 난쟁이들과 인간들을 보고 잠시 얌전하게 있다가, 곧바로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른 건 없었네. 비늘도 없는 몸뚱어리로 움직이는 것. 그 단순한 행위 하나만으로도 광장에 모여 있던 이들을 몰살시키는 데에는 충분했으니까.”
칼라미트는 그렇게 행사나 축제 분위기로 가득했던 광장을 순식간에 공포와 살육의 현장으로 바꾸어 버렸고, 이내 지하 도시의 가장 깊고 안전한 보물고 쪽으로 향했다고 한다.
“놈은…… 짐승과도 같이 눈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며 지나갔네. 모크란의 자랑이자 역대 최고의 예술품이자 관광 명소였던 궁전도 그렇게 파괴되고 말았지.”
칼라미트는 궁전의 안쪽, 국고 내부에 있는 금과 보물의 산 안쪽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대학살극 이후, 몇몇 인망 높은 난쟁이들이 칼라미트에게 찾아가 설득과 회유를 시도했네.”
국고 점령 당시, 모크란 궁전에서 행정관으로 근무하던 코르손이 직접 찾아갔다고 했다.
‘위대한 드래곤이시여! 간곡히 부탁하건대, 저희의 소중한 국고에서 나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싫다.
‘원하는 건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 더 안락한 보금자리도, 금고에 든 것보다 더 아름답고 값비싼 보물도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따위 것은 필요 없다.
“할아버님이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당시 도시 내에 협상 내용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었다지.”
모든 협상은 전혀 통하지 않았고, 그나마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칼라미트란 이름과 음식과 물은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드래곤으로부터 안전하던 지역인 난쟁이들의 지하 도시 모크란은, 자신들의 손으로 드래곤이란 재앙을 직접 불러들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할아버님은 광장 쪽으로 드래곤을 운송한 후,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반응을 조금 구경하다가 아직 근무시간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입구 쪽으로 경비병 역할을 하러 돌아가셨네. 그 긴 근무시간 덕분에 살아남으셨지만.”
그렇게 도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바깥으로 나갔던 그룬의 조부는 어느새 뇌우가 그쳐 맑게 갠 하늘 아래에서 회색과 검붉은 색의 물체들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게…….”
“맞네, 바로 저 비늘이지.”
그룬의 조부 또한 난쟁이였고, 드래곤을 처음 발견하고 운송 중에 만져 보고 구경까지 했기에 광장에 남지는 않았지만 또 따로 챙길 게 있다면 얘기가 달랐다.
동료 경비병과 함께 비늘을 구경하러 간 그룬의 조부는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비늘들을 챙겼고, 그것을 친구들에게 나눠 주기 위해 도시로 반입했다고 한다.
“그리고…… 도시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소식을 들으시고는, 그 비늘들을 곧바로 도시 내의 가장 유명한 공방들에 맡기셨지.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규격화된 공방 없이 대부분 자영업이었네.”
그룬의 조부는 비늘들을 건네주며 그것을 뚫을 수 있는 무기들의 개발을 부탁했다고 한다.
공방의 장인들도, 모두 광장에서의 살육을 잊지 않았기에 그 부탁을 받아들였고.
“하지만…… 드래곤의 난동에 복수심을 불태운 이들이 있다면, 그 반대로 공포와 절망에 빠진 이들도 있었지. 드래곤을 따르고 섬기기 시작한 이들도 생겨난 게야.”
그룬은 그 이야기를 하며, 어두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