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19)
자신에게 할당된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인 미국 쪽 인터뷰를 끝내자, 화연은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다른 업무는 비서실이나 훈이한테 맡기면 돼. 길드장님은…… 뭐, 알아서 하시겠지.’
자신 대신 업무에 치일 정훈과 정부와의 협상을 매일같이 해야 하는 영석에게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지만, 죄책감만 들었을 뿐 나머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날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막는다면 전부 치울 거고!’
화연은 그렇게 굳센 다짐을 하며 영의를 잡아끌었다.
“……정말 그냥 가도 되는 거 맞아? 일 많은 거 아니었어?”
그리고 친절하게도 화연의 업무와 길드에 대해 걱정해 주는 영의.
“괜찮아요, 휴가를 두 번이나 취소당했으니까. 뭐…… 여차하면 확 그만두면 되는 거고.”
영의는 화연이 길드를 그만둘 의사도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그만둔다고? 계속 활동할 거 아니었어?”
“음…… 의리는 있지만, 그렇다고 계속 저를 희생할 순 없는 법이잖아요. 여차하면 쓸 만한 후임들 키워서 넣어 버리려고요.”
“후임?”
화연은 혹시나 자신의 퇴직이 여의치 않아진다면 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투입하려고 했다.
모든 것은 그녀가 은퇴 후 영의와 함께할 생활을 위해서였다.
“네. 수연이도 괜찮고…… 지연이는, 단군 길드장이 아버지니까 안 되려나?”
“응?”
영의는 지연의 집안에 대해 처음 듣는지, 지연의 가족사를 전해 듣자 의문을 표했다.
“잠깐, 지연이네 아버지가 단군 길드장이라고?”
“네, 몰랐어요?”
화연은 영의가 잠시 실종되었던 당시 그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정보를 구하던 과정에 자연스럽게 단군 길드장 황준과 겹치는 부분이 생기며 지연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물론, 영상을 구해 왔던 시점부터 범상치 않다는 심증 정도는 가지고 있었지만.
“난 당연히 처음 듣는 얘기인데……?”
하지만 그건 전혀 알지 못했다는 영의의 반응에 본인도 놀라는 화연.
“네? 그것도 모르고 훈련시키고 있었어요?”
‘그런 것도 어느 정도 보고 받은 줄 알았는데……?’
“아니, 나는 그냥…… 쓸 만해 보여서 받았지. 그리고 절박해 보이기도 했고.”
영의의 전투 스타일이 화연의 것과 거의 동일해서 그 자리에서 곧바로 영의에게 가르침을 청했던 지연.
사실, 화연의 전투 스타일과 영의의 전투 스타일은 서로 비슷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학창 시절, 서로 붙어 다니며 가장 많은 대련을 하고 서로를 가르쳤던 영의와 화연.
물론 가르침을 받은 건 화연이 대부분이었지만 지속적인 대련은 결국 둘의 스타일이 비슷해질 수밖에 없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영의가 보여 준 것이 자신과 같은 능력이라는 것도 그녀에게는 또 다른 자극제가 된 것이리라.
“그런 것도 모르고 그렇게 충동적으로……. 에휴.”
화연은 영의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고, 영의는 그런 화연의 반응에 주눅이 들었다.
“아니, 어느 정도는 절제한다니까? 그보다 단군 길드장이라…… 어떤 사람이야?”
영의는 사람의 됨됨이라든가, 평소의 평판 같은 것에 대해 물어본 것이지만 화연은 각성자로서의 대답을 했다.
“길드장 전황준. 염동력을 사용하는 A급 각성자예요. 비서가 시야 보조능력을 써 줘서 원거리 저격도 가능하고요.”
“아니, 그런 걸 물은 게 아니……. 응? 염동력에, 원거리 저격?”
영의는 문득 지난날, 아카데미에서 권왕과 맞서 싸울 때 간간이 날아들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혹시, 그 사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화연에게 황준이 아카데미가 습격받을 당시 자신을 도와줬던 건가 물어보려 했으나, 지금 그런 걸 묻기에는 상황이 조금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다.
화연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자신과의 데이트라는 걸 깨달은 영의는 이내 웃으면서 주제를 바꾸려 했다.
“어디로 갈까? 원하는 데로 데려다줄게.”
화연은 영의가 무슨 말을 하려다 중간에 멈추자 신경이 쓰였다.
‘아까 하려던 말이 조금 신경 쓰이는데……. 어쩌면 그때 아카데미에서 뭔가 있었던 걸까?’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고, 황준이 영의와 만남이 있었더라면 그 이후 그에게 접촉 시도가 있었을 것이다.
‘……아냐, 신경 쓰지 말자. 선배가 괜한 짓 하지 않게. 또, 누군가 때문에 다치지 않게…….’
“일단 생각 좀 해 볼게요. 아, 바다는 어때요?”
“바다? 알겠어. 그럼 타.”
공간 확장이 각인된 주머니에서 바이크를 꺼낸 뒤, 그들은 목적지인 바다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부산.
관광 명소로 유명한 해운대는 해변가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시야의 5할이 바다요, 2할이 모래사장이며 나머지는 식당과 호텔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관광에 특화되어 있다.
물론 해수욕장 부근만 그런 경향이 짙고,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도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과 상가들이 밀집해 있다.
그리고 지금, <부시도 스피리츠>의 간부들은 모래사장에서 뜨거운 햇살을 만끽…….
“못 하고 있잖아! 아무것도 못 한다고!”
……못 하고 있었다.
“다이카 또 화낸다. 왜 저런대?”
큰 덩치를 자랑하는 만큼 식성도 엄청난 겐지.
그는 건너편 가게에서 산 햄버거를 우물거리며 짜증 내는 다이카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래사장이 있는 바다로 온다고 하니까 되게 좋아했었던 걸로 기억한다만.”
햄버거는 아니지만, 음료수를 홀짝거리며 다이카의 짜증을 함께 구경(?)하고 있는 야이바.
“아하하, 다이카. 너무 그렇게 화내지만 말고. 바다 풍경은 예쁘잖아? 봐!”
바다의 중간에 서 있는 동상과 멀리 펼쳐진 수평선, 그리고 주위로 보이는 멋진 건물들과 몇몇 바위들을 가리키는 이오리.
하지만 그런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이카는 계속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니! 아까 게 먹을 때만 해도 날이 쨍쨍했잖아! 왜 여기 오니까 어두컴컴한 건데?! 왜 구름이 껴 있냐고! 그리고, 왜 바다엔 출입 금지가 되어 있는 거냐고!”
사실, 휴가란 말을 듣자 오키나와로 갈 생각이 가득했던 다이카.
덥고 햇살이 따갑더라도 해변의 휴가를 마음에 두었던 그녀였으나, 장소가 강제로 한국으로 변경되며 그 마음을 잠시 접었다.
하지만 의외의 행운으로, 해수욕장에 갈 기회를 잡자 그녀는 들뜬 마음에 곧바로 휴가를 즐길 준비를 했다.
-갈아입을 옷도 사고! 수영복도 사고! 햇살도 즐기면서 선탠도 하고 신나게 노는 거야!
그런 말을 하며 관광지 주변의 비싼 물가를 피해 부산에 오기 전 이것저것 구입한 다이카.
그렇게 준비를 하고 신이 나서 해운대에 도착한 그녀였지만, 여건이 좋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날이 어두워져 햇살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괘, 괜찮아! 그만큼 덜 타겠지! 물놀이는 할 수 있겠지?
태닝을 위한 물품들을 집어넣은 뒤, 수영복과 갈아입을 옷을 집어 들고 어색한 표정으로 반쯤 억지로 텐션을 끌어 올리던 다이카.
하지만 바다도 그녀의 휴가를 허락하지 않은 건지, 이안류가 발생해 해변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렇게 희망과 기대가 두 번 연속으로 좌절당한 다이카는 결국 참던 설움이 폭발해 버렸던 것이다.
“으아아아! 진짜! 내가 왜 이래야 하는 거냐고! 응?!”
그런 그녀의 난동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일행들은 모두 평화로운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 이거 맛있다. 먹어 볼래?”
“맛있군. 어디서 팔던 거지?”
“저기 옆에, 노점.”
“잠깐 다녀오지.”
화내는 다이카가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되는지, 여유롭게 간식을 먹는 다른 간부 3인방.
“그래도 여행 초반에 저래서 다행이야. 안 그래?”
“……그렇지, 뭐. 적어도 5일 중에 하루 정도는 맑은 날이 있겠지?”
사실 그들이 이렇게 여유로운 이유는 다이카가 화를 내며 자신의 물건을 이리저리 집어 던지면서도 전격을 뿜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짜 화났으면 해안가에 유리나 실리콘이 좀 생겼겠지.’
‘마침 날도 흐리니까, 뇌우를 동반한 비구름이라든가.’
어차피 여행 기간은 5일이고, 오늘이 그 1일 차였으니 별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다이카! 화 다 냈으면 여기 와서 이것 좀 먹어 봐!”
“안 먹어!”
다이카는 먹을 것을 권하는 겐지의 말에도 고개를 홱 돌리며 성큼성큼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화가 단단히 나긴 했나 보군. 료랑 싸울 때 정도야.”
노점에서 간식거리를 사 들고 돌아오던 야이바가 다이카의 상태를 보며 그녀의 분노 정도를 추측했다.
“그래도 저녁쯤이면 돌아올걸?”
“물건이나 챙겨 줘야겠군. 나중에 혼자서라도 여기 오긴 할 테니까.”
야이바는 다이카가 내동댕이치고 간 물건들의 모래를 툭툭 털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근데 겐지. 여기는 소고기 먹으러 왔다고 하지 않았어?”
이오리는 겐지에게 이곳으로 오기로 마음먹었던 이유였던 소고기에 대해 물어보았다.
“어어…… 그게, 맛있는 가게는 맞는데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예약을 해야 갈 수 있다는 말에 잘 정리된 올백 머리를 긁적이는 이오리.
“이런…… 그럼 결국, 저 짜증 내는 공주님이랑 또다시 와야 하는 건가?”
“그렇겠지. 이제 저녁이나 먹으러 이동할까? 아, 그건 이리 줘.”
겐지는 쓰레기의 뒤처리를 하려는 듯 다 먹은 포장지와 용기들을 깡그리 끌어모아 손바닥으로 꽉 움켜쥐었다.
대식가인 그가 먹었던 것이니만큼 잘 눌러서 정리해도 축구공 크기는 될 만한 종이와 플라스틱, 스티로폼들이 탁구공만 한 크기로 압축되었다.
“저녁이라…… 어딘데?”
“으음…… 이제 해안가는 다 돌았으니, 내륙 쪽 음식을 먹어야겠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대구라고 막창이라는 내장 요리가 유명한 도시가 있어. 거기로 가자.”
정말 여행 내내 식사만 추구하려는 듯, 맛집을 위한 이동 경로를 짜는 겐지.
“으윽, 내장이라니…… 조금 별로인데.”
야이바와 이오리는 특별한 여행 계획이 없었기에 하루 정도는 겐지에게 어울려 주기로 했다.
“다른 맛있는 것도 많은 도시니까, 다니면서 괜찮다 싶은 곳에서 먹어. 내일은 다른 곳으로 갈 거지?”
야이바와 이오리는 겐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동 수단을 물색하고 있었다.
“흐음, 열차로 가면 되나?”
“의외로 공항도 있는 도시에다 열차까지 다니는군. 여기까진 동행해도 되겠어.”
“그럼, 난 짜증 가득한 공주님을 다시 데려올게. 이봐요, 혹시 여기 잔뜩 성질내던 일본 여자애…….”
다이카를 찾으러 간 이오리와 기차역으로 가기 위해 그를 따라가며 휴대폰으로 이것저것 검색하는 야이바와 겐지.
그들이 해변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하자, 저 멀리에서 얌전히 바다를 구경하고 있던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그들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기 시작했다.
* * *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해변가는 여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브라질 제2의 도시이며 수도만큼 유명한 이곳은 그만큼 부유하고 발달한 부분이 있으며, 거대 예수 조각상이 랜드마크인 화려한 곳이다.
다만, 예수가 지켜보지 않는 곳은 자애와 사랑이 없다고 말하듯 조각상 뒤쪽으로는 빈민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빈민가를 여유롭게 걸어 다니고 있는, 고급진 옷차림의 한 남자.
남자는 마치 관광객처럼 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고, 이 지역을 지나다닐 때 흔히 가져야 하는 경계나 긴장을 하나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 남자의 외모는 백인과 동양인의 혼혈이었고, 백인의 특징보다 동양인의 특징이 강해 보였기에 곧바로 뒷골목 양아치들의 표적이 되었다.
남자의 앞과 뒤를 슬그머니 막아서고는 칼을 꺼내 위협하는 양아치들.
“이봐, 중국 녀석! 죽기 싫다면 가진 거 다 내놓고 사라져.”
“아니, 그냥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지.”
번역기를 살 만큼의 돈이 없는 뒷골목 양아치들이었으나, 남자는 번역기가 있어 그들의 말을 알아들었다.
“흐음, 뒷골목이 원래 이런가? 양아치처럼 곧바로 사람을 위협하는 게?”
하지만 위협을 받은 사람치고는 너무 여유롭고 차분한 말을 하는 남자.
“뭐라고?”
“진짜 위협이 뭔지 보여 줄…….”
양아치들은 태연한 남자의 말에 칼을 휘두르며 위협하려고 했으나, 그 움직임은 제지되고 말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듯, 뒷골목의 벽 틈새에서 한 그림자가 재빨리 튀어나왔다.
푸욱-
탁, 탁, 타앙!
빠르게 튀어나온 그림자는 양아치들에게서 칼을 빼앗은 뒤, 그들의 손목에 칼을 쑤셔 박고는 벽에 박아 버렸다.
“으아악!”
“내 손!”
양아치들은 갑자기 공격받자 당황하며 이내 화를 내려 했지만, 눈앞의 노인을 알아보고 곧바로 움직임이 굳고 말았다.
“이런, 이런…… 라울이 뒷골목에 소홀해진 모양인가. 이런 녀석들이 또 나타나다니.”
그리고 방금 전까지 위협받던 남자는 노인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으흠, 도와줄 필요는 없었는데.”
“물론 저도 그것은 압니다만 이런 꼴을 보면 제가 참을 수 없어서 말입니다.”
“하긴…… 그렇겠네.”
남자와 노인은 칼로 위협하거나 위협받는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서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잔뜩 겁을 먹은 채 둘을 바라보며 떨고 있는 양아치들.
“파…… 파드레…….”
“파드레 상그레스(Padre Sangres)…….”
노인은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눈썹을 꿈틀하더니, 잠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허허, 잠시 자리를 비워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래야지. 그 전에, 한국에 소란을 좀 피워 달란 지시는 내렸어?”
“예, 확실하게 지시하고 왔습니다. 명령만 떨어지면 곧바로 시행할 겁니다.”
“그래? 고마워, 역시 신부님뿐이야.”
남자는 노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준 뒤,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남자가 시야에서 조금 멀어지자, 노인은 사람 좋은 미소를 거두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양아치들을 노려보았다.
“……라울에게 네놈들을 데려가야겠군.”
“아, 안 돼……. 살려 주십시오…….”
“네놈들은 구원받을 자나, 길을 잃은 어린양이 아니다. 그리고…… 한 놈만 데려가란 법도, 멀쩡하게 데려가란 법도 없겠지.”
그날, 리우데자네이루의 빈민가에서 찢어지는 비명 소리와 누군가의 절규 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졌으나 그 누구도 그것에 큰 관심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