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15)
영의의 최선임자로 추정되는 남자가 남긴 말을 듣고, 드워프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영의의 정령이 뜻하지 않은 업그레이드를 받는 등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숲요정 마을로 돌아온 영의와 시라 모녀.
“일단,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아예 관계가 없는 인물이면 모를까, 그에게 전언을 남긴 것이 숲의 수호자 역할을 하다가 사라져 버린 남자였으므로 시라와 아주 관계가 없지는 않았다.
그것을 근거로 영의와 수호자 사이에 있는 의외의 관계성에 대한 설명을 요구해 온 시라.
“그러니까,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넌 원래 이상했으니까 딱히 상관없지 않아?”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영의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음, 나도 잘은 모르지만 대략적으로 설명해 줄게.”
그렇게 영의는 시라에게 어느 정도의 사실만을 이야기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을 원래 하던 사람이었고, 그것을 알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아 전에 봤을 땐 몰랐었다는 것.
“그리고, 그때 봤던 그 아저씨는 나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단 말이지…….”
“그건 조금 짐작이 가는 게, 아마 본성을 최대한 숨기고 수호자로서의 역할에 몰입한 게 아닐까?”
시라는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다는 듯 이야기를 꺼냈고, 영의는 그것에 흥미를 보였다.
“몰입?”
“응. 정령술을 가르쳐 주기 전까지만 해도 평소의 모습이었는데 정령술을 가르쳐 준다며 우리들을 모았을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었거든.”
“다른 사람이라…… 가능성이 있겠는데?”
로버트의 일기에 적힌 내용과 그것보다 한참 전부터 활동해 왔을 그 남자는 적어도 한 세기 이상은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살아오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차원을 건너뛰고 다녔다면 자기 자신을 숨기는 것도 어렵진 않을 것이고.
“……그래도, 확실한 건 없네.”
하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어도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었다.
영의는 마치 조각의 대부분이 없는 채로 시작한 퍼즐에 테두리 조각 몇 개만 주워다가 모아 둔 것 같은 기분에 찜찜함을 느꼈다.
뭔가 진척은 되었으나, 퍼즐에 그려진 그림이 뭔지 몇 조각짜리인지도 모르는 상황.
시라 또한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인 듯했지만, 그녀는 확실히 영의보다 오래 살았다 보니 조금 현숙해진 면이 있었다.
“그렇지? 나는 앞으로 그냥 잊고 살려고. 수호자의 맥이 끊어진 것도 아니고, 우리 마을에 사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과거를 계속 떠올리면, 현재를 살 여유가 없어지니까.”
시라는 그렇게 말하며 뇌영과 정령을 옆에 두고 함께 놀고 있는 미딜을 바라보았다.
“나는, 남편과…… 가족들을 잃었지만 그것 때문에 지금 내 곁에 있는 가족에게 소홀해지기 싫어. 전 수호자님이 왜 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해야지.”
“……그래.”
영의 또한, 한때 잠깐이나마 과거를 그리워하며 몸부림쳤던 경험이 있던 만큼 시라의 말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라…… 그건 맞지.’
-각성자가 뭔데! 마력? 능력? 그게 사람의 잣대가 되는 거야? 우리가 지금까지 흘려 왔던 피와 땀은 뭐가 되는 거냐고!
-형, 진정하고…….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런 쓸데없는 능력이 도움이 될 것 같아?! 너 대회는?
-그건…….
잠깐 옛일이 떠오른 영의였지만, 이내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는 시라의 말대로 현재에 집중하기로 했다.
‘조언해 주는 대선배, 갑자기 남긴 정령, 드워프에 조만간 있을 비무대회까지…….’
영의는 이런저런 일들이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하자 두통이 밀려오는 듯했다.
“후우…… 조금, 머리가 복잡하네.”
“나도 그래. 쉬다 갈래?”
시라는 이번에도 친절하게 영의를 맞이하려 했지만, 영의는 예의상 거절했다.
“아냐, 너무 오래 있는 건 조금 실례니까. 이만 가 볼게. 뇌영아!”
“휘익(네)!”
영의가 부르자 미딜과 함께 있다가도 곧바로 그에게로 날아오는 뇌영.
미딜은 옆에서 함께 웃던 뇌영이 떠나자 아쉬운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돌아가? 돌아간다…….”
뇌영이 영의에게 가는 것을 보자, 그사이에 뭔가 더 학습한 듯한 정령이 영의에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곧바로 자신의 곁을 떠나는 두 새로운 친구들을 보며 아쉬워하는 미딜.
영의는 그런 미딜을 보며 조금 안쓰러운 생각이 들 뻔했으나, 제대로 된 친구를 만들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저러다가 나처럼 되면 어떡하지…….’
어딘가 조금 모자라지만 착한 병찬과 마찬가지로 모자라긴 하지만 그나마 나은 면이 있는 병민.
그 외에 동성 친구라고는 거의 없다시피 한 영의였기에 친구의 부재에 대한 상실감을 알고 있었다.
“미딜?”
“아, 네. 삼촌.”
뭐라고 말해야 하나 잠깐 고민을 했으나 이내 마음속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기로 마음먹은 영의.
“그…… 굳이 친구를 동물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않니? 숲요정들도 친구가 될 수 있을 텐데…….”
영의는 마을에서 간간이 본 어린 숲요정들을 생각하고 한 소리였지만 그리 좋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저도 그러고는 싶었지만, 저는 여왕의 딸이잖아요. 가깝게 지내기엔…… 조금 그렇죠.”
지금까지 강력한 통치자 없이, 공동체와 비슷하게 살아왔던 숲요정들.
하지만 전염병 사태 이후, 강력한 지도자 아래에서 결집하는 방향으로 노선이 바뀌었다.
그리고 여왕으로 선출된 것이 정령술에 가장 강하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던 시라.
인간들의 방식대로 왕을 추대한 그들이었지만, 귀족이나 신하 같은 다른 구조에 대해서는 상세하지 못했기에 왕이 홀로 집권하고 독재하는 형태가 되었다.
그러니만큼, 시라의 외동딸인 미딜에 대해서만큼은 쉽사리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가 되어 미딜은 숲요정의 젊은 층에서 조금 붕 뜬 존재가 되었다.
“어어, 으음. 그럼 네가 먼저 접근해 보는 건 어때? 상대방이 다가오지 못하는 것 같다면 네가 먼저 다가가 봐.”
“내가……. 아! 고마워요, 삼촌.”
영의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알겠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미딜.
‘다행이네. 그래도 옛날의 시라처럼 의외로 밝은 면도 있는 것 같으니까.’
영의는 미딜이 그래도 내향적이거나 소심한 성격이 아니니 문제가 금방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삼촌의 말대로야. 내가 직접 친구를 만들면 되잖아?’
그리고 제법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미딜.
‘좋아, 그럼 내일부터 삼촌의 정령 같은 정령을 만들어 보자. 사람처럼!’
하지만, 방향이 조금 어긋난 데다 과하게 폭주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 * *
시라와 미딜과 작별 인사를 하고 집에 돌아온 영의.
씻고 쉬려고 마음먹은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없다…… 주인…… 어디에?”
영의가 욕실에 들어가자 그를 찾으려는 듯 주변을 휘휘 둘러보기 시작하는 정령.
그리고 뇌영은 싱크대에서 얌전히 앉아 깃털을 고르다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정령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방의 구석구석까지 직접 가 보고 영의가 없는 것에 의아해하듯, 어딘가 닿을 때마다 움직임을 멈추는 정령.
“휘유(뭐 하는 거지)?”
정령은 한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어디에도 영의가 안 보이자, 그제야 영의가 없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주인…… 사라졌다……. 사라져? 없다…….”
미딜과 함께 있으면서 그사이에 이것저것 배워 온 듯한 정령은 이제 어느덧 기초적인 사고까지 가능하게 된 듯 보였다.
“보충한다…… 힘…… 찾는다…….”
마치 배가 고프거나 힘이 없다는 듯한 말을 하며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하는 정령.
뇌영은 정령의 행동을 흥미롭게 바라보다 이내 정령이 향하는 방향을 확인하고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깨닫자 황급히 날아 정령을 막으러 갔다.
영의가 보관해 둔 마정석이 모여 있는 작은 상자.
집에 들어오는 것은 그와 뇌영뿐이었고, 뇌영에게는 따끔하게 주의를 주었기에 상자에 방치해 두고 있었다.
그리고 정령임에도 어째선지 배가 고파진 듯한 정령이 그것을 먹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
“휘요(멈춰)!”
급하게 상자 쪽으로 날아가 양 날개를 펼치고 정령의 앞을 가로막는 뇌영.
툭.
쿵.
뇌영의 큰 날개를 펼치다 보니 이런저런 물건들이 거기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졌지만,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못 간다……. 막혀? 막는다?”
정령은 자신의 앞이 막히자, 잠시 멈칫하고는 상황을 파악하는 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주인 아니다……. 치운다. 치워…… 공격?”
이내 작은 스파크들을 튀기며 뇌영을 공격해 들어오는 정령.
타닥, 탁!
“휘약(뭐야)?!”
뇌영은 갑작스러운 정령의 공격에 당황하여 깃털을 곤두세우며 움찔했지만 정령은 하필 번개의 정령.
즉, 공격 수단과 신체 구성이 죄다 뇌기였다.
뇌령조인 뇌영에게는 뇌기가 도움이 되면 됐지, 절대 해를 가하는 성분이 아니었다.
물론 그로 인한 고열은 어쩔 수 없었지만 순수한 뇌기의 경우에는 오히려 도움이 되는 편이었다.
“휘햑햑(아무 쓸모가 없구나)!”
자신에게 전혀 통하지 않는 공격을 하는 정령을 보며 비웃는 뇌영.
“의문…… 의문? 어째서?”
그리고 정령은 뇌영에게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 것을 보자 당황한 듯 보였다.
“공격…… 안 공격? 했다? 했는데?”
자신이 공격을 안 한 게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한 정령.
“휘효(받아라)!”
뇌영은 눈앞의 신입이 마정석을 먹으려 한 것이 매우 괘씸했다.
‘나도 마음대로 못 먹는 건데……!’
그래서 조금 괴롭혀 주기 위해 정령을 부리로 쪼기 시작한 뇌영.
휙-
휙-
“공격 감지. 공격 감지. 위험.”
뇌영의 공격에 움츠러들듯 크기를 줄이는 정령.
“……?”
하지만 정령은 실체가 없었고, 뇌영의 부리는 허공을 가르는 결과로 끝나고 말았다.
“……햑(으응)?”
“위험…… 안 위험? 안전. 안전.”
정령은 뇌영의 공격이 자신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리고는 다시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구륵(이 자식)…….”
딱, 딱!
“공격. 안 돼? 공격받기. 안 돼? 의문?”
타닥, 탁.
부리로 딱딱 소리를 내며 맹금류 특유의 날 선 눈빛으로 정령을 노려보기 시작한 뇌영.
그리고 공격이 통하지도 않지만 다행히 상대의 공격이 효과적이지도 않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정령.
그렇게 둘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을 때, 영의가 때마침 샤워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왔다.
“……너희 뭐 해?”
샤워를 끝내고 나오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건 부리로 딱딱 소리를 내며 정령을 바라보는 뇌영과 공중에 가만히 있는 정령이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이런저런 잡동사니들.
“휘요오, 휘야악(아니, 쟤가! 마정석을)!”
“주인 발견. 힘 보충.”
뇌영과 정령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영의에게 날아왔고, 영의는 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휘요, 휘이이익(그러니까, 그게, 나는 막으려고 했는데)!”
서러운 듯 계속 우는 뇌영과 자신의 옆에서 꼭 달라붙어 있는 정령을 보며, 영의는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아니, 진정하고. 진정해. 가만히 있어 봐. 가만히.”
영의는 뇌영을 급히 쓰다듬으면서 진정시키려 했고, 흥분한 뇌영은 익숙한 손길이 계속 쓰다듬어 주자 차츰 진정하기 시작했다.
“휴루룩(좋아요).”
“자, 그럼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얘기를…….”
영의는 이제 뇌영이 조금 진정된 듯 보이자, 정황을 들으려 했다.
“휘요, 휘야아악(그러니까, 저놈이! 내가)!”
뇌영에게 정확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기까지는, 30분의 시간이 더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