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9)
신화 길드.
부 길드 마스터의 집무실 안에서 누군가의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으어어어…… 흐어어…….”
의자의 등받이를 최대한 뒤로 젖힌 채 앓는 소리를 내고 있는 화연.
“으어어…… 아아…… 피곤해…….”
그녀는 지난 미공략 게이트 소멸 사건 당시, 길드원들의 휴식 및 이탈과 기자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 인터뷰를 모두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그러나 현장에서의 즉석 임기응변에 가까웠던 그 행동이 지금 그녀를 이렇게 옥죄어 올 줄 알았다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번 인터뷰 요청에 응하자 그 이후로 길드의 입장이나 길드 관련 인터뷰가 무수히 그녀에게 들어오고 있었던 것.
개인적 질문이야 그녀 또한 사생활이라며 거부할 명분이 있었지만, 길드 관련 질문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서울 지부장이 아닌, 길드의 2인자인 부 길드 마스터였으니까.
“때려치울까…….”
그녀는 마음속에 곧바로 떠오른 욕망을 입 밖으로 내뱉었지만, 그것을 차마 실행할 용기도 나지 않았고 지금 길드가 그럴 환경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마스터인 영석은 오늘도 정부와 타 길드 마스터와 만나기 위해 나갔고, 그녀가 어느 정도 믿고 맡길 수 있는 정훈은 그녀보다 더욱 바빴다.
화연은 적어도 집무실에서 한숨 돌릴 시간만큼은 있었으니까.
게이트 공략은 실패로 처리되었고, 그에 따른 정부의 보상은 없었다.
어찌 되었건 게이트 내부에서의 부산물이라고 부를 만한 게 없었으니까.
덕분에 길드는 상당한 적자를 냈고, 대형 길드인 신화 길드가 그 정도로 휘청일 수준은 아니지만 적어도 실무진들은 머리가 깨지기 직전이었다.
그런 실무진들 중 가장 고생하고 있는 것이 능력과 책임과 지위가 함께 있는 정훈이었고.
그러다 보니 결국 외부 언론에 응대하는 일은 화연이 맡게 되었다.
언론사들도 미인에, 10년 차라는 경력에, 부 길드 마스터의 직위까지 있는 화연이 인터뷰에 응해 주는 것이 더욱 좋았고.
‘쉬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업무는 업무. 스트레스와 피로감이 가득 밀려왔다.
‘차라리 그때 선배랑 같이 어디 가서 3일 정도 쉬다 올 걸 그랬나……. 그랬으면 어느 정도 일도 적었을 텐데.’
도망을 칠까 하는 생각도 하는 그녀였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잠깐이나마 책임을 회피하려 한 자신을 탓했다.
“아냐, 그러지 말자. 적어도 훈이보다는…….”
화연이 정훈보다 적은 업무량에 위안을 얻으려 할 때, 그녀의 문을 두드리는 누군가가 있었다.
똑똑.
“누구세요?”
“부길마님! 저희에요!”
문밖에서 들려오는 것은 그녀와 함께 괴생물체들을 막아 내던 공략대의 목소리였다.
“들어와.”
벌컥-
들어오란 말에 곧바로 문을 활짝 열고 안에 들어오는 공략대 소속 팀장들.
“와, 집무실 엄청 크네!”
“실례합니다…….”
신기하다는 듯 둘러보기도 하고, 실례라는 듯 조심스럽게 들어오기도 하는 팀장들.
“Oh, 대쟝! Here's 선물!”
그리고 그들 중 가장 선두에 있던 것은 앨런이었다.
“이게 뭐야?”
앨런은 화연의 책상 위로 예쁘게 포장된 큰 상자를 하나 올려 두었고, 그 위에 편지까지 붙여져 있었다.
“선물. 모두가 준비했지.”
화연은 그녀를 위해 준비했다는 그들의 선물을 보며 감동했다.
‘각자 바쁘고 손해 본 게 많지만…… 그래도 은인이라고 선물도 갖고 온 거야? 역시, 이래서 내가 여길 안 떠나지.’
그녀도 10년간 각성자로 활동하며 적잖은 부를 쌓았고, 딱히 각성자로 활동할 목적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영의에 대한 묘한 책임감과 죄책감에 그에게 도움을 주려고 계속 길드의 요직에 남아 있었지만…… 이젠 영의에 대한 죄책감은 사라졌다.
하지만 이렇게 그녀를 생각해 주는 길드원들과 늘 챙겨 주는 영석이 있으니, 그녀가 계속 여기에 남아 일하는 원동력이…….
“아, 부길마님 건 위에 있는 편지예요. 아래에 있는 상자는 부길마님 거 아니에요.”
라고 생각하려 했으나, 뒤이어 덧붙여진 말에 감동이 조금 깨지고 말았다.
“……그럼 누구 건데? 길드장님? 아니면, 훈이?”
둘 다 너무 바쁜 탓에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으니 대신 전해 달라는 의미로 알아들은 화연.
하지만 팀장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날 나타났던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한테 전해 달라고요.”
“Yes, 헬멧 쓰고 나타났던 그 남자. Like as 히어로.”
영의에게 선물 상자를 전해 달라는 말에 당황하는 화연.
“뭐?”
‘얘들이 뭔가를 아나?! 뭘 본 건가?!’
“어…… 인터뷰하시면서, 이거 들고 사진 좀 찍어 주세요. 언제 길드 건물로 와서 받아 가 달라고.”
순간적으로 자신과 영의 사이의 관계나 영의의 정체를 아는 걸까 싶었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Yes, 대쟝님 Master보다 유명해. 사람들 대쟝님이 Master인 줄 알아.”
“으음…… 그 이전부터 그러긴 했는데…….”
팀장들은 화연에게 상자를 건네주고는, 편지를 읽어 보란 말을 남기고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대쟝이 우리 목숨 구해 주긴 했지만 그 사람 없었으면 대쟝까지 다 죽었을 거잖아.
어쩐 일로 영어를 섞어 쓰지 않는 앨런의 말과 함께.
화연은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정 없는 녀석들. 결국 이것도 나한테 떠넘긴 거잖아…….”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녀는 작게 미소 짓고 있었다.
“흐음…….”
과연 이 선물을 직접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어떻게든 인터뷰에 들고 나가서 광고를 해야 하는 건가 고민하고 있을 때, 인터폰이 울렸다.
“응?”
그녀가 알기로 다음 일정까지는 30분 정도의 여유가 남아 있었고, 그렇다고 길드의 내부인이 왔다면 방금 전처럼 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설마, 또 인터뷰 요청인가……?’
의문을 품으면서도 일단 인터폰에 대답을 하는 화연.
“뭔데? 또 인터뷰야? 아니면 촬영? 그보다, 어디서 연락한 거야?”
-어어, 로비입니다. 그보다 촬영은 아니고…… 아니, 비슷하긴 한데…… 그게…….
목소리를 들어 보니 그녀가 알고 있는 직원의 목소리였지만, 많이 당황한 것인지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똑바로 얘기해 봐. 대체 뭐길래?”
-으음, 미국에서…… 우편물이 왔는데요. 이게…… 보낸 사람이 조금 그렇습니다.
미공략된 게이트가 갑작스럽게 소멸한다는 것은 국제 사회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사건이었기에, 국제 언론도 왔다 간 적이 있었다.
그걸 아는 길드 직원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목소리를 떠는 것을 보자, 화연은 심상치 않은 일일 것이라 생각했다.
“누구길래?”
-그게…… 미 국방부입니다. 패트리어트가 온다는데요.
미국의 최강자, 국가 소속 각성자들 중 세계 제일이라 불리는 패트리어트의 연락이었다.
* * *
사방이 모래로 가득한 사막.
한 남자가 말에 탄 채 그 사막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푸르륵-
말은 더위를 타고 있는 듯, 땀을 흘리며 투레질을 하고 있었다.
짤깍.
짤깍.
말의 움직임에 따라, 남자가 신은 부츠의 뒷굽에 달린 징이 카우보이 부츠들 특유의 소리를 규칙적으로 내고 있었다.
남자는 선글라스를 꼈음에도 눈이 부시는지 쓰고 있던 모자를 조금 눌러 챙을 낮췄고, 이내 허리께에 손을 가져갔다.
총알을 넣는 공간과 총을 넣는 홀스터까지 마련된, 서부극에 자주 등장하는 건 벨트를 허리에 두르고 있는 남자.
그가 착용한 건 벨트에는 총알도 있었고, 홀스터에도 무엇인가가 있는 듯 겉이 불룩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사막을 쳐다보며 작게 웃은 뒤, 홀스터에 손을 뻗었다.
삑-
홀스터에 들어 있던 것은 카우보이들의 상징과도 같은 리볼버도, 현대식의 자동 권총도 아닌 MP3 플레이어.
MP3 플레이어를 작동시킨 남자는 다시 사막이 아닌 정면을 바라보았고, 그때 안장에 설치된 소형 스피커에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드럼 소리가 이어지다가, 들려오는 높은 피리 소리.
소리는 점점 고조되듯 크기를 키워 나갔고, 거기에 휘파람 소리가 곁들여지기 시작했다.
좋은 놈, 나쁜 놈, 추한 놈(The Good, the Bad, the Ugly). 통칭 석양의 무법자란 영화에 나오는 음악을 틀며 천천히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가는 남자.
“후…… 오늘도 별다른 사고는 없을 것 같군그래.”
남자는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혼잣말을 하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우웅-
콰아아아아-
세찬 엔진 소리와 모래를 가르며 달려오는 소리와 함께, 본인의 모습에 도취해 있던 남자의 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그리고 이제 즐길 대로 즐기셨으면 내려와 주시겠습니까?”
말을 타고 한가롭게 나아가던 그와는 달리, 그에게 말을 거는 남자는 군용 차량에서 창문을 내리고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음…… 패터슨 중위, 내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이 아름답고 멋진 자유의 나라에서?”
“글쎄요, 당신의 마음과 행동은 자유지만 지금 이 도로는 그리 자유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패터슨의 말에, 말을 탄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사막, 왼쪽에는 아스팔트가 덮인 도로가 있었다.
그리고 멀쩡한 도로 옆에서 말을 타고 가고 있는 그를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가득 찬 도로.
사실 일반적인 경우에야 그저 신기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넘어갈 만도 하지만, 말을 탄 남자의 정체가 정체였기에 이렇게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 있었던 것이다.
“흐음, 이제 슬슬 순찰 경로를 바꿀 때가 된 것 같군그래. 어떻게 생각하나, 부관? 새로운 무법자들이 나타날 지역을 알 것 같나?”
남자는 패터슨에게 부관이라 칭하며 농담을 건넸지만, 패터슨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보안관 흉내는 그만둬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이러는 것도 이해는 하겠습니다만, 일을 맡기고 취미를 즐기러 가시는 건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패트리어트.”
말을 타고 카우보이처럼 사막을 거닐던 남자는, 미국에서 가장 강한 각성자 패트리어트였다.
“이런…… 이래 보여도 진짜 보안관인데 말이지.”
“네, 명.예. 보안관님이시죠.”
패트리어트는 확실히 법적으로 뉴멕시코주의 보안관 직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실무를 담당하지는 않았다.
“패터슨 중위, 이래 보여도 내가 자네보다 계급이 높은 상사인데 이래도 된다고 생각하나?”
“걱정 마십시오, 대통령령으로 제가 대령님에게 행하는 언행 중 명예훼손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저에겐 처벌 대상이 되지 않으니까요.”
패터슨이 계속 딱딱한 태도로 나오자, 한숨을 쉬며 모자를 벗는 패트리어트.
“정말이지…… 나를 계속 고생만 시키는 부관이군그래. 바꿔 달라고 해야겠어.”
“걱정 마십시오. 당신의 부관 교체 요청이 많아질수록 제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단 뜻이란 걸 이미 장관님들이 알고 계시니까요.”
패터슨은 패트리어트에게 미소 지으면서 서류가 든 파일을 건네주었고, 패트리어트는 자신이 입은 판초를 벗어 패터슨에게 건네주며 파일과 교환했다.
“흐음…… 보자…….”
판초를 벗자 안에 입은 가벼운 티셔츠가 드러나는 패트리어트.
그리고 패터슨은 패트리어트가 또다시 카우보이 차림으로 놀지 않게 하려는 듯, 판초를 들어 시민들에게 던졌다.
“우와아아-!”
“패트리어트의 23호 판초다!”
패터슨의 판초 투기도, 패트리어트의 판초 구매도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닌지 익숙하게 행동하는 시민들.
“패터슨 중위,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뭐가 말입니까? 참고로 판초는 이미 버렸습니다.”
패트리어트의 질문에 칼같이 판초를 버렸다고 대답하는 패터슨.
“아니, 그것 말고. 내가 단독으로 한국에 찾아가는 거야 그렇다 치자고. 그런데 정부에서 지정해 주는 기자 1인과의 동행이라니?”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군인 출신에, 국가가 시킨다면 별말 없이 따를 패트리어트였지만 이번 정부의 지침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을 가지는 듯했다.
“그건 아니지만…… 겨우 한 명? 미공략 게이트 소멸이잖아. 누가 들어가서 휘말릴지도 모르는 재앙인데, 겨우 한 명을 보낸다고? 우리 병사들이나 국민들이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혹여나 미국에도 저런 게이트가 나타나서 피해자가 생기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소리친 패트리어트.
하지만 패터슨은 그 부분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는지,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 걱정 마십시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연구 팀이 아직 꾸려지지 않아서 보내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각 대학의 교수들이 의견 대립 중이라…….”
“아…… 그런가.”
패트리어트는 패터슨의 설명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시겠으면 이제 좀 기지로 복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퇴근을 할 시간이라.”
패터슨은 차에 타라는 듯, 차의 문을 탕탕 두드렸지만 패트리어트는 그가 탄 말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이 친구랑 정이 들었는데…….”
“타십시오. 빨리.”
“그럼 이 친구는 어떡하나?”
패트리어트는 조금 더 오래 카우보이 행세를 하고 싶은 듯했지만, 패터슨은 물러서지 않고 차에 탄 병사에게 명령했다.
“로버트, 자네가 나서게.”
“예, 중위님.”
패터슨의 명령에 차량 밖으로 내려 말에게 다가가는 로버트.
“뭐야?”
“옳지, 착하지…….”
로버트는 능숙하게 말을 쓰다듬으면서 교감을 시작했고, 이내 말은 로버트의 손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뭐야?! 이 친구, 왜 이렇게 말을 잘 다뤄?”
“진짜 카우보이 집안 출신입니다. 저 친구가 말을 데리고 승마 체험장에 돌려주고 올 테니, 이제 타시죠?”
“후우…… 잘 가게, 친구.”
패트리어트는 한숨을 쉬며 차에 올라탔고, 이내 그를 실은 군용 차량이 재빨리 사막을 가로질러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