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25)
간소하고 작은 테이블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이 얹어졌다.
달그락.
탁.
그리고 차를 가져다준 키 작은 소녀가 말했다.
“자, 마셔도 돼.”
“아, 감사합니다.”
“뭘.”
소녀를 보며 인사하는 한 남자.
“고마워, 베키.”
“그럼, 이제 난 나간다?”
“어어, 그래.”
“으히히히, 조금만 기다려! 이 언니가 갈게!”
베키는 그런 말을 남기며 문을 부술 기세로 세차게 밀고 나갔고, 찻잔과 함께 남겨진 영의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조금 이상해도 애는 착해, 화연아.”
“…….”
화연과 영의, 이 둘이 베키의 집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이유를 알려면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 * *
우형과 이야기를 나누다 알림이의 개입으로 그 자리에서 사라지게 된 영의와 화연.
둘은 주변이 분간되지 않는 울창한 숲 중간에 떨어졌고, 이번에 온 곳은 어디인가 생각하고 있을 때에 알림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할 것입니다, 사용자. 그리고…… 얻은 것이 있을 거라 믿습니다.]
‘얻은 거라……. 과도한 개입은 하지 말라고?’
[아닙니다. 그것 또한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모든 것에는 확실한 끝맺음이 필요하다 정도로 하겠습니다.]
영의는 알림이가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할 거면 확실하게 하고, 제대로 안 할 거면 아예 끼어들지 말란 건가?’
[……그 정도면, 대략적으로 허용 범위 내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사용자의 편의를 위해 본 개체는 잠시 동안 휴식 상태로 들어가겠습니다.]
‘뭐?’
[참고로,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니 편안한 장소를 찾기를 권장합니다.]
영의는 알림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으나, 이내 그게 무슨 뜻인지를 깨달았다.
“선배, 그럼 이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처음부터, 차근차근하게.”
화연이 영의의 뒤에서 엄청난 표정과 기세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 그게…… 조금 오래 걸릴 텐데?”
“괜찮아요, 이제 저 시간 많으니까.”
그때, 숲속에서 정체 모를 동물의 울음소리가 때마침 들려왔다.
-끼이요오옥, 끄야아아악!
절대 귀엽거나 친근할 것 같지 않은 괴성에 영의는 일단 자리를 옮길 것을 제안했다.
“그럼, 일단 자리부터 옮길까? 여긴 긴 대화를 나누기엔 별로 안 좋은 것 같아.”
* * *
“……그래서, 내 집으로 온 거라고?”
“응.”
베키를 찾아온 영의는 사연을 적당히 이야기했고, 베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영의와 화연을 바라보았다.
친구가 놀러 오는 거면 몰라도, 친구가 자신의 용무를 해결하기 위해 집에 찾아오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그것도…….
“……여자 친구를 데리고?”
“응.”
“아, 안녕하세요.”
화연은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고, 말은 못 알아들어도 인사라는 의사만큼은 전달되었기에 베키는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래, 안녕. 하아, 너 말이야…….”
평소랑 다르게 베키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듯하자, 영의는 교섭 재료를 꺼내기로 했다.
“아, 개조하라고 바이크랑 헬멧 가져왔어. 헬멧 하나는 네 거야.”
그리고 교섭은 곧바로 성공했다.
“어서 와! 내 친구의 친구면 내 친구인 거지! 자, 자. 여기 앉아. 혹시 차 좋아해?”
“음, 역시 베키야. 효과 확실하네.”
이내 베키가 차를 타 와서 영의와 화연에게 내주었고, 베키는 바이크와 헬멧을 탐닉…… 아니, 조사하러 뛰어갔다.
그렇게 차를 한잔 마시고는 대화를 시작하는 영의와 화연.
“음,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까? 일단 맨 처음은 내가 예전에 번개 맞았던 사고부터 시작해야겠는데…….”
영의는 말하는 중간중간 알림이의 눈치를 보며 다른 세계로 배달을 했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으나, 알림이의 제재가 들어오진 않았다.
“상당히 성격이 괴팍하기도 하고 이상한 면도 있었지만,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더라. 소스를 붓는지 찍는지를…….”
독고휘와의 만남, 그리고 무공을 전수받은 것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능력을 얻은 이야기.
“거기서 권왕이라는 놈과 전력으로 충돌한 뒤, 정신을 잃었는데 그다음 눈을 떠 보니까…….”
권왕이 아카데미를 습격해 왔을 때 갑자기 사라졌던 것과 돌아오기까지의 과정까지 설명하자, 화연이 입을 열었다.
“……그것들을 저보고 믿으라고요?”
“그걸 안 믿으면 설명이 불가능하지. 집에 선물받은 그 옷 아직 있는데, 나중에 보여 줘?”
화연은 이야기의 중간 정도까지만 들었지만 벌써부터 믿기지가 않는 듯했다.
“하아, 선배가 갑자기 변한 이유가 뭔가 싶었더니. 그럼, 그때 사라진 건 어떻게 한 거예요? 정신을 잃었다면서.”
분명히 영의의 말에 따르면 충돌 이후 정신을 잃었는데, 한 번도 간 적 없던 곳으로는 어떻게 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는 화연.
“아, 그건 내 길잡이? 인공지능 비서? 아무튼 그런 친구가 도와준 거야.”
영의는 알림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고, 화연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법 주의 깊게 들었다.
“처음에는 딱딱한 메시지 창에 기계음이었는데, 지금은 말까지 잘한다고요?”
“응.”
말만 들으면 모두 허구 같지만, 정작 그 모든 것을 증명할 증거들을 보고 겪었으니 반신반의하고 있던 화연.
의심을 입 밖에 내려던 그때, 그런 그녀의 귓가에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갑습니다, 사용자의 반려 개체.]
“으와?!”
어딘가에서 들린다는 느낌 없이, 머릿속에서 바로 들리는 듯한 음성에 깜짝 놀라는 화연.
알림이는 화연을 배려하려는 듯, 그녀의 눈앞에 메시지 창까지 직접 띄워 주었다.
“바, 반려요?”
자신을 부르는 지칭에 화연이 부끄러움과 당황을 동시에 느끼고 있을 때, 알림이가 정정 의사를 물어보았다.
[사용자와의 관계를 고려해, 가장 적합한 어휘를 골랐습니다. 혹여나 반려라는 명칭이 싫으시다면 이름, 또는 지정된 명칭으로 불러 드리겠습니다.]
화연은 반려라는 말이 부끄러워진 나머지, 얼굴을 붉히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 이름으로 해 줘…… 아니, 해 주세요…….”
알림이는 화연의 의견을 반영해 곧바로 명칭을 변경했다.
[알겠습니다, 개체명 신화연. 신화연으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영의는 알림이와 화연 사이의 대화를 듣고는 문득 의문을 가졌다.
“근데, 이렇게 까도 되는 거야? 비밀 아니야?”
하지만 알림이는 그것과 관련된 건 문제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사용자에 대한 판단은 끝났습니다.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면, 사용자가 처분되었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화연은 알림이가 꺼낸 처분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영의를 돌아보았다.
“뭐? 처분?”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길래? 엄청 위험한 건가?’
“아니, 그건 신경 쓰지 말고.”
알림이는 처분이란 말 때문에 방 안의 분위기가 바뀌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할 말을 계속 이어 나가려 했다.
[조력자도 얻었으니, 사용자에게 추가적인 기능을 개방함과 동시에 일전에 방문했던 곳을 다시 한번 다녀오길 권장합니다.]
“다녀온 곳이라니?”
[영원의 숲입니다.]
영원의 숲이란 정식 명칭은 기억이 안 나지만 숲이라고 하면 한 군데밖에 없었다.
바로 권왕과의 충돌 이후 도주를 위해 갔던 그 숲.
“그때 그 숲?”
[맞습니다. 사용자에게 도움이 될 것들이 안배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영의는 알림이가 안배한 것이 아닌, 다른 이가 안배해 둔 것이 있다고 전달만 해 준 거라는 걸 알아챘다.
“안배되어 있다고 했다고? 누가?”
[……언급할 수 없습니다.]
여느 때처럼, 뭔가 중요해 보이는 걸 묻자 안 된다고 대답하는 알림이.
“그럼, 맞는지 아닌지 대답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 또한 불가합니다만, 사용자 스스로의 추측에 대해서는 본 개체가 관여할 수 없습니다.]
“베키를 구해 주고, 로버트에게 와서 유품을 거둬 갔던 그 남자…… 맞지?”
[…….]
영의는 알림이의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했다.
“맞구나. 그 사람은 대체 뭐지?”
[그건 지금은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본 개체는 사용자에게 위해를 가할 목적이 없다는 것만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어.”
[그리고, 언젠가는 사용자가 궁금해하는 모든 것을 알게 될 때가 오게 될 것입니다. 부디, 그때가 온다면……. 아닙니다. 본 개체는 사용자를 믿습니다.]
“둘 다 알겠으니까, 설명을 조금 더 해 줘 봐요. 아까 말한 처분은 뭐고 선배한테 이런 걸 시키는 목적이 뭔지.”
그때, 영의와 알림이만의 대화가 계속 이어지자 참지 못한 화연이 끼어들었다.
“그러게, 목적이라…… 그건 나도 궁금한데.”
화연이 제3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말하자, 영의 또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것도 모르면서 시키는 대로 하던 거예요? 몸도 다쳐 가면서?”
“아니, 그건 내가 즉흥적으로 행동해 버려서……. 사실 이걸 시작한 것도 반쯤은 즉흥이었지.”
화연은 영의를 한심하다는 감정 반, 걱정하는 감정 반이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이내 한숨을 쉬었다.
“어휴, 진짜. 앞으로는 얘기라도 해 줘요.”
“미안, 앞으로는 그럴게.”
이제 영의가 어느 정도 알아들은 듯하자 화연은 이야기를 계속 듣기로 했다.
“그래서, 그 숲인지 뭔지를 다녀왔을 때가 일요일이었다고요? 그리고 저한테 연락을 한 거고?”
“응.”
“그러면…….”
화연과 영의의 이야기는 베키가 바이크와 헬멧의 개조를 끝내고 올 때까지 지속되었다.
둘은 이내 베키의 집을 떠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 갑자기 찾아와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화연은 이제 알림이의 도움으로 베키와 의사소통이 되기 시작하자 그녀에게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한 사과를 했다.
“괜찮아, 괜찮아! 친구인데 집에 놀러 올 수도 있지 뭘!”
베키는 바이크를 원 없이 만져서인지, 아니면 영의가 선물해 준 헬멧이 마음에 들어서인지 기분이 몹시 좋았기에 화연에게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래, 그보다 너 되게 신나서 개조했구나……?”
영의는 개조를 맡기기 전과 겉모습만큼은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지만 내부만큼은 흉악하게 바뀐 바이크를 조심스레 살펴봤다.
“응! 생각했던 기능은 다 넣어 봤어! 폭주 기능, 급강하 기능, 충전 후 방출 기능까지!”
베키는 해맑게 웃으면서 바이크를 탁탁 두드렸고, 베키의 발언에 깜짝 놀라 당황한 화연이 바이크를 쳐다보았다.
“무, 무슨 기능이요? 폭주?”
“뭐, 그것 말고도 안장에 온열이랑 보관함의 자그마한 공간 확장 기능이라든가 충돌 시 안정화, 역장 생성 보조 기능까지 넣어뒀어. 이제 조금 더 안정적일 거야.”
베키가 조금 그럴듯하게 들리는 기능들을 말해 주자, 화연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음…… 그런 중요한 기능들을 먼저 말해 주면 좋지 않았을까요?”
“응? 폭주랑 급강하 기능이 제일 중요한데? 기기의 성능을 극한까지 끌어낼 수 있다고! 멋지지 않아? 그게 얼마나 중요한데!”
베키의 상식을 뒤집는 말에 어이가 없어져 버린 화연.
“뭐…….”
이윽고 정신을 차린 그녀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영의가 급하게 가로막았다.
“놔둬, 베키는 원래 저런 애야. 조금 저런 성향이 있긴 해도, 애는 착해…….”
“아니, 바이크를 무슨 살인 기계로 만들려고 하는데요?!”
“조심해서 잘 쓰면 유용해.”
영의는 빠르게 이 자리를 뜨기로 마음먹고 화연의 등을 떠밀고 달래며 바이크의 뒷자리에 태웠다.
“으…….”
그리고 바이크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쳐다보며 움츠러드는 화연.
“그럼, 잘 있어. 다음에 또 올게.”
“응! 또 와! 그리고, 호엔하임 아저씨한테 가면 내 얘기도 좀 해 주고!”
영의는 바이크를 타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베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알겠어. 그럼, 다음에 보자.”
“잘 가!”
지상에서 손을 흔들던 베키가 점처럼 보이게 되었을 때, 화연이 영의를 붙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선배.”
“응?”
“선배는 혹시…… 이용당한다거나,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어요? 로버트라는 사람도…… 비참하게 죽었다면서요.”
로버트의 이야기를 듣고는, 영의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는 화연.
“……글쎄, 나도 가끔 그렇게 죽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하지만…… 뭐 어쩌겠어? 이미 발을 담갔는데. 괜히 빼려다 망하기보다는 끝까지 한번 가 보려고 해.”
화연은 바이크의 뒷자리에 앉아 영의의 등을 바라보았다.
“……네, 끝까지 한번 가 보세요. 그게 더 선배다운 방법일 테니까. 대신, 그 옆에 제가 있을게요. 그건…… 되겠죠?”
화연의 말은, 집으로 돌아가는 영의와 화연 사이의 분위기를 무르익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다만, 그 자리에 그들 둘만이 있지 않았던 게 아주 사소한 문제였을 뿐.
[개체명 신화연에게 본 개체를 소개하긴 했지만, 사용자와 지속적으로 동행하는 것은 허가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도달 할 수 없다는 것을 미리 고지합니다.]
“알림아, 그…… 굳이 지금 얘기를 했어야 하니?”
[저는 중요한 사항을 사전에 공지했을 뿐입니다.]
영의와 화연은 분위기를 망친 알림이를 보며 마음속으로 서로 다른 생각을 했다.
‘얘 진짜 기계인가?’
‘저는? 얘, 기계 아닌 거 아니야?’
하지만 그렇게 분위기가 조금 깨졌음에도, 영의를 붙잡고 있는 화연의 손은 풀어지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