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22)
화연이 사라진 것을 깨달은 영의는 그 자리에 굳었으나, 이내 머릿속에 들려온 알림이의 목소리에 어느 정도 침착을 되찾았다.
[사용자, 정신을 차리고 집중하십시오.]
지금은 수축이라는 과정 없이 곧바로 게이트가 소멸한 전대미문의 사태였고, 그런 상황을 앞에 두고 뭐라도 해 볼 수 있는 건 자신…… 아니, 영의와 알림이뿐일 테니까.
‘그래, 정신 차려야지. 가만히 있는다고 뭐가 되는 게 아니니까.’
알림이는 영의에게 필요할 만한 조언을 해 주었다.
[대략적인 정보와 일의 발단에 대해서는 사용자의 앞에 있는 남성이 들고 있는 영상과 문서 자료를 통해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영의는 곧바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영석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보았다.
“네, 여기 있는 영상을 보시면……. 다, 당신 뭐야?”
누군가가 나가 달란 요청을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영의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여, 여기 있으면 안 됩니다. 나가 주시죠.”
‘알림아, 갑작스러운 게이트 소멸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
[그것을 위해 사용자에게 긴급을 요했습니다. 영상을 보고 차원 간 접점이 있던 곳으로 향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림이의 차원 간 접점이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일단 분위기상 게이트가 있던 위치인 것만은 알 것 같았던 영의.
“자네…… 아니, 당신? 아무튼, 사라진 게이트를 조사하러 온 건가?”
영의는 이유 모를 영석의 지레짐작과 협조를 얻으며 잠깐 의아해했지만 이내 우선순위를 떠올리고는 알림이의 말에 집중하기로 했다.
정확히 게이트가 있던 지점 앞에 도착하자, 영의는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뭐랄까…… 무림 쪽으로 이동하기 직전의 느낌?’
달리 말로 구체적인 설명을 하기는 힘든 감각이지만, 확실히 예전에 느껴 본 감각이 자극받는 기분이었다.
[사용자의 안전과 차원의 안정화를 위해, 접점은 대략 30초 후에 개방될 예정입니다.]
알림이의 충고나 권장은 어지간해서는 따르는 영의였지만, 지금은 그걸 들을 마음이 아니었다.
“지금 열어! 당장!”
알림이는 영의의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의사를 존중해 주었다.
[……알겠습니다.]
게이트는 사라졌던 그 자리에서 곧바로 다시 열렸고, 알림이가 안정화라는 말을 한 것이 허사는 아닌 듯,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일렁이며 다시 사라지려 했다.
[사용자, 사용자의 심리 상태가 초조하고 불안한 것은 이해합니다. 다만 방금 보았듯이 차원이 안정되지 않았으니…….]
알림이는 영의에게 일부러 예시를 보여 주기 위해 곧바로 열었다는 어조로 설명을 하려 했지만, 그다음에 이어진 영의의 행동은 알림이로서도 예측하지 못했다.
텁.
뚜두둑.
[사용자?!]
영의는 닫히려는 게이트를 잡아서 억지로 벌린 뒤, 어느 정도 공간이 확보됐다고 생각하자 곧바로 안으로 뛰어들었다.
일단 게이트의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만 생각한 영의는 안정된 자세로 들어오지 않았고, 그 탓에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겨우 공중에서 균형을 잡아 꼴사납게 넘어지는 것은 피했지만, 그래도 착지를 하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던 영의.
“좋아, 들어왔……. 응?”
그런 그의 시야에 곧바로 들어온 것은 모래 바닥이었다.
“사막인가?”
자리에서 일어선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모래로 가득한 주변, 그리고…….
“뭐지?”
“저건, 누구야?”
“그게 중요해? 게이트가 다시 열렸다!”
자신을…… 아니, 자신의 뒤에 있는 게이트를 엄청난 기세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이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물론 게이트가 닫히는 게 어지간한 일은 아니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바깥에서도 이제 막 알아챈 상황을 내부에서 곧바로 알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영의.
그는 각성자였지만 길드에서 괴수를 잡으러 가거나 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기에 그저 들어가서 원정처럼 멀리 갔다 오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왜 다들 여기 있는 거야?’
그렇게 영의가 의문스러워하는 동안, 신화 길드의 인원들은 얼굴에 화색을 띠며 목소리를 높였다.
“게이트가 다시 열렸다!”
“빨리! 부상자들부터 밖으로!”
“우린 살았어!”
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의 전투라도, 퇴로가 막혔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과 어디 가 보기라도 할 수 있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꼼짝없이 최후의 일전을 강요받던 입장에서, 그나마 원군이나 퇴로라도 있는 상황으로 바뀌자 없던 힘도 솟아나는 신화 길드 인원들.
그들은 그런 기쁜 소식을 앞에도 전하기 위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외치기 시작했다.
“게이트! 다시 열렸다!”
“게이트 재개방!”
“퇴로 확보됐습니다!”
정확히 같은 말은 아니었지만, 모두 같은 내용과 희망을 담고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머지않아 괴생물체와 맞서 싸우고 있는 최전열에도 전해졌고, 소식을 전해 들은 화연과 정훈의 얼굴이 밝아졌다.
“들으셨습니까? 게이트가 다시 열렸답니다.”
“그래? 그럼 더 이상 버티기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네.”
촤악-!
털썩.
사족 보행을 하는 괴생물체를 베어 넘긴 화연은 호흡을 가다듬은 뒤 진형을 조금씩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이제, 힘을 아끼지 마! 길드장님이라면 지원을 불러 놨을 거야! 최소한 군부대 협조라도 받아 놨겠지! 모두 진형 유지하면서 퇴각해! 윽, 연기가…….”
사족 보행의 괴생물체가 죽자, 그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화연은 그 연기가 좋지 않은 것이란 걸 직감하고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대쟝님! You okay? 괜찮지?”
앨런이 화연의 주변에서 갑자기 검은 연기가 나타나자 당황하여 소리쳤지만, 화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중해!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말고!”
화연이 괴생물체를 죽인 것을 기점으로 전력을 다하는 최전열 인원들의 분발 덕분일까, 다른 괴생물체들도 조금씩 밀리거나 상처가 늘어나기 시작하자 괴생물체들은 조금씩 주춤거리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좋아, 저 녀석들도 밀린다!”
“우리가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지!”
그렇게 그들이 자신감을 가지려던 그때, 괴생물체들의 뒤에 있던 사람의 형태를 한 괴생물체가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정말 사람인 것처럼 그들에게 달려들어 팔을 휘두르는 괴생물체의 일격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었고, 그 위험성을 감지한 팀장들이 몸을 던졌다.
“전부 피해!”
콰앙!
괴생물체의 일격에 모래 기둥이 치솟고, 먼지가 사방으로 날렸다.
“쿨럭, 커헉! 더럽게 아프네!”
“Oh, that's hurt! that's 뒈지게 아프다!”
앨런과 정훈은 아프다고 소리를 치면서도 빠르게 자신들의 상태를 점검했다.
“하, 방어구 파손이라……. 돈 좀 깨지겠네.”
“방패가 변해 버렸다, like as 걸레짝. kg당 500원 받고 고물상에 팔아야 될 것 같다.”
방패를 잃은 앨런과 방어구를 잃은 정훈.
화연은 그런 둘을 대신해 검을 고쳐 쥐고는 앞으로 나섰다.
“너희는 뒤로 빠져 있어. 대인전이면 오히려 내가 나서는 게 맞아.”
대인전이라고 말은 했지만 상대가 사람이 아니었다.
머리에 얼굴이 있어야 할 부분은 무언가로 감싸여 있어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았고, 팔다리는 있지만 손가락과 발가락이 없었으니까.
‘마치, 사람 인형 같은 느낌인데…….’
하지만 그런 걸 생각하기에는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
퇴로는 확보되었지만 모두가 탈출에 집중할 여유가 있지도 않았고, 당장은 움직임을 멈춘 다른 괴생물체들이 언제 움직일지 모르니까.
“하아아아!”
화연은 최대한 빠르게 결판을 내려는 듯, 기합을 내지르며 얼음으로 둘러진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검은 빠르고 정확했지만, 단단한 몸을 지닌 상대들에게 먹힐 것 같진 않았기에 전술을 변경한 화연.
번쩍!
그녀의 검이 닿기 직전, 검보다 빠르게 날아온 무언가가 섬광을 발하며 충돌했다.
콰앙!
“뭐야?”
“뭐가 날아온 거지?”
섬광으로 인해 잠깐 눈을 감았던 이들이 다시 눈을 뜨자, 그곳에는 검게 탄 인간 형태의 무언가가 선 채로 굳어 있었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에 당황하는 전열의 인원들.
상황 판단이 빠른 몇몇은 새로운 적의 등장을 경계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화연은 방금 날아온 것이 뭔지 알고 있었다.
‘선배!’
그리고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화연의 옆에 착지하는 은색 헬멧을 쓴 남자, 영의.
영의는 게이트에 들어오고 나서 화연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신화 길드의 인파를 거슬러 올라왔고, 그녀가 무언가와 충돌하려는 상황을 보자마자 곧바로 뇌창을 날린 것이었다.
“어때, 제때 온 것 같아?”
영의는 목소리를 낮춰 화연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고, 화연도 영의의 정체를 알리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끄덕.
‘알림아, 이거로 끝이야? 여기 와서 화연이를 구하는 거?’
영의는 혹여나 다른 위협이나 해야 할 일이 더 있을 거라 짐작했다.
‘지금까지 알림이가 급하다고 했던 것 중에 멀쩡했던 게 있어야 말이지…….’
오늘의 일과 비교하면 위험도 자체는 상대적으로 낮았으나, 충분히 누군가의 목숨이 위험해질 뻔한 적은 있었다.
‘지연이라든가, 베키라든가.’
그리고 그때, 알림이가 영의에게 불길한 경고를 질문의 답변 대신 해주었다.
[사용자, 빠르게 복귀하기를 권고합니다. 고정해 둔 차원 간의 접점이 조금씩 불안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영의는 상황이 잘 안 좋게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3, 30초 기다릴 걸 그랬나?’
뭔가 자신 탓에 일이 꼬인 것만 같다고 생각하는 영의.
[아닙니다. 30초를 기다렸더라도 똑같이 일어났을 절차입니다. 다만, 본 개체로서는 사용자가 접점을 직접적으로 찢어 낼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영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화연에게 작게 속삭였다.
“지금 당장 사람들 다 철수시켜. 게이트에 문제가 또 생길 것 같으니까.”
“그걸 어떻게……. 아니, 일단 알겠어요. 전원! 빠르게 후퇴한다! 무시하고 뛰어가!”
잠깐 의문을 가지려 했으나, 일의 경중을 따진 화연이 곧바로 후퇴하라고 지시했다.
“But, 대쟝님. 저것들은…….”
빠지직, 콰앙!
앨런이 남아 있는 괴생물체들에 대해 걱정을 품던 그때, 영의가 빠르게 뇌창들을 날려 괴생물체들을 태워 버리기 시작했다.
“Ok, 납득.”
그 광경을 보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뒤를 돌아 재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하는 앨런.
“부길드장님, 혹시 옆에 있는 사람과는…….”
달려가는 다른 전열 인원과는 달리, 정훈은 그 자리에 남아 화연과 영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금은, 대답할 수 없어.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빠르게 철수해야 한다는 것뿐이야.”
“…….”
화연의 대답에, 잠시 침묵하다 이내 앞서간 대원들을 뒤쫓아 가는 정훈.
정훈이 멀어져 가자, 화연은 영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선배. 구하러 와 준 거죠? 저것들, 얼려도 안 얼고 불에도 이상하게 강해서…….”
사실 길드의 정예들이 쩔쩔매고 있던 이유는 상성의 문제가 제법 있었다.
물리 공격 특화의 수비 팀과 수분이 없고 기온이 높은 환경 탓에 얼음이 약해지는 화연과 뇌 속성만큼은 없었던 공격 팀.
그런 그들이 괴이할 정도로 단단하고 튼튼한 몸뚱이를 가진 괴생물체들과 만나 힘을 못 썼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온 건 아니긴 한데, 아니. 뭐. 됐어.”
영의는 아직도 조금씩 꿈틀대고 있는 괴생물체들에게 뇌창을 연신 날려 대며 대답했다.
‘알림아, 저게 대체 뭐야? 괴수 맞아?’
괴생물체와…… 아니, 괴수 자체도 사진과 영상으로만 봤고 실제 괴수는 배달 중에 몇 번 본 매드독 정도가 전부였던 영의.
[사용자가 가지고 있는 괴수라는 생명체를 판단하는 기준의 지식에 따르면, ‘타 차원에 존재하는 본래 차원과 다른 구조 및 생김새를 가진 생물’이 괴수의 기준입니다. 비슷한 표현을 빌리자면 ‘반 정도는 맞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반 정도 맞다고? 저게 지구 생명체일 리는 없을 텐데. 그럼 생물이 아니란 건가?’
‘저 개체들에게서는 생명 활동이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괴생물체들이 움직이지 않게 되자, 영의는 뇌창의 연사를 멈췄다.
“쓰읍, 그런 건가…….”
“그런 거라뇨?”
“아니, 그냥. 저게 생물이라기엔 좀 아닌 것 같아서. 일단, 돌아가자. 손잡아.”
영의는 탈출을 우선으로 생각하기로 했고, 화연도 중요한 건 나중에 물어볼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뇌룡보나 뇌전보를 쓸 것도 없이, 영의는 뇌기로 활성화시킨 신체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알림아, 아직까진 괜찮지?’
[네, 접점의 고정이 풀리기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대략 2분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상황임을 확인하며 게이트가 있는 곳까지 도달하자, 정훈을 비롯한 소수의 인원만이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화연이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듯, 화연과 영의가 날아오는 게 눈에 보이자 곧바로 철수하는 그들.
“부길드장님 오신다! 자, 이제 나가자!”
“네!”
남은 인원들이 바깥으로 나간 뒤 정훈은 화연을 보며 빨리 나오라는 듯 손짓을 한번 해 주고는 게이트 바깥으로 나갔다.
“참, 선배. 휴가는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네요. 이런 일이 생겨 버려서.”
그리고 그걸 보며 문득 영의와 시간을 보내려던 계획이 생각난 화연이 작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중에 편할 때 말해. 일단 나가자.”
영의와 화연도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게이트의 앞에 착지했을 때, 영의의 귀에 알림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용자, 그곳에 큰 파장이…….]
쿠웅.
게이트를 향해 한 발을 내디디려 하던 그때, 하늘과 땅이 모두 뒤흔들리는 듯한 엄청난 진동이 발생했다.
“지, 지진?”
영의는 지진을 방불케 하는 엄청난 충격과 진동에 잠시 당황했지만 공중에서도 활동이 가능했기에 곧바로 게이트로 뛰어들려 했다.
그러나 그가 발을 내딛는 그 순간, 눈앞에 있던 게이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주위에는 숲과 사막만이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