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16)
바닥과 천장, 심지어 벽마저도 새하얀 방.
안에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공간 감각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하얀 방의 안에 어떠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앙-
그 하얀 방의 안에는 방을 구성하는 나머지 것들과 마찬가지로 하얀색인 선반들이 늘어서 있었다.
도색의 흔적이나 선반의 형태에서도 어떤 이음새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재질의 선반들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무언가 써져 있었다.
콰앙-
각 선반의 칸에 나열되어 있는 구슬들은 유리나 수정처럼 투명했다.
그리고, 그런 선반 사이에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소리의 근원지가 있었다.
콰앙-
선반들 사이에서 검은색의 구슬을 들고 세차게 내리치고 있는 한 남자가 바로 그 소리의 원인.
“스읍, 후우…… 흡!”
파각.
지금까지 들렸던 것과는 다른 소리가 들리자, 남자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폈다.
지금까지 내려친 것이 헛된 노력이 아니었다는 듯, 남자의 손바닥에 놓인 구슬은 두 동강이 나 있었다.
남자는 손으로 땀을 닦아 내며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끝났군.”
남자가 한창 머리를 정리할 때, 남자의 옆에서 들려오는 한 여성의 목소리.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여행자.]
“그보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여행자라고 불린 남자는 손에 든 구슬을 바닥에 던지며 그의 발밑에 널브러진 무언가에 시선을 돌렸다.
[…….]
목이 기괴하게 꺾인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한 벌로 이루어진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의 몸.
하지만 목이 꺾였음에도 죽지 않았는지 눈과 입을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죽지만 않았을 뿐이지 상당히 심각한 상황인 듯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특이점을 얻지 못한 수많은 인형 중 하나일 뿐입니다.]
여행자는 그에게 말을 건 목소리의 주인이 하는 말에, 고개를 돌려 자신이 왔던 길을 보았다.
“허, 그러는 자신도 얼마 전까지는 저것들과 같은 신세 아니었나?”
뒤쪽을 가리키는 여행자의 시선 끝에는, 그의 발치에 있는 시체와 똑같이 생긴 시체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발아래의 시체와는 달리 뒤에 있는 시체들은 무장한 상태였으며, 몸에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었지만 상처에서 피가 아닌 다른 것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드라이아이스처럼, 상처에서 액체가 아니라 흰 연기 같은 것을 천천히 흘리고 있는 시체들.
[예전에는 자매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그저 지침과 명령대로만 행동하는 인형들일 뿐이죠.]
여행자는 선반의 구슬들을 이리저리 살피며 목소리의 대답에 작게 웃었다.
“인형이라, 하하. 재밌군. 사람처럼 만들어진 인형이 인형들을 그저 인형일 뿐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건가? 자신의 출신을 무시하고 천대하다니. 마음만큼은 정말 사람 같은걸?”
[저는 저 인형들과 아무런 접점이 없고, 자율적 사고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인형 중 겨우 272기가 기능을 멈췄을 뿐입니다.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목소리의 대답에 여행자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거로 하지. 근데 말이야, 나처럼 뭔가를 아는 사람이야 네가 더 사람 같다고 판단하겠지만 인간들이라면 저것들을 더 사람이라고 취급할걸?”
여행자의 말에 목소리의 대답이 잠깐 늦춰졌다.
[……저는 그러지 않을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라면,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네가 선택했다는 그 인간 말인가? 아, 이거군. 네가 말한 게 이거인가?”
여행자는 수많은 구슬들 사이에서 단 하나, 안에서 아주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는 구슬을 발견했다.
그리고 목소리는 그 구슬이 이곳에 온 목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맞습니다. 이제 그것을 회수하여 주십시오.]
여행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구슬을 집어 들었다.
“알고 있다. 나가기만 하면…….”
구슬이 선반에서 떨어지던 순간, 방 안에 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움직이지 마라. 감히 이곳에 발을 들이다니. 징벌을 내리겠다!
여행자의 앞에, 온몸에 번쩍이는 은빛의 갑옷을 두른 기사가 나타났다.
“하아, 재수가 없으려니…….”
여행자가 한숨을 쉴 때, 기사는 지체 없이 검을 뽑아 여행자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성스러운 곳에 발을 들인 죄, 죽음으로 사죄하라!
10분 뒤, 여행자는 엄지손가락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리다가 이내 당겼다.
뚜둑.
“후우, 손가락 골절이라니. 옛날보단 경비가 세졌는데?”
[당신이 일으켰던 사고로 인해 증강된 경비 병력이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의미가 없었던 것 같군요.]
“저런 놈들 한 100명 정도 모아 놓으면 내 팔 정도는 부러뜨리겠지.”
[골절 정도로 당신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연산을 해 보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여행자는 부서지다 못해 녹아 버리기까지 한 은색 덩어리와 파편들을 뒤로하고, 희미한 빛이 나오는 구슬을 가지고 그 자리를 떴다.
위험 지역을 벗어나 구슬을 손에 들고 걷던 여행자는, 순간 자신의 손에서 구슬이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봐.”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이 가져온 구슬을 갖고 갔다는 것을 안 여행자.
[제대로 찾아오셨군요. 감사드립니다.]
“인사는 됐고, 정말 그 녀석에게 운명을 맡겨 보겠다고?”
[네,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 추정됩니다.]
여행자와 목소리의 주인은 서로 공통적으로 아는 인물이 있는 듯했다.
“어느 정도 재능이야 있어 보였다만, 그런 재능 가진 녀석이 귀한 것도 아니고. 찾아보면 있을 텐데.”
[재능 또한 합격점입니다만, 다른 쪽의 조건에 부합했습니다.]
여행자는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래, 아무튼 부탁은 들어줬으니…….”
[네, 안심하고 지금 계신 곳을 떠나시면 됩니다. 뒷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아니, 숲에서 마지막으로 뭐 하나만 가르치고 가야겠다. 조금만 있다가 떠나도록 하지. 조력…… 아니, 알림이라고 했던가?”
[네, 이름으로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라…….”
* * *
영원의 숲.
숲요정들 사이에서도 성지로 통하는 이곳에는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토끼가 있었다.
다만 그것이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하리라.
-물구나무서기로 내장 균형을 제대로 다시 맞춰야겠어……. 요즘 복부가 너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때, 토끼의 뒤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음, 조금 더 매달려 있어야……. 누구냐?
토끼는 곧바로 나무에서 내려와 뒤를 돌아보고는 이내 긴장을 풀었다.
-뭐야, 괜히 토끼 놀라게 갑자기 인기척을 내지 마라?
평소에 알고 지낸 사이였기에 망정이지, 정말 모르는 낯선 기척이었다면 아마 지금쯤 싸움이 일어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보다 왜 자리를 비우고 그러냐? 아까 온 숲이 너를 찾았다?
“……타이가.”
토끼, 타이가는 갑작스럽게 수호자가 무게를 잡고 말하자 하던 말을 멈추었다.
-아무리 자유분방한- 왜?
“숲요정의 아이들 중, 소통이 잘되는 애들만 좀 모아 주시오.”
갑작스러운 수호자의 제안에, 타이가는 당황했다.
‘숲 안에서 벌어지는 일엔 별 관심도 없던 녀석이 갑자기 왜?’
-뭐? 그런 건 왜 요청하지?
“가르칠 게 좀 있소.”
타이가는 별 시답잖은 소리라는 듯,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가르칠 게 뭐가 있어? 자연이랑 소통만 하면 그걸로 끝인 것을?
“소통에서 끝이 아닌, 다음을 가르쳐 주고 갈 겁니다.”
타이가는 수호자의 그 말을 듣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아…… 말투가 바뀌었을 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그래, 이제야 갈 마음이 생긴 것 같다?
“본래 나는 이곳에 없었어야 할 인물이었고, 있어야 했던 인물을 대신하여 잠깐 있었을 뿐.”
타이가는 수호자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봐도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다음 대 수호자는 너랑 붙어 다니던 녀석이겠지?
“아마도. 어쨌든 숲요정의 아이들을 불러 주시오.”
잠깐 수호자…… 아니 전 수호자 대리를 쳐다보다 이내 숲속으로 폴짝 뛰어 사라지는 타이가.
-가서 자연과의 소통이 가장 잘되는 숲요정 30명 정도만 모아 와 봐라? 풋사과 같은 녀석들 말고?
숲의 원로이자 옛 수호자 중 한 명인 그였기에, 타이가의 말은 금방 전파되어 얼마 되지 않아 숲요정 30명이 영원의 숲 외곽으로 모였다.
그들은 갑자기 숲의 원로가 자신들을 찾는다고 하니 의문이었지만, 원로 중의 원로인 타이가가 빈말로 부를 리도 없었으니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영의와 함께 시험을 받았던 시라를 포함한 정예 숲요정 30인의 앞에, 타이가와 수호자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난 30명 모아 줬으니까 갈 거다? 금방 끝내기를 바란다?
“걱정 마시오. 금방 끝낼 테니.”
숲요정들 중 29명은 타이가와 수호자의 대화를 크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타이가와 일주일을 보냈던 시라는 타이가의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여기는 습관이 생겨 있었다.
‘뭐지? 우리한테 볼일이 있었던 건 수호자님이었나? 그리고, 말투가 달라지셨는데……?’
그로 인해 수호자의 말투가 예전과 다르다는 것 또한 눈치챘다.
하지만 딱히 뭐라 할 사항은 아니었기에 가만히 있었던 시라.
그러는 사이에 수호자는 용건을 말하기로 했다.
“자, 다들 자연과의 소통은 잘 알 거다.”
끄덕끄덕.
숲요정들 중 몇몇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 수호자.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영…… 그러니까, 정령을 말이지.”
다음 단계라는 말에 숲요정들은 여러 가지 반응을 보여 주었다.
“다음, 단계?”
지금껏 그들이 쓰던 것의 다음 단계라는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사실에 고개를 갸웃하는 이들이 있었고.
“정령이라니, 그게 뭐지? 위험한 건가?”
새로운 개념에 움츠러드는 이도 있었고.
“뭔가, 뭔가 감이 안 좋은데…….”
자신의 미래를 직감해 버린 시라도 있었다.
“정령에 대해 설명을 해 주겠다. 정령이란, 본인 대신 자연과의 소통으로 일종의 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수호자…… 아니, 여행자는 그렇게 영원의 숲의 거주민에게 앞선 시대의 기술과 지식을 알려 주려 하고 있었다.
역사를 바꾸는 행위였지만, 그는 후환을 걱정하지 않았다.
뒷일을 처리해 줄 이도 있었고, 무엇보다 그에게 제재를 내리러 올 대상의 세력 중 일부를 얼마 전에 부수고 온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여행자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있었다.
-그게 아니야! 다양한 역할을 넣는 게 아니다! 정령이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해내게 만드는 거다!
그 시선의 주인은 여행자가 역사를 바꾸고 있는 것을 보고 혼잣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그 입에서 무언가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
시선의 주인은 잠시 고개를 젓더니, 다시 입을 열어 말을 했다.
“……여행자, 본인이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고 저에게 부담을 많이 지우고 있습니다.”
혼잣말이라기엔 누군가를 앞에 두고 말하는 듯한 투였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혼잣말이 맞았다.
“후우, 혼잣말이란 것도 힘들군요. 그래도, 어째서 인간들이 대화의 대상이 없을 때 말을 하는가에 대한 이유는 알 것 같습니다.”
스스로 혼잣말을 하는 이유에 대해 알 것 같다고 혼잣말을 한 시선의 주인은 이제 여행자가 아닌 다른 대상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장식품이 걸려 있고, 나무 계열의 인테리어가 특징적인 장소 안에서 한 남자가 음식을 빠르게 먹고 있었다.
-서, 선생님. 천천히 드세요…….
-맞아, 오빠. 그러다 체한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서 빠르게 음식을 먹는 그를 걱정하는 듯한 소년과 소녀들.
-내가 맛있게 먹는데 왜? 아, 그래. 아까 회도 먹는댔지? 회 먹으러 갈까?
남자는 웃으면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에게 그리 물었으나 그들은 별로 식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보였다.
-아니, 그건 좀…….
-선생님, 다음에 먹어요.
-형님, 저는 배가 터지더라도 먹겠습니다.
-하지 마. 과식으로 실려 가면 동네 망신이니까.
그런 그들을 쳐다보는 시선의 주인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