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14)
집에 돌아온 영의와 지연이 처음 본 것은, 아무도 없는 고요한 거실의 풍경이었다.
“음, 아무도 없네……요?”
다녀온 시간이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건만, 설마 집에 아무도 없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지연은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아, 하하. 다들 어디 간 거지? 앗, 안녕?”
지연은 집 안과 주변을 둘러보다 뇌영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삣, 휘요(그래, 안녕)!”
지연을 직접 대면한 게 제법 반가운지, 한쪽 날개를 들어 인사를 하는 뇌영.
그런 상황에서, 영의는 태연하게 집 안을 슥 훑어본 뒤 나지막이 말했다.
“집 아니면 단련하러 간 거겠지. 뭐 어디 위험한 데라도 갔으면 쟤가 따라붙었을 거고.”
“아, 그런……가요?”
영의의 말에, 지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쟤가 똑똑한 건 알겠지만, 그런 것까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나……?’
“일단 가 보자. 뭐 없으면 전화라도 걸어 보면 되겠지.”
“네!”
체육관으로 가 보자, 거기서는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우렁찬 기합 소리와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거봐, 역시나.”
영의는 안 봐도 뻔하다는 듯 체육관 안에서 낡은 샌드백을 발로 차고 있는 수연을 보았다.
그녀의 주변에 떨어진 땀자국과 시간대를 고려해 보면 식사를 하진 않은 것 같았다.
“언니, 밥도 안 먹은 건가?”
지연은 식사를 거른 듯한 수연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물론, 그녀도 제대로 된 식사는 하지 않았지만.
“아마? 수분 섭취는 몸을 무겁게 할 뿐이라더니…….”
“네?”
영의가 중얼거린 어딘가의 캐릭터 대사 같아 보이는 말에 의문을 표하는 지연.
“몰라, 나도. 몇 년 전에 어디서 뭘 보고 온 건지 몰라도 그런 말을 하면서 가끔 아침 거를 때가 있었어.”
“그게 무슨…….”
한창 감성적일 학창 시절에 보여 주는 문화에 영향을 받아 변하는 모습, 속칭 중2병이 있던 시절을 언급하는 영의였다.
“뭐, 어머니의 설득(물리)이랑 아버지의 치료(물리)로 잠깐의 치기로 끝났지만.”
그때 (물리적으로) 치료된 줄로만 알았던 수연의 중2병이 내면에 조금 남아 있었던 걸까?
영의는 순간적으로, 집에 부모님이 안 계셨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쟤가 지 혼자 밥을 해 먹을 애가 아니었지 참. 해 먹느니 굶을 애였는데…….”
“아아, 요리를…… 못한댔죠?”
지연의 말에 영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못하는 게 아니야. 불가능한 거지 아주. 계란을 깨랬더니 진짜 산산조각으로 깨 버린다고.”
오래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기합 소리가 울리는 도장 내부에 싫어도 들리게 되어 반응한 수연.
“내가 뭘 못해?”
세차게 흔들리는 샌드백을 뒤로하고 영의에게 다가오는 수연.
“어, 너 요리 못하잖아.”
“모, 못하는 게 아니라 해 본 적 없어서 모르는 거지!”
수연은 영의의 말을 필사적으로 부정했지만 영의는 단호했다.
“아니, 넌 그냥 자질이 요리랑은 한참 떨어져 있어.”
그리고 차마 부정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수연.
“에이 씨…….”
“자, 그럼 본격적으로 단련을 시작해 볼까? 근데 쟤네들은?”
영의는 눈을 돌려 슬쩍 선우와 선영을 쳐다보았다.
“흐억, 쿨럭. 흐억, 살려…… 줘.”
“후욱, 후욱, 훅…….”
둘은 몸에 각자 다른 무게 추를 짊어지고 줄넘기를 하고 있었고, 상당히 오랫동안 했는지 온몸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 기초 체력. 자세 똑바로 하고! 줄넘기를 무슨 70 먹은 노인네가 고개 넘듯이 하고 있어? 빠르게! 날렵하게!”
저런 것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며 야단치는 수연과 거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영의.
“아, 기초 체력이면 뭐. 그래도 처음인데 못할 수도 있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은 했지만 봐주라거나 이제 안 해도 된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런 기초 체력에 대한 상식이 뒤틀린 남매와 다르게, 나름 정상인 축에 드는 지연이 말려 주기를 기대하며 살려 달란 눈빛을 보내는 선우.
‘살려 줘! 이게 무슨 기초 체력이야!’
하지만 선우의 기대와는 달리, 지연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 이곳에서 단련을 받았다.
그것도 일반 회원이 아니라, 제자의 개념으로 단련을 했기 때문에 그녀도 최씨 일가의 영향을 받아 기초 체력에 대한 상식이 조금 뒤틀려 버렸다.
“네, 그럼 우리는 우리끼리 진행하죠.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나도.”
그렇게 영의와 지연이 옷을 갈아입으러 가자, 수연이 고개를 돌려 선우를 바라봤다.
“방금 전에, 눈이 되게 막 영화에서 절벽에 매달려 떨어져 죽기 직전인 엑스트라 같더라? 엄청 살려 달란 눈빛이 막…… 응? 실전에선 그런 눈 해도 안 살려 줘. 믿을 건 네 체력이야!”
아까 지연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본 것이 틀림없었다.
‘사, 살려 줘어어어!!’
옷을 갈아입고 돌아온 영의와 지연은 구석에서 허공을 쳐다보며 뭔가를 중얼거리는 선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으어…… 어으으…….”
마치 좀비처럼 힘없는 신음 소리를 뱉어 내는 선우를 보며 의문을 표하는 지연.
“응? 쟤 갑자기 왜 저래요?”
“아, 스퍼트 올리다가 퍼졌어.”
“아, 무리했구나? 처음이면 저럴 수 있지.”
선우는 그 모든 소리에 하나하나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저 후회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집에, 가고 싶다……. 내가 왜 여길 따라온 걸까……. 아니, 아침에 그냥 갈걸…….’
“그럼 쟤는 놔두고, 우리끼리 하자. 얘는 비교적 멀쩡해 보이네.”
끄덕끄덕.
선영은 말없이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강화계가 아닌 선우를 버리고, 강화계인 선영과 기초 체력이 다져진 둘과 함께 단련을 시작하는 영의.
“자, 그럼 시작하자.”
선영은 과연 전통적인 무인 집안은 단련을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호기심에 단련에 참여했다.
여기서 뭔가 요령을 얻는다면, 더욱 도움이 될 것 같았기에.
그리고 선우도 참여하긴 싫지만 그 방식을 알고는 싶었다.
영의는 시계를 본 뒤, 뒷짐을 지고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으며 수연과 지연을 바라보며 눈짓을 했다.
‘일단 시키는 대로 해 줘 봐.’
“제한은 20분. 마지막 5분에 능력 사용 허가. 들어와. 전부.”
갑자기 밑도 끝도 없는 들어오란 말에 드물게 표정 변화를 보이며 당황하는 선영.
“에?”
하지만 지연과 수연은 영의의 장단에 맞춰 곧바로 빠르게 앞으로 뛰어나갔다.
“하!”
기합 소리와 함께 주먹을 날리는 지연과 반대 방향에서 발 차기를 날리는 수연.
영의는 둘의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며 슬쩍 옆으로 빠져나왔다.
“타이밍이 조금 어긋난다?”
“그걸 엇박이라고 하는 거야!”
영의와 말로 기 싸움을 하는 수연과 그런 수연을 도발하는 영의.
“엇박도 박자에 맞춰질 때나 의미가 있지, 마구잡이로 오면 그게 엇박인가?”
선영은 조금씩 눈치를 보다 이내 영의를 상대로 한 막싸움에 난입했다.
지연과 수연의 타격을 다리로 쳐 내며 막은 영의가 몸을 빠르게 빼며 선영을 칭찬했다.
“그렇지, 눈치가 빠르네.”
그리고 이내 다리를 뻗어 선영의 발을 걷어차는 영의.
“하지만, 공격만 생각하고 있어.”
텅!
선영이 넘어지고, 지연과 수연이 그걸 메우겠다는 듯 다시 영의를 공격해 왔다.
“뭐야, 저게……?”
선우는 영의가 3:1로 싸우는 모습을 보며 혼란에 빠졌다.
‘이런 게, 단련이라고? 보호구도 없는데?’
물론 실전과 같은 훈련이나 대련은 존재하지만, 저렇게 직접적으로 하는 것일 줄은 몰랐던 선우.
그렇게 넷의 싸움을 보던 도중, 그는 문득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보니, 봐주고 있어?’
비록 능력은 사용하지 않더라도 진심으로 때리겠단 마음가짐으로 달려드는 세 여자들에 비해 여유롭게 힘 조절을 하며 밀어내고 넘어트리는 영의.
선우는 문득, 영의가 제대로 된 전투 능력만 있었다면 엄청난 인물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의는 잠깐 눈을 돌려 시계를 바라보았고, 대련을 시작한 지 15분째가 되어 가고 있었다.
“좋아, 5분 남았다! 전력으로 들어와 봐!”
그 말이 떨어지자, 지연의 몸에서 스파크가 일어나고 수연의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저도 참전합니다!”
그리고, 가만히 지켜보다 주변의 물건들을 조종하며 난입하는 선우까지.
“오, 좋아. 염동력인가? 재밌네!”
하지만 그들이 능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영의도 능력을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록 선우와 선영이 있어 뇌기를 끌어 올리진 않았지만, 몸 바깥으로 뇌기를 분출하지 않더라도 신체의 반응속도와 근력을 올리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상황은, 조금 더 다채롭고 화려했지만 아까와 같은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체력의 저하로 영의의 손을 피하지 못한 선영.
“자, 첫 번째 탈락.”
영의는 탈락이란 말과 동시에 선영을 옆으로 밀었고, 그 위치엔 선우가 있었다.
“윽!”
철푸덕.
“아이고! 나는 왜!”
선우, 선영 탈락.
둘만 남게 된 지연과 수연은 호흡을 맞춰 줘야 했던 두 사람이 없어지자, 서로 호흡을 맞춰 영의를 공략했으나 영의는 무너지지 않았다.
“자, 시간 종료.”
결국 처음에 정했던 20분이란 시간이 끝나고 말았고, 지연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스읍, 하아…….”
그리고 정수기 쪽으로 다가가 물을 받으며 불평하는 수연.
“아, 조금만 더 하면 될 것도 같은데…… 왜 맨날 안 되는 거지? 나 분명히 맨날 연습하고 수련하는데?”
그런 의문은 수연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지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왜냐하면 나도 아직 전성기이기 때문이지. 28살이 늙어 보여?”
“어린애들한테는 아저씨 맞겠지.”
수연은 영의에게 빈정거리듯이 답했지만, 영의의 말에 놀라는 선우.
“아니, 형님? 그 얼굴로 28살요? 사기 아닌가?”
“왜, 몇 살로 보였어?”
영의의 물음에 선우는 그걸 또 냉큼 답했다.
“23이요. 22나 21이라기엔 남매간에 거리감이 좀 있었고.”
“아하하, 그래.”
젊어 보였다는 말에 내심 기분이 좋아졌는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영의.
그리고 기분이 좋아진 탓에, 영의는 선우와 선영을 조금 가르쳐 보기로 했다.
“보자…… 조금만 더 시켜 보면 될 것 같은데? 야, 수연아. 너 얘들 데리고 한 두어 달만 나와 봐. 체력 단련이랑 대련만 2개월 정도 하면 좀 쓸 만해질 것 같지 않아?”
영의의 말에 선우와 선영은 위기를 감지하고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야, 이건 좀 아닌 것 같지 않아?’
‘영웅 강사는 그나마 체계적으로 한계점 안에서 최대한 굴리는 타입이지만, 저 사람은…….’
영웅은 트레이너답게 교육생들을 나름 잘 가르쳤고, 첫 시간 때 측정으로 한 것만 빼면 어떻게든 훈련이라고 납득할 만한 범위에서 훈련을 시켰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달랐다.
-한계고 뭐고 될 때까지 시켜 버릴 것 같은데?!
실제로, 영의는 그러한 감이 조금 있었다.
본인도 몸으로 하는 거라면 곧바로 터득해 버리고, 동생인 수연도 제법 수재라 조금만 노력하면 금방 깨쳤다.
지금 제자인 지연은 그나마 몸으로 하는 게 모자라다는 걸 알았지만, 능력의 응용 쪽으로는 탁월하다는 걸 알아서 그렇지.
재능이 있는 천재형 인간만 가르쳐 봐서 ‘이게 왜 안 되지?’라는 말을 하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 해당 사항이 없는 선우와 선영.
눈치 빠른 선우가 곧바로 몸을 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 그게…….”
하지만 그때 영의의 말에 입을 다무는 선우.
영의는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공복인 데다 대련을 잘해 냈기에 맛있는 걸 먹여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 맞다. 밥이나 먹자. 뭐 먹을래? 원하는 거 다 말해 봐. 사 줄게.”
마침 아침도 못 먹었고, 방금 전까지 격렬하게 운동을 했기에 몸이 밥이란 말에 반응해 버리는 선우.
“예? 원하는 거요?”
“어, 뭐든지. 원래 운동하고 나면 잘 먹어 줘야 돼.”
선영은 선우의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를 주려 했지만, 선우는 자신의 동생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메뉴를 외치는 수연과 지연.
“진짜? 그럼 난 소고기!”
“저, 저는 회로…….”
거리낌 없는 둘의 메뉴 선정에, 선영도 눈치 보는 것을 멈추었다.
“어…… 형님, 진짜 아무거나 먹어도 됩니까?”
“그래, 마음대로 먹어. 가격은 신경 쓰지 말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원하는 메뉴를 고르라고 말하는 영의에게서 돈 많은 어른의 여유를 느끼는 선우와 선영.
하지만 그런 그들도 영의의 속내에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 밥하기 귀찮은데. 대충 사서 먹여야겠다. 어차피 운동하고 단백질도 먹어야 하고.’
“그, 그럼 저는! 아, 뭘로 먹지?!”
선우와 선영은 영의가 금방이라도 했던 말을 취소하기라도 할 것처럼 다급해하며 음식을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