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12)
영의로부터 대략적인 설명을 들은 철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있는 자신의 친구, 지석을 가리켰다.
“이 친구가 손재주는 좋은데, 이상하게도 사업적 능력이랑 사업 운만큼은 없었지. 어떻게든 벌어먹고 살 능력은 되는데 욕심을 부리다가 그만…….”
지석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욕심부리다가 구치소 한번 다녀왔으니 이젠 성실하게 일하고 살아야지.”
“아, 그러니까 그냥 각성자 장비 장인으로 전업을 하라고. 내가 도와준다니까?”
“신세 지는 건 조금 그렇지…….”
둘의 대화를 들은 영의는 둘의 사이가 제법 좋다는 것과 철관이 확실히 발이 넓구나라는 판단을 했다.
“예, 뭐. 만드신 물건들을 보니까 손재주가 좋으시긴 하네요.”
영의의 인정과 칭찬에 철관은 자신이 칭찬받은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하청받을 때 짬짬이 만든 거라 그렇지, 돈하고 재료하고 시간만 있으면 진짜 엄청난 것도 만들어 줄 수 있을지도?”
“에이, 그렇게 엄청나고 그런 건 못 만들지…….”
지석은 철관의 말에 손사래를 쳤지만,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영의는 그런 지석을 보며, 장비 하나를 의뢰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 * *
아이슬란드.
어디를 둘러봐도 넓은 평원과 작은 도로밖에 안 보이는 외딴곳에 위치한 농장.
봄이라고는 해도 아직 사방 천지에 눈이 가득한 아이슬란드였기에, 농장주는 농장 옆의 거주용 건물을 비워 두고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로 제공하고 있었다.
그 건물 안에는 두 명의 남자가 가벼운 식사 자리를 갖고 있었다.
“그래, 샤오롱. 어쩐 일로 네가 온 건가?”
덩치 큰 남자는 기별 없이 자신을 찾아온 남자를 보며 의문을 표했다.
“일단 먹고 이야기합시다, 텐징. 저도 공항에서 바로 달려온 거라 끼니를 걸렀기 때문에.”
이곳으로 오는 길에 쇼핑몰을 겸하고 있는 휴게소에서 식사를 사 왔던 샤오롱.
“음.”
조직에서 권왕이란 콜사인으로 불리는 남자의 본명은 에베레스트의 최초 등정자 2인 중 한 명인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의 이름에서 따온 텐징이었다.
그리고 텐징은 샤오롱이 사 온 햄버거를 들고는 한입에 절반을 베어 물었다.
우물우물.
“맛은 괜찮군. 근데 왜 햄버거인가?”
“장기 보존이 가능한 음식은 충분히 먹고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렇죠. 그리고, 식당에서 포장할 만한 건 이것뿐이었습니다.”
샤오롱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텐징.
“그렇군. 요즘 슬슬 통조림 같은 것들도 질려 가고 있던 참이었어.”
지금 그는 한국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다시 국제적으로 쫓기기 시작하여, 아이슬란드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공항도 발전된 도시도 제한적이라 도망치기에는 부적합한 나라였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들어오기만 하면 별 탈이 없었다.
여차하면 헤엄을 쳐서 러시아로 넘어갈 수 있는 남자이기도 했고.
“조직원들이 당신이 먹을 식량을 공수하느라 여행객으로 위장해서 왔다 갔다 하는 건 아십니까?”
“하, 뭐 어떤가? 다들 좋은 경치나 구경하고 갔겠지.”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마트까지만 해도 차량으로 1시간 30분은 넘게 달려야 하는 거리다.
하지만 텐징은 그런 것에 대한 미안함이나 죄책감은 없는지 코웃음을 쳤다.
“나 참, 그보다 지금 몇 개째 먹고 있는 겁니까? 들고 올 수 있을 만큼 사 오긴 했는데.”
지금 텐징이 먹는 속도를 보면 한입에 절반이 사라지고 있었고 그 속도가 늦춰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섯 개. 그리고 반 개째다.”
그 말을 하면서도 남은 햄버거를 입으로 밀어 넣더니, 이젠 맛보는 건 충분히 했다는 듯이 대충 씹고 삼켜 버렸다.
“정말이지, 예전에 당신과 함께할 때도 그 식성 때문에 힘들었단 말입니다.”
“그래도 그때는 이렇게 숨어 다닐 필요는 없지 않았나.”
샤오롱은 한숨을 쉬며 노트북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하아, 아무튼 곧 회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제발 전자 기기 사용법 좀 배우십시오. 아니 무슨 인력 지원 요청을 화상 회의 프로그램 켜 달라는 이유로 합니까?”
“기계를 다루는 건 알 필요가 없으니 배우지 않는 거다.”
“식당에서 무인 주문기로는 금방 주문하더니, 어떻게……. 아니. 그냥…… 됐습니다. 파드레도 당신처럼 기계를 못 다루진 않을 겁니다. 대체 구르카 용병 시험은 어떻게 합격한 겁니까?”
“무전기랑 전술 장비는 쓸 줄 안다.”
“그걸 알면, 제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사용법도 알아보란 말입니다! 아니, 그냥 통화하듯 참여하면 될 것을…….”
샤오롱은 이내 포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더니 공유기를 찾아 랜선을 연결하고 인터넷에 접속했다.
“흐음, 역시 외딴곳이다 보니 조금 느리군요.”
“그럼, 안 되는 건가?”
텐징의 물음에 샤오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되긴 하겠지만 조금 불편할 겁니다.”
“흐음.”
회의를 할 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텐징은 묵묵히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집어 먹었고 샤오롱은 멍하니 소파에 앉아 시계만을 바라보고 있다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자세를 바로 했다.
“아, 그래. 텐징? 얼마 전에 보스…… 그러니까 대장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샤오롱의 말에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텐징.
“대장? 선지자 말인가?”
“선지자는 무슨, 그냥 음험하고 계략 잘 꾸미는 능글맞은 구렁이겠죠.”
‘하지만, 그 누구도 모를 특급 정보를 아무렇지 않게 알아내고 주식시장의 흐름도 거의 정확하게 꿰뚫는 것을 보면 맞는 것 같기도…….’
샤오롱은 선지자를 부정하듯이 말했으나 문득 그의 마음속에서 그 말에 동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니, 아니야. 맞긴 개뿔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물들을 길가의 돌멩이 치우듯 치워 버리라는데! 그러면서 정의의 사도인 양, 그놈이 저지른 일들을 익명으로 인터넷에 까발리고!”
샤오롱은 순간 선지자를 편들 뻔한 자신을 자책하듯 그렇게 소리쳤다.
“후우…… 대체 어느 세상의 범죄 조직이 그런 짓을 하겠어? 응?”
많이 흥분했는지, 평소의 존댓말이 아닌 반말을 하고 있는 샤오롱.
그리고 그런 샤오롱의 태도를 한두 번 본 게 아닌 듯 텐징은 침착함을 유지한 채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진정해라. 우리가 한 게 법적으로 범죄는 맞지만, 명백한 악을 저지른 적은 없지 않나? 그러니까, 감정에만 맡기고 일을 저지르진 않았다.”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텐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침착해져 냉정을 되찾는 샤오롱.
“없기는, 없지요. 암살 대상은 대부분 뒤쪽으로 지저분한 짓들을 하던 녀석들이고. 물론 가끔, 도중에 민간인 희생자가 나오긴 했습니다만…….”
“간부들도, 아주 나쁜 이들이 있지는 않고.”
“으음…….”
그들이 실제로 상부, 선지자의 지시에 따라 일을 벌일 때에는 현지에서 구한 인원이나 한번 쓰고 버릴 용도의 하청 조직원들은 실제로 질이 나쁜 인간들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선지자가 직접 뽑거나 파드레를 시켜 데려온 간부진들만 봤을 때에는 다들 정신이나 행동 원리의 한구석이 이상하긴 해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아니지, 나쁘지 않기는! 나잇값도 못하고 맨날 어린애처럼 다니는 30대 아줌마 하나랑 명품이랑 남자에 환장하는 미친 여자 하나!”
샤오롱은 또다시 자신이 설득당할 뻔하자, 또다시 흥분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또?”
“선지자랍시고 방 안에서 폐인처럼 지내는 인간을 떠받들고 숭배하는 정신 나간 암살자 노인네 하나!”
“그렇군, 그럼 자네와 나는?”
텐징이 그렇게 물어 오자, 샤오롱은 할 말이 없어졌다.
작전을 짤 때 완벽에 집착하는 만큼, 그는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와 평가가 확실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감정에 몸을 맡기고 있는 만큼, 그는 감정적인 대답을 했다.
“너와 나는, 이야기가 다르지.”
“뭐가 다르지? 매일 강자와의 싸움을 원하면서 일이 생기면 무식하게 몸으로 때우는 나.”
텐징은 자신을 그렇게 설명하고는 샤오롱을 가리켰다.
“그리고, 너는 계획과 작전에 하나의 변수라도 생기면 발작하려 하고 다른 이가 작전에서 명령하는 걸 극도로 꺼려 하는 완벽주의자 아닌가?”
텐징의 뼈를 때리는 말에 샤오롱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너, 이렇게 말을 차분하고 조리 있게 잘했던가?”
평소의 사무적인 태도도 아니고, 방금 전처럼 감정적으로 나오지 않고 친구를 대하듯 말하는 샤오롱.
“머리 쓰는 일은 못하고, 복잡한 것도 생각하기 싫어하지만 자아성찰과 주변인의 관찰은 충분히 할 수 있다.”
텐징은 그렇게 말하며 감정이 널뛰기하듯 하는 샤오롱을 쳐다보았다.
“네가 어째서 그렇게 작전에 집착하는지 잘 안다, 샤오롱. 아직도 그때의 일을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나?”
샤오롱은 텐징의 말을 듣자 표정이 굳었다.
“그때의 얘기는, 꺼내지 말라고 했는데?”
“자신을 괴롭히는 번뇌와 유혹은 피하는 것이 답이 아니다, 견뎌 내고 맞서서 이겨 내는 것이지.”
텐징의 말에, 샤오롱은 탁자를 내리쳤다.
“닥쳐! 나는, 나는…… 그만큼, 강하지 않단 말이다. 너처럼 몸과 마음이 강해서 뭘 해도 무덤덤할 수가 없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항상 너랑 함께하지 않나. 우리의 유대는 복수가 끝나는 날까지도, 복수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될 거다.”
샤오롱은 탁자를 쳤던 손을 털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래, 복수……해야지. 망할 조.국.에.”
“좋은 마음가짐이다. 친구, 그런 의미에서 함께 산을 오르지 않겠…….”
아이슬란드에 있는 눈 덮인 산맥을 오르자는 텐징의 제안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거절당했다.
“미안, 그건 못 하겠다.”
“그런가…….”
함께 등산하자는 제안을 거절당하자 시무룩해지는 텐징.
그는 산과 함께하고 산에 살고 산에 죽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때, 회의 프로그램의 서버가 열렸다.
띵.
한 소녀의 얼굴이 화면에 나왔다.
“야호, 아저씨들 안녕?”
그리고 이내 참여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 씨. 얼굴 보면서 해야 돼? 나 메이크업 안 했는데. 그냥 평소처럼 음성으로 하지?”
성질을 내는 한 여성의 까칠한 목소리와 천장이 보이는 화면.
그리고, 조잡하고 엉성한 검은색 까마귀 그림이 그려진 화면 또한 나타났다.
“들리나? 여보세요? 들리는 거 맞나?”
음성은 나오고 있었지만, 화면은 아직도 까마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거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새 그림의 화면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파드레의 목소리 이외에 다른 남성의 목소리까지 섞여 있었다.
-아, 신부님. 그거 아니라 옆에 거. 거기.
“허허, 나이를 먹으니 잘 모르겠어서…….”
-저리 비켜 봐요. 내가 해 드릴게.
잠깐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잡음이 흘러나오고 나서, 까마귀 그림 대신 인자한 노인의 얼굴이 화면에 비쳤다.
“자, 그럼 다들 왔나?”
“네, 할아버지!”
“그렇다, 영감. 빨리하지.”
“네, 빨리 시작하시죠?”
명랑하게 대답하는 소녀와 귀찮음을 드러내는 여성과 텐징.
그리고 그런 익숙한 얼굴들을 제외하고, 세 명의 참여자가 더 있었다.
“치직…… 참여, 하였습니다…….”
변조된 음성으로 대답하는 흰색의 가면을 쓰고 붉은 후드 티를 입은 의문의 인물.
“참여하였소.”
마찬가지로 가면을 썼지만 일본 사무라이의 투구와 가면을 쓴 인물.
“아, 네. 제가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화면 아래에 닷지와 미국이라는 팻말을 써 둔 한 외국인까지.
“크흠, 좋습니다. 그러면…… 보자. 은색 헬멧에 대한 브리핑 및 정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파드레의 말을 시작으로, <죽음으로 가는 빛>의 간부들 외 협력 인원 1인의 회의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