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11)
토요일 아침 8시.
주말 출근이나 특별한 볼일이 있지 않은 이상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시간에 늦잠을 잔다.
그 예시를 보여 주듯, 영의의 집에서도 대부분의 인원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
“커어어…….”
“으휴, 주말이라고 아주…….”
새벽 5시에 반사적으로 일어났지만 주말임을 깨닫고 다시 자는 수연.
“후후…… 나의 이 간지 터지는 기술을 알까? 흐히히…….”
“…….”
수연의 권유와 영의의 방관으로 인해 결국 자고 가게 된 선우와 선영이 거실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얘네는 잘 때랑 평소 모습이랑 다를 게 없네요.”
“평소 모습이라고?”
그리고 유일하게 깨어나서 움직이고 있는 영의와 지연.
“그보다, 너는 더 안 자도 돼?”
“아, 네. 뭔가, 조금 실례 같기도 하고.”
늦잠을 자는 셋과 달리, 지연은 일찍 일어나서 씻은 뒤 옷까지 갈아입었다.
“으음, 그래.”
펄럭-
“야, 수연아. 야. 일어나 봐.”
툭툭.
영의는 자고 있는 수연에게 찾아가 이불을 젖힌 뒤 그녀를 툭툭 치며 깨웠다.
“……으웅, 왜?”
“네 장비 빌려 간다. 잠깐 쓰고 돌려줄게.”
빌려 간다고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닌 통보하는 것이라는 듯, 영의의 손에는 이미 수연의 보호대가 들려 있었다.
“으어어…… 알아서 해. 나갈 때 문 닫고.”
하지만 수연은 너무 졸리고 더 자고 싶은 마음에 장비고 뭐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이불을 끌어와 덮었다.
“그리고 지연아, 네 것도 잠깐 빌…….”
“아, 네. 선생님.”
영의가 지연의 장비도 빌려 가려고 했을 때, 문득 굳이 내가 이럴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가는 길에 너도 가자. 네 장비니까 네가 얘기를 들어야지.”
함께 가자는 영의의 말에 지연은 잠깐 버벅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따라 걸어갔다.
“네, 네? 아아, 네!”
‘에휴, 얘를 여기 놔둬서 뭐 하겠냐. 기분파인 애들 셋 사이에 끼어서 혼자서만 괜히 마음고생하겠지.’
다른 세 명이 걱정되어서가 아닌, 지연을 걱정해서 데리고 가기로 한 것이다.
지연은 수연과는 다르게 똑 부러지는 만큼 장비의 설명이나 그런 것에 대해서도 잘 기억해 둘 것 같았고.
그리고, 마력 주입기와 마정석들이 든 가방은 지연이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얘네들한테 맡겨 두기엔 너무 불안해. 어제는 병찬이가 때마침 와서 대충 넘겼다마는…….’
마침 바이크의 보관함 안에도 베키에게 줄 용도로 마련해 둔 헬멧이 있었으므로, 그걸 씌워 주고 함께 용산으로 향했다.
용산 옥션 앞에 도착한 후, 영의는 장비를 쳐다보며 잠깐 고민했다.
‘이걸 알아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주말이었기에, 옥션은 예전에 찾아왔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어지간하면 고객으로 온 사람들일 텐데,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을 잡고 물어본다고 알 리도 없을 것 아닌가.
“선생님, 근데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수연 언니는 놔두고 왜 저는…….”
신기하다는 듯 이곳저곳을 쳐다보던 지연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이곳에 온 이유를 묻자 문득 예전에 찾아갔던 가게가 떠오른 영의.
‘그래, 그 가게 사장님한테 물어보면 되겠다.’
일전에 금화의 판매와 경매 출품을 맡겼던 가게의 사장인 철관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일단 걸어가면서 얘기할게.”
“아, 네.”
영의는 전에 갔었던 철관의 가게로 향하며 지연의 장비를 꺼내 보여 주었다.
“음, 말하자면 긴데. 이 장비, 써 본 적 있어?”
“착용만 해 봤지, 실제로 쓰진 않았어요.”
“새 물건을 쓰기 아까워서?”
영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피하는 지연.
“그런 것도 있고, 보호대는 훈련에 쓰기가 조금 무리가 있어서…….”
“그럼, 뇌기를 흘려 보진 않았다는 거네?”
뇌기를 흘린다는 영의의 말에, 지연은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네?”
“정확히는 무슨 장치인진 몰라도, 장비가 뇌기를 흡수하는 느낌이 조금 있어.”
“그, 그냥 작동하기 위한 마력을 충전하는 게 아니었나요?”
대부분의 각성자 장비는 튼튼함과 형태 그 자체로 이미 목적을 다하는 방어구나 무기 같은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마력을 사용해서 작동하는 기믹이 하나씩들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믹을 사용하려면 사용자의 마력이 충전되어야 하는 것이 기본.
“아니, 뇌기랑 마력이랑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 굳이 따져 보자면 마력은 그냥 주니까 받는단 느낌이고 뇌기는 잘 먹는단 느낌?”
영의는 비유를 할 표현을 찾는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말을 이었다.
“그래, 마력은 그냥 샌드위치 같은 느낌으로 받는데 뇌기는 정말 딱 좋아하는 고기나 야채 같은 걸 먹는 느낌? 좋아하는 반찬과 이것저것 섞인 걸 먹는 게 같지는 않잖아.”
하지만 지연은 그 비유가 제대로 된 비유일까 싶은 생각을 하는 동시에 영의의 의견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 으음. 네……에.”
지연의 반응을 본 영의는 자신의 비유가 그리 찰떡같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크흠. 굳이 억지로 고개 끄덕이지 않아도 돼. 아무튼, 전문가를 찾아가 보면 알겠지. 그다지 전문적이진 않아 보였지만 그래도 발은 넓어 보였으니까.”
“그럼, 수연 언니랑 제 장비를 들고 오시면서 왜 저만 데려오신 거죠? 언니를 데려오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요?”
“아, 걔는 장비 설명해 줘도 안 들을 거 같거든. 애초에, 장비를 제대로 쓸지부터가 의문이고. 여차하면 던져서 투척 무기로나 쓰겠지.”
영의는 수연에게 보호대를 준 이유도 들고 휘두르거나 하는 종류면 안 쓸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지연은 수연의 편을 들어 주기 위해 뭐라 반박을 하고 싶었으나 수연을 변호할 건덕지가 없었다.
‘저, 정말 언니라면 그럴지도 몰라…….’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그들은 목적지인 철관의 가게에 도착해 있었다.
딸랑-
“실례합니다-.”
“네, 어서 오세요.”
하지만 가게 안에는 지난번에 보았던 철관이 아닌, 다른 인물이 가게를 보고 있었다.
“어…… 지난번에 있던 사람이 아닌데? 혹시, 다른 가게로 왔나?”
영의는 잠깐 혼란에 빠져 바깥으로 나가 가게를 확인해 본 뒤,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맞는데……?”
그리고 그런 영의의 반응에 웃으면서 답해 주는 의문의 남자.
“사장은 똑같습니다. 지금 없어서 제가 대신 가게를 보고 있죠.”
“아, 네. 1인 운영인 줄 알았는데.”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환영한다는 듯, 양 손바닥을 벌려 영의와 지연을 맞이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얼마 전까지는 그랬었죠. 자, 무슨 일로 오셨나요? 판매? 감정?”
“흐음, 굳이 따지면 감정 쪽이긴 한데요.”
감정이라 얘기하자, 남자는 조금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게. 감정은 조금 할 줄 알지만, 철관…… 그러니까 사장의 특기라서요. 혹시, 급하지 않으면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 친구, 금방 옵니다.”
안 해 준다는 것도 아니고, 잠깐 자리를 비워서 어쩔 수 없다는 이유에 영의는 순순히 납득했다.
“네, 그러죠. 저도 급한 건 아니라서.”
그렇게 영의가 가게 내부에 있는 의자에 앉으려던 찰나, 남자가 다시 말을 걸었다.
“아, 그런데 혹시 뭘 감정할 건가요? 종류에 따라서 쓸 도구가 달라져서 그런데.”
보석 감정과 고미술품 감정에 사용되는 장비와 기법이 서로 다르듯, 비록 능력으로 감정하는 게이트 내부의 부산물들에도 상세하게 감정할 땐 별도의 기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남자의 말에 적당한 예시를 보여 주기 위해 지연의 장비를 꺼내는 영의.
“장비, 인데요. 이런 거.”
영의가 꺼낸 장비를 보자, 남자의 표정이 변했다.
심각하게 굳거나 좋은 물건을 봐서 횡재했다는 그런 쪽의 표정이 아닌,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표정이 드러났다.
“잠깐…… 내가 이걸 봤었는데…….”
고민하는 듯, 연신 장비를 여기저기 살펴보던 남자는 이내 영의에게 질문했다.
“쓰읍…… 그런데, 이건 왜 가져오신 거죠? 뭔가 결함이 있어 보이진 않는데. 중고로 판매하려면 저희 가게는 게이트 부산물 매입이 주 업무라서, 제작된 각성자 장비는 취급을 안 합니다.”
“그냥, 장비 제작자를 찾으려고 했는데요. 제작자가 무명이라 옥션 쪽에서 방법을 찾아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군요. 찾을 순 있겠죠. 근데, 제작자는 왜 찾는 겁니까?”
“마음에 들더라고요, 장비가. 뭔가…… 재밌고 장인의 느낌이 있달까.”
사실 장인 정신이고 뭐고 잘 모르던 영의였지만, 배달을 하면서 느낀 게 있었다.
뭐든 간에 하나에만 미친 사람들만이 뿜어내는,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집착.
특히, 베키가 그러했다.
그중에서도 정말로 특히! 베키가 그랬었다!!
두 번이나 강조할 정도로 베키의 임팩트는 앞의 인물들에 비해 엄청났었다.
아무튼, 그러한 일종의 집착에 가까운 느낌이 장비에서 느껴졌던 영의.
“그래요……. 그럼, 제작자를 찾아서 뭘 하실 겁니까?”
영의는 문득, 남자의 분위기가 조금 변했다고 느꼈다.
“그건, 왜 물어보시죠?”
그때, 남자가 만지던 장비에서 작은 충격파가 발생했다.
투-웅.
갑자기 일어난 일에 깜짝 놀란 지연이 영의와 남자를 번갈아 쳐다볼 때, 남자는 장비를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이 장치를 만든 본인입니다.”
의문을 표하는 영의.
“예?”
긍정하는 남자.
“예.”
고개를 끄덕이는 지연.
“그렇구나.”
“네?”
“뭐?”
잠깐의 어색한 분위기가 지나간 뒤, 남자는 장비를 들어 보였다.
“그보다, 이걸 어떻게 찾으신 건가요? 저도 보자마자 기억이 나지 않았을 정도로 옛날에 만든 것 같은데.”
“백화점에서 샀죠. 그쪽에 문의해 보니까 옥션에서 받은 거라고 여기로 가라고 했었는데.”
영의의 대답에, 남자는 문득 머릿속에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철관 삼촌이 감정 제대로 해서…….
-백화점에 보낸 게 팔렸대…….
-거, 나도 그만큼 준수할 줄은 몰랐지. 너 그냥 사업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장인 해라. 요즘 막 찍어내는 것들보다는 퀄리티가 좋잖아.
자신이 만들었던 장비를 사 준 뒤 재감정해서 백화점에 넘겼던 철관.
구치소에 있던 사이 백화점에 넘어갔던 장비가 팔려 굶지 않았던 자식들.
그리고 백화점에서 장비를 사고 그 제작자를 찾으러 온 눈앞의 고객.
남자, 지석은 눈앞의 청년이 자신과 자식들을 구제해 준 사람이란 것을 깨달았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지석은 곧바로 고개를 숙이면서 영의에게 감사를 표했고,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에 영의와 지연은 당황했다.
“어어?”
“뭐, 뭔데요 아저씨?”
지석은 영의에 대한 감사 인사를 계속 이어 나갔다.
“당신 덕분에! 제 애들이 굶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아, 아니. 무슨 소리신지 설명부터 좀…….”
영의는 지금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었고, 지연은 영의가 또 누군가를 도와줬구나…… 하는 생각에 영의를 조금 더 동경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딸랑-
“야, 지석아. 미안하다. 포항의 박 사장이 오늘따라 고집을 부려서……. 응?”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의 친구.
친구 앞에서 쩔쩔매며 어쩔 줄 모르는 한 청년.
어? 저 청년 지난번에 금화 팔러 온 고객님인데?
청년의 옆에서 어째선지 반짝거리는 눈으로 청년을 쳐다보고 있는 한 소녀.
“이게 무슨 일이야?”
그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 철관이 온 줄 몰랐다는 듯,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셋.
“어? 뭐야?”
“어, 사장님 왔네?”
“어, 철관아?”
또다시 잠깐의 어색한 시간이 지나가고, 철관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경매를 맡기러 온 건가?”
혹여나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값진 부산물을 가져온 게 아닐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물어보았으나, 영의가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그건 아닙니다.”
철관은 마음속으로 아깝다는 생각을 품었지만, 언제 또 물건을 가지고 올지 모르니 친절히 대접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