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10)
모스크바. 브누쿠보 국제공항.
이곳에는 공항과 지하 터널로 연결된, 어떤 의미로는 가장 가까운 호텔이 있다.
물론 공항 내부에 캡슐 호텔도 존재하긴 하지만, 그건 호텔이라기보단 수면실에 가까운 느낌이고.
그리고 이 호텔의 한 객실에, 한 노인과 아시아계 청년이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똑똑.
“계십니까?”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
“흐음, 분명히 304호가 맞을 텐데.”
혹여나 싶어 자신의 휴대폰에 온 문자에 적힌 내용과 문을 번갈아 쳐다보는 노인.
“혹시, 주무시는 게 아닐지…….”
옆에 있던 청년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으나,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낮에 주무실 분이 아닐세.”
“시차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공항 옆에 있는 호텔이니만큼, 시차 적응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추측으로 한 말이었으나 노인은 그 의견도 부정했다.
“아니, 태양 빛이 있으면 잠을 못 주무시는 체질이시네.”
“네, 그렇군요.”
“뭔가 더 물어볼 줄 알았네만?”
“비록 제가 정보에 조금 집착하는 면이 있어도, 죽음을 앞당기고 싶지는 않아서 그렇습니다.”
청년의 말에 노인은 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선지자께선 그렇게 잔혹하신 분이 아닐세. 다만 선을 넘는다면 가차 없으시지만 말이지.”
“그 선이란 걸 제가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만.”
그리고 그때, 그들의 눈앞에 있는 304호의 문이 열렸다.
“왔네? 다들 들어와.”
문을 연 것은 다 늘어진 운동복과 감지 않은 듯 보이는 머리, 그리고 작아서 잘 들리진 않지만 어떤 소리가 흘러나오는 무선 헤드셋을 목에 걸친 남자였다.
남자는 이왕 문을 연 김에 옷에 있는 것들을 털어 버리려는 듯, 방 밖의 복도로 자신의 옷을 툭툭 쳐서 털었다.
그러자 복도로 후두둑 떨어지는 과자 부스러기와 이런저런 찌꺼기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얼른 들어와. 신부님도 샤오롱도.”
남자가 이름을 부르자 아시아계 청년은 움찔했지만 이내 내색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의 안쪽은 상당히 난잡했다.
까먹고 나서 정리하지 않고 버려둔 과자 봉지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빈 병.
반쯤 먹다 남긴 것 같은 샐러드가 담긴 플라스틱 통이 있기도 했고 넘기던 도중에 찢어 먹은 듯, 페이지의 절반이 찢어진 신문도 있었다.
그리고 그나마 깨끗한 침대 주변에는 노트북이 올려진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노트북에서는 영화가 재생되고 있었다.
“좋아, 일은 잘 처리하고 온 것 같네?”
“예, 덕분에.”
신부라고 불린 노인과 남자는 제법 친한 듯,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아니지, 현장에서 잘해 준 사람 덕분이지. 아, 거기 피 좀 묻어 있다.”
“어이쿠, 이런. 이 늙은이가 실례를 했군요.”
“뭐, 그 정도야 그럴 수 있지. 그리고 샤오롱도 수고했어. 역시 네가 있으니까 일 처리가 편하다니까?”
남자는 노인 옆의 청년, 샤오롱에게 칭찬하듯 어깨를 툭툭 쳤으나 샤오롱은 남자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움찔했다.
“음, 아니지. 본명은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콜사인으로 불러 줄까? 콜사인이 뭐였더라? 톨스토이? 블랙잭? 파렌하이트? 아, 시기상으로 파렌하이트였던 것 같네.”
“파렌하이트, 맞습니다.”
지금 모스크바의 작은 호텔방에는, <죽음으로 가는 빛>의 간부가 셋이나 모여 있었다.
아시아계 청년이 파렌하이트, 노인이 파드레.
그리고, 그들을 편하게 대하고 있는 것이 바로 두목인 선지자였다.
그 스스로가 이름을 밝힌 적은 없지만, 파드레가 그를 선지자라 칭하고 숭배에 가까운 충성을 바치고 있으니 모두가 그렇게 알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왜 여기에 모여 있을까.
“음, 그래. 신부님, 이반 페콜스키는?”
선지자의 물음에, 화장실에서 핏자국을 씻고 나온 파드레가 손을 닦으며 대답해 주었다.
“처리했습니다. 주변에 유동 인구도 많고 보안도 제법 살벌해서 혼자서 시도했으면 상당히 까다로웠겠지요.”
남자는 처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과자 봉지에서 과자를 집어 먹었다.
“그렇지, 자기가 뒤가 구린 걸 알고 있으니까 괜히 그러는 거야. 그래서 이번엔 샤오…… 아니, 파렌하이트를 붙여 줬잖아?”
“예, 확실히 도움이 되더군요.”
파드레의 대답에 파렌하이트는 고개를 숙였다.
“과찬, 이십니다.”
“왜 그래? 괜히 격식 차리지 마. 격식이란 건 일종의 거짓된 모습을 보이는 거잖아? 난 그런 거 싫어해. 우리, 진실된 모습을 가지고 살자고.”
선지자는 허례허식이나 거짓말을 싫어하는지, 격식을 차리는 것도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 네.”
“그래서, 어디까지 했더라? 아. 그래. 이반을 죽인 이유에 대해서 얘기해 줄게. 물론 너희도 어느 정도 짐작했겠지만.”
파드레와 파렌하이트는 선지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 동의했다.
“예, 자기 방 안에 있더군요. 아주 감출 생각도 없는 것처럼.”
“그런 만큼 보안을 철저히 했던 것이겠지만요. 러시아인들도 자신들의 영웅인 ‘그리즐리’가 그런 짓을 할 줄은 몰랐을 겁니다.”
“그렇지, 하반신을 놀리는 거야 뭐 내가 존중을 해 주겠는데…….”
그때, 가벼운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던 선지자의 표정이 굳으면서 방 안의 모든 것이 얼어붙는 듯한 싸늘함이 느껴졌다.
“……그걸, 대상의 구분 없이 사방팔방으로 놀리는 건 내가 용납이 안 되거든. 그것도 불법적으로 말이야. 그런 건 아주 싫어해.”
간부진이 셋이나 이곳에 모인 이유는 러시아의 유명 각성자, 일명 그리즐리라고 불리는 이반 페콜스키를 암살하기 위해서였다.
각성하기 전에도 2.1미터의 키와 130kg의 체중을 자랑하는 말 그대로 정말 곰 같은 남자였고, 강화계로 각성 후 주차 브레이크를 채워 둔 전차를 몸으로 끌기도 하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차에 몸으로 치이기도 하는 퍼포먼스를 보여 주던 남자였다.
그리고 그런 그가, 자택에서 취미 활동을 하려던 도중 파드레와 파렌하이트 2인조에게 암살되었다.
“뭐, 그래도 경고는 해 두고 왔지?”
“예. 현장에 그가 저지른 것들의 증거를 늘어놓고 사진과 영상까지 찍었습니다. 충분히 주의해서 찍었으니 걱정 마시길.”
“좋아, 신부님은 기계에 약하니까 파렌하이트가 좀 수고해 줘야겠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준비해 뒀습니다. 지금쯤이면 올라갔을 겁니다.”
파렌하이트의 대답에 선지자는 영화가 흘러나오던 노트북을 조작했다.
그리고 이내, 각종 SNS와 커뮤니티에 올라오기 시작하는 그리즐리의 사체와 그의 추악한 욕망이 드러난 숨겨진 진실들.
“그래, 이 정도면 정부에서도 감출 수 없겠지. 잘했어.”
선지자는 흡족하게 웃더니 침대에 놓인 태블릿을 들어 무언가를 입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 맞다. 지난번에 얘기했던 조사는 어떻게 되고 있지?”
조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파렌하이트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다.
“그, 은색 헬멧 말씀이십니까? 아직 성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알아봤지만, 단서가 없는지라…….”
“그래, 그건 나도 이해해. 딱히 뭐 바로 나올 거란 기대는 안 했으니까. 수고 많았어, 가도 돼. 아, 주식 해? 좋은 정보라도 좀 줘?”
“아니, 괜찮습니다.”
선지자는 성과가 없다는 보고에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파렌하이트는 정보를 준다는 말에 조금 눈치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인 뒤 슬쩍 호텔방을 나섰다.
“흐음, 너무 갑자기 나와서 뭐가 나오진 않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정말 뭐가 안 나오네.”
“한국에서의 변수는, 본래 없었던 겁니까?”
“뭐, 그런 거지. 아무리 나라도 세상 반대편의 개미가 오늘 뭘 먹었는지 죽었을지도 모르듯이 모든 걸 알 순 없는 거야.”
파드레는 선지자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는 듯,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장 오늘만 해도 러시아의 국민 영웅인 그리즐리의 성벽과 그가 아이들을 상대로 저지른 짓들을 일주일 전에 미리 통보해 주지 않았던가.
그리고 또 다른 아이가 희생되기 전에 가서 구하라는 말도 그들에게 해 주었고, 실제로 갔더니 거기엔 한 소녀가 집 안에 감금되어 있었다.
“예지가, 달라지는 겁니까?”
“신부님, 예상이 되면 그건 변수라고 부르지 않지. 그래서 내가 샤오롱을 영입한 거고.”
선지자의 말에 파드레는 뭔가 생각하는 바가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를 텐징과 함께 영입했을 때는 의문이었습니다. 복수에 미쳐 있고 텐징에 비하면 별로 특출 나지 않은 남자를 왜 영입하셨을까 싶었지요.”
“하지만 이내 선지자께서 그에게 작전권을 주자, 그 능력을 가감 없이 보여 주었지요. 현장에서 작전을 직접 지휘할 인물로는 확실히 뛰어납니다. 약간 집착하는 면도 있지만.”
파드레의 말에 선지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집착하는 면이 어느 정도 있는 게 좋아. 우리는 적당히 조직을 잘 굴리면 되는 게 아니라, 완벽하게 해내야 하니까. 그 대신 내가 예산이랑 다른 복지는 확실하게 챙겨 주잖아?”
확실히, 그들의 조직은 예산만큼은 빵빵하게 주었고 작전 후 자유 시간 및 개별 탈출 수단 등을 국가기관급으로 확실하게 지원해 주었다.
“예, 사실 불법 조직치고는 좀 많이 유한 면이 있습니다만. 당장 이름부터가 공모로 정한 것 아닙니까. 그보다 <죽음으로 가는 빛>이라니, 조금 어감이 안 좋지 않습니까?”
“그래, 그래도 <선지자와 아이들>보다는 좋지. 솔직히 득표를 제법 한 후보군이 저 두 개였는데 사이비 종교 같은 이름보다는 조금 유치한 이름이 더 낫지 않아?”
선지자의 말에 파드레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정말 열심히 고심해서 만든 이름이었습니다만.”
“뭐, 부하들이 투표로 정한 거니까. 그리고, <죽음으로 가는 빛>이란 말에 담긴 뜻이 나름 괜찮다고 봐.”
이름에 담긴 뜻이 있다는 듯한 말투에 의문을 표하는 파드레.
“뜻, 말입니까?”
“그래. 누군가를 죽음으로 이끌게 하는 심해의 초롱아귀 빛 같은 느낌의 해석이 될 수 있겠지. 하지만 빛 그 자체가 죽음으로 가는 것이란 뜻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
빛으로 유인해 삼켜 버리는 심해의 초롱아귀 같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미끼라는 해석.
그리고 죽음이 있음에도 그대로 전진하는 빛이라는 해석.
“우리는, 그중에서 무엇이 되는 겁니까?”
“글쎄, 잘하면 후자가. 못하면 전자가 되는 거겠지. 하지만 내 희망 사항은 둘 다 아니야. 죽음으로 가서 그 역경을 뚫고 나오는 게 내 희망 사항이지.”
선지자는, 애매모호한 말을 하며 웃어 보였고 파드레는 잠깐 떠오른 의문을 물어보려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저는 붉은 광장이나 관광하고 오겠습니다.”
파드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깃을 여미자, 선지자는 헤드셋을 다시 머리에 쓰며 영화를 재생시켰다.
“잘 다녀와. 나는 내일이면 여길 떠날 거야.”
“예, 몸조심하십시오. 그리고…… 식단도, 좀 건강하게 챙겨 드시고.”
파드레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의도로 말했지만, 선지자는 그 말을 못 들은 듯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파드레가 방을 떠나고, 가만히 영화를 보던 선지자.
대략 5분 정도가 지나자 그는 영화를 끄고 아까 조작하던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태블릿의 화면에는 제법 많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5년 차, 8월 17일. 마리아 고아원 붕괴. 이때가 마지막 노출.]
[27년 차, 9월 26일. 완전한 멸망.]
[10년 차, 4월 1일. 브라질 빈민가 전소. 마피아 전멸. 파드레 사망.]
[20년 차, 3월 4일. 독귀의 사망. 사망 직전에 잠재력을 끌어냈으나 부상의 악화로 사망.]
[7년 차, 3월 23일. ‘초모룽마’ 텐징과 샤오롱 주석궁 테러 시도. 중국 특무대와 격돌 후 도주. 2주 전 암시장에서 목격.]
[15년 차, 9월 29일. 세상이 망하기 시작한다.]
[13년 차, 9월 7일. 영국에서 토르와 피의 메리가 격돌. 때마침 내려친 낙뢰로 토르의 승리.]
[11년 차, 2월 3일. 한국에서 신무기 개발. 이름 모를 장인이 제작 후 암살당함.]
선지자의 태블릿에는, 선지자란 그 이름이 허명이 아닌지 시간대와 써진 순서가 이상하긴 해도 예언과 비슷해 보이는 것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맨 아래에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10년 차, 한국에서 의문의 강자 등장. 조사 후 영입 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