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6)
일기장의 페이지를 파라락 넘기다 보니, 제법 건너뛴 부분에서 다시 로버트의 글씨체를 발견했다.
하지만 넘기면서 발견한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새로운 내용과 기존 내용 사이의 여백의 양도 상당했고, 그 모든 페이지의 이곳저곳에 약간 구겨진 흔적이 보였다.
‘실수로 넘겼다기에는, 페이지를 너무 많이 비웠어. 그리고 페이지를 넘길 때 힘을 꽉 줬던 것처럼 손가락쯤 되는 크기가 구겨져 있고.’
심지어, 새로 발견한 글은 필체가 상당히 난잡하고 때로는 글씨가 서로 겹쳐져 있었다.
‘불안정한 상태에서 쓴 건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고통을 참고 아내와 딸의 옆에 남든가, 고민하지 말고 곧바로 다녀오든가.
-차라리 일찍 다녀왔더라면 아내와 딸의 상태가 나빠지기 전에 누군가를 부를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유언이라도 들었을 텐데.
영의의 추측대로, 로버트의 아내와 딸은 그사이에 상태가 나빠져 그만 명을 달리한 것 같았다.
-집 안에 있었으면서 왜 아내와 딸을 죽게 두었냐는 주변인들의 추궁과 예전부터 나의 재산에 의문을 가진 녀석들이 문밖에서 버티고 있다.
-젠장, 다시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술이라도 마셔야 조금이라도 이 비참함을 잊을 수 있겠지.
그리고 그다음 페이지는 술을 흘리기라도 한 듯, 종이가 불어나 울퉁불퉁해져 있었다.
‘술에 취해서 쓴 글이었네.’
이어지는 내용은 대부분 자신을 자책하거나, 자신에게 생긴 능력을 혐오하는 쪽의 감정이 가득 담긴 글밖에 없었다.
-이딴 능력 따위, 없는 게 좋았을 텐데.
-욕심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는 욕심을 버리고 살아야지.
-여보, 미안. 미안하다, 로즈. 이 아빠가 결단력이 없어서 둘을 죽게 만들었구나.
* * *
로버트는 딸과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자책으로 매일을 술에 빠져 지내고 있었다.
역설스럽게도, 돌림병이 사라지자 그의 식료품점은 장사가 잘되었기에 그의 직원들만 있어도 가게가 잘 굴러갔다.
그 때문에 하루 종일 술을 마시고 눈물만 흘리는 나날이 반복되던 어느 날, 그의 집에 행색이 지저분한 사내가 찾아왔다.
“역시나 이렇게 되었군.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렇게 되고 말았어.”
“꺼져, 거지 놈아. 너한테 줄 돈 따위 없으니까. 나한테 찾아와서 구걸할 시간에 일이나 하러 가지 그래?”
자신의 현재 처지를 비꼬는 듯한 말투에, 욕설을 퍼붓는 로버트.
그는 술에 취해 있었기에, 지저분한 행색에 수염과 머리털이 덥수룩한 상대방을 거지라고 판단했다.
“글쎄, 본래대로였다면 본인이 작년 이맘때쯤에 거지가 되어 있었을 텐데. 거지를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닌가?”
“뭐? 잠깐, 이 목소리는?”
술김에 처음에는 잘 못 들었지만, 다시 들어 보니 예전에 들어 본 적 있던 목소리였다.
“나, 당신 기억나. 예전에 나 찾아와서 두들겨 패고 갔던 그 인간이지? 이번에도 날 두들겨 패러 온 건가?”
“그럴 마음마저 들지 않는군. 다만, 너의 임무를 잊지 말라는 조언을 해 주러 왔다. 예전에는 경고, 이번에는 가족. 다음에는 네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로버트는 남자의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술에 취한 그의 몸은 갑작스러운 움직임의 요구에 일어서기는커녕 바닥에 우스꽝스럽게 넘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바닥에 넘어지고 나서 곧바로 남자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린 로버트는, 남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젠장, 이렇게 됐어도 날 계속 부려 먹겠다는 건가?”
로버트는 남자의 말을 듣고, 머릿속의 목소리가 그 어떤 명령을 내려도 무시하기로 했다.
가족을 잃은 남자의, 최후의 발악이었다.
[이동하십시오. 그리고 동봉된 물품을 전달하십시오.]
“안 해! 엿이나 까 잡숴! 내가 네놈들 말대로 할 것 같아?”
머리를 깨부술 듯한 두통에도, 내장에 있는 모든 것을 잡아 뒤트는 듯한 복통에도 로버트는 절대 집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크윽. 안, 간다고!”
때로는 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강제로 특정 장소로 이동되기도 했지만, 로버트는 굳세게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상의 움직임이 장기간 관측되지 않았습니다. 정보 입력 완료.]
계속 명령만을 내리던 머릿속 목소리가 갑자기 의미 불명의 말을 내뱉더니,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뭐지? 사, 사라진 건가?”
로버트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데메스 백작 부인에게 이동하려 해 보았지만, 이동되지 않았다.
“해, 해냈다! 드디어 그것들이 사라졌어!”
자신에게 머릿속으로 명령을 내리던 목소리도, 찾아와서 경고를 하던 사내도 이젠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을 거란 생각에 환호성을 지르는 로버트.
“로즈, 이 아빠가 해냈-.”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로버트는 자신에게 친숙했던 집이 아닌 새하얀 공간으로 이동되었다.
“뭐, 뭐야?!”
갑작스러운 공간 이동이야 적응되었으니 크게 놀라지 않았지만, 주변 환경이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모두 새하얗다면 그건 두려워질 것이다.
로버트는 알 수 없는 장소에 갇힌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어쩌면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했던 게 아닐까 하는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 * *
-이렇게 글을 써 보니 이제 알겠다. 놈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흰색 이외의 것은 나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구나.
-모두 흰색이라 구분하긴 어려웠지만 나에게는 방 하나 정도의 면적이 주어져 있었다. 물론 감옥처럼 사방으로 창살이 있었지만 변기로 쓸 것도 있고, 덮을 천 쪼가리도 있었다.
-다만, 감옥처럼 밥이나 물을 주지 않는다. 지금 나에게 남은 거라곤 이 일기장과 고행자에게 선물로 받았던 잉크가 닳지 않는다는 신비한 펜뿐.
영의는 그 부분들을 보며 몇 번이나 페이지를 다시 읽어야 했다.
보지 않고 써서 그런지 아까 술에 취해 적었던 것보다 훨씬 조악한 글씨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래서 페이지가 중간에 건너뛴 게 많았구나. 어떤 페이지에 썼는지를 모를 테니까.’
-이 공간에 갇힌 지 하루가 지나고, 무슨 소리인진 모르겠지만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상 유지? 수거 및 존재 말소? 무슨 소리야?
-목소리가 없어지자, 나의 주변으로 이런저런 물건들이 떨어졌고 마침내 눈을 뜰 수 있었다. 내 주변에는 지금까지 받아 왔던 모든 금품과 돈, 그리고 집의 식량 창고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먹을 것과 옷들이 있었다.
-내 집에 있던 물건들을 돌려준 걸까 싶은 의문을 품었지만, 눈이 떠졌으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로버트는 낡은 판잣집의 안에 있었고, 창문 밖으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숲과 나무뿐이라고 적어 두었다.
그리고 영의는 판잣집이란 부분에서 묘하게 로버트의 첫 고객인 노인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설마? 뭔가 느낌이 쎄한데.’
-이게 뭐지? 집에 문도 달려 있고, 열리기도 한다. 근데 어째서 나는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거냐. 대체 왜?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작성한 듯, 이리저리 떨린 자국이며 잉크가 번진 흔적이 남아 있는 글씨들.
-빌어먹을 놈들! 나를 여기에 가둬 놓고 죽이려는 게 틀림없다. 입막음을 하겠다는 거냐? 하지만 난 살아남을 거다!
로버트는 그다음에 어떻게든 살아남는 데에 성공한 듯, 일기가 제법 이어졌다.
-산에서 명상을 하던 수행자가 나에게 준 보물이 있어서 다행이다. 늘 차가운 상태를 유지하는 구슬이었는데, 그 구슬 덕분에 물을 모을 수 있었다.
영의는 차가움을 유지하는 구슬이라는 말에 문득,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천마 영감님이 비고를 열어 줬을 때, 영감님 딸이 받았던 그 구슬 같은 건가?’
그리고 동시에 항상 차가움을 유지한다면 거기에 물이 맺힐 테니 어떻게 마실 물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했다.
-다만, 식량이 문제다. 다른 건 어떻게든 해결하겠지만……. 아니, 일단 나갈 방법을 찾아보자.
그 뒤로 로버트의 눈물겨운 탈출 시도가 이어졌고, 매일 식량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하는 그의 두려운 마음도 일기에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로버트의 글씨체로 써진 마지막 글이 남아 있었다.
-오늘, 굶어 죽는가 싶었던 순간 한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남자는 손에 빵을 들고 있었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그 빵을 내 손에 들고 있었다. 그리고, 집의 한구석에 모아 뒀던 금의 일부가 사라졌다.
영의는 그 부분을 읽자마자 로버트의 최후가 예상되어 무심코 입을 열었다.
“이런 미친, 설마…….”
로버트가 음식을 가져다주던 노인의 최후와 거의 똑같은 상황의 흐름.
그리고, 집 밖에서 나가지 못한다는 말과 머릿속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들까지.
“똑같은 방식으로, 죽게 만든 거야? 배달 안 가고 버티고 있어서 가둬 버리고, 자기가 죽게 만든 주문인과 똑같이 죽게?”
그와 첫 관계를 맺은 주문인인 노인은 마음속의 마지막 버팀목인 듯 보였던 반지를 로버트의 탐욕에 거의 반쯤 강제로 빼앗기고는, 스스로 모든 음식을 끊고 죽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런 노인과 똑같이 가진 것들을 하나하나 뺏기며 얻은 음식이 눈앞에서 하나씩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는 것을 체감하게 하다니.
영의는 그런 처리 방법에 몸서리를 치면서, 문득 왜 자신은 멀쩡한 건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악랄한데? 근데, 이렇게 처분하는 거면 나는 왜 멀쩡한 거지?’
로버트는 저렇게 비참하게 끝을 맞이했는데, 왜 자신은 다른 건가 싶은 생각을 하며 무심코 다음 장을 넘겼을 때, 다른 글씨체로 써진 문장이 있었다.
‘뭐지? 로버트의 글씨체가 아닌데?’
일기장에 써진 문자를 몰랐을 때에는 다 거기서 거기구나 싶었지만 이제 번역이 가능해지자 필체가 조금 다른 것을 구분할 수 있었다.
-새로 온 녀석이 죽었다. 자신이 죽게 놔둔 사람과 마찬가지로. 뿌린 대로 거둔 것이고, 또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짜증 나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었다.
누군지 모를 사람이 쓴 내용은 상당히 충격적인 사실을 담고 있었다.
-일주일만 그대로 더 버텼다면, 그를 왕으로 삼으려는 반란군이 그를 찾아내 희대의 성군이 되었을 텐데. 한 남자의 저열한 욕망 탓에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잃고 그만 숨을 거두었다.
-그 자존심을 조금만 굽혔더라면. 아니, 그랬다면 성군이 되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 확실히 시간과 공간 담당을 나누니 혼란이 더 커지진 않는군. 더 이상 본인이 본인을 죽이는 역설적인 상황이 나오지도 않을 테고.
마치 미래에서 왔다는 듯이, 미래를 아는 듯한 말투와 여러 의미심장한 말들.
-하지만 인간에 의해서 인간이 죽는 것이었으니, 본래라면 죽었을 이의 수명을 이어서 다시 살려 내려던 시도가 바로잡힌 걸지도. 이 또한 우주의 순리겠지.
-이 일기장은, 처음으로 그들에게 저항하려 했던 남자인 로버트를 기억하는 의미로 같은 언어 체계로 써서 가지고 다녀야겠다. 이 글을 읽는 이가 있다면, 언젠가 그 누군가도 올바른 길을 찾겠지.
영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베키를 구해 준 남자가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을 쓴 사람일 거란 느낌이 들었다.
-안타까운 처지의 남자가 또 한 명 나타나겠지. 하지만 개입하는 것이 더 안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을 이번에 확인했으니, 비참한 끝을 맞이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아, 결국 로버트에 대한 건 큰 단서가 되지 않았네. 이 남자가 뭔가 더 중요한 걸 많이 아는 것 같긴 한데.”
로버트와 남자의 말을 적은 부분들이 끝나고, 뒷부분은 남자가 메모장의 용도로 쓴 건지 이것저것 다양한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이 세계의 마력은 내가 봐 온 것과 상당히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사람의 몸을 강화하거나 하는 곳에 더 적합한 형태의 마력이-]
[세계와 세계는 통상적으로 한 뿌리에서 나온 만큼 공통점이 많으나, 한 뿌리인 형제마저도 서로 다른 만큼 차이점도 존재하고 있는-]
뭔가 오묘하고, 자신이 이해하기엔 너무 복잡한 글들부터.
[또 다른 차원의 심부름꾼이 죽었다. 가면 갈수록 이전과는 다른 개선이 이루어지지만, 인간을 소모품처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변하질 않는다. 문제의 본질을 모르는군.]
로버트와 자신에게 생겼던 능력과 관련되어 있을 것 같은 글까지.
“차원의 심부름꾼이라, 그럼 나는 차원의 라이더쯤 되려나?”
[재미있는 세계를 발견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마력을 인지하며 받아들여 사용하지만 마법과 마술은 쓰지 않는 듯 보였다. 형태가 획일화된 것을 보아 자연과의 소통을 깨친 누군가가 뿌린 것 같은데.]
[그들은 마력을 사용하는 기술을 무공이라 부르며 대부분 몸을 쓰는 것에 치중해 있다. 그래, 가끔은 하나에만 몰두해 보는 것도 좋겠지.]
영의는 남자가 무공을 사용하는 세계에도 다녀왔다는 것을 알게 되자, 문득 일기장에 적혀 있던 한자의 근원이 여기일 거라 생각했다.
“다음 장이- 잠깐, 이거 왜 이래?”
또 다른 특이한 내용이 없을까 싶어 넘겼던 다음 장에는 영의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동떨어진 내용이 적혀 있었다.
[친구 웃음의? 죽음! 뒤로 가본, 운영자의 아니다 실책은 나의. 관여 미안하다? 친구. 아버지. 어머니. 약한 놈은 누구냐.]
번역의 오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내용에 영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서로 다른 언어로 쓴 건가?”
남자가 다녔던 세계가 많은 만큼, 그가 익힌 언어도 다채로울 것이다.
그리고 그 다채로운 언어들을 하나씩만 섞어서 써도 알아보는 사람은 없으리라.
하지만, 그 의미 모를 글들의 중간에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 약간이나마 존재했다.
[무공이란 건 재미있었다. 하지만 너무 틀에 맞추느라 그다지 높지 않은 효율은 어쩔 수 없었다. 이쪽 세계의 관찰은 25년으로 끝낸다.]
예전에 보았던, 25년 완의 비밀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