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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 배달은 나만 가능하다-129화 (129/325)

#제129화 (5)

5월 3일의 일기는 두어 줄만 짤막하게 적혀 있던 앞부분의 일기들과는 다르게, 상당히 긴 내용이 담겨 있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던 일에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눈앞의 판잣집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너무 낡아서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아 보였고 또 판잣집 주변의 분위기가 음산했기에 안전한 장소를 찾고 싶었었다.

‘눈을 감았다 뜨자마자 장소가 바뀌었다니. 확실히 뭔가 연관이 있긴 있어.’

-판잣집 안은 허름하고 먼지가 곳곳에 쌓여 있었지만, 분명히 누군가 사는 것 같았다. 사람이 다닐 만한 경로에는 먼지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나의 인기척을 들은 것인지, 집의 한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한 거지꼴의 노인이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노인이라, 흠. 그러고 보니 내가 배달 갔던 것도 대부분 나이 든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노인은 처음에 나를 두려운 눈빛으로 보았지만, 이내 내가 그리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건지 눈에서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리고 노인은 내가 손에 든 치즈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역시, 여기도 먹을 것으로 시작했나 보네.”

-물론 치즈가 그렇게 비싼 음식은 아니다. 나도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니까, 눈앞에서 뚫어져라 음식을 바라보는 노인을 외면할 정도는 아니고. 하지만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나한테 남은 모든 걸 줄 수는 없었다.

-내가 치즈를 주는 것을 머뭇거리는 게 눈에 보였던 건지, 노인은 품을 뒤지더니 광택이 사라지고 때가 조금 묻은 반지를 꺼내서 주었다. 비록 내가 거상은 아니지만 은 정도는 만져 본 적 있었기에, 그게 은반지라는 건 알아볼 수 있었다.

로버트의 첫 거래 장면 부분을 읽자, 영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분명히 처음에는 단가가 과하게 안 맞는 걸 보상으로 주지.”

치즈 한 덩이에 은반지라니, 세상 어디를 가도 그렇게 남는 치즈 장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영의는 뒷부분을 적당히 넘겼다.

노인의 감사 인사를 듣고 정신을 차려 보니 가게였다든가, 반지는 손에 남았다든가 하는 부분들을 과감하게 대충 넘기는 영의.

“흐음, 계속 노인하고 만난 이야기만 나오네.”

6월, 7월을 넘어서도 일기의 주체는 계속 노인이었다.

다만 중간중간에 가게가 좀 더 버틸 것 같다느니, 계속 의심을 하던 노인이 차츰 의심을 거두고 자신을 반기기까지 한다는 내용을 보았지만.

“오, 뭐야? 그림이네.”

-8월 4일. 오늘은 대박이었다. 그동안 노인에게 옷과 음식들을 많이 가져다주었지만, 금붙이 조각이나 은 장신구 정도로 끝났었는데 오늘은 갑자기 보석이 달린 브로치를 주었다. 물론 내가 보석을 보는 눈이 없어서 얼마나 귀한 건지는 몰라도, 세공이 아름다운 걸 보니 보석도 비싸겠지.

그리고 그 옆에는 브로치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제법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날개를 펼친 나비 모양의 브로치가 그려져 있었고, 흑백이라 구별은 잘 안 가지만 나비의 몸통이 보석이면 날개와 더듬이는 아마 금이나 은일 것이다.

‘의외로, 그림 재주는 조금 있나 보네.’

-8월 19일. 노인은 브로치를 주고 난 이후부터 씀씀이가 조금 커졌다. 아마 말벗이 되어 주는 나에 대한 고마움도 조금 있었겠지. 대체 뭐 하러 그런 것들을 가진 노인이 그런 허름한 집에서 사는 건가 싶지만, 부자들 마음을 어떻게 알겠나. 어쩌면 도둑을 경계해서 그런 걸지도?

-노인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난 집이 아닌 한 대저택의 앞에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노인을 만나며 갑자기 풍경이 바뀌는 것에도 익숙해졌기에, 나는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영의는 그 부분을 보며 다음 내용이 짐작 갔다.

‘뭐, 아마 브로치를 팔거나 했겠지? 그리고 그 대가는 돈으로 받았겠고.’

짐작대로, 다음 내용은 저택 안에서 사는 가면 쓴 귀부인을 만나 브로치를 팔고 엄청난 금화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요즘 로버트가 돈이 많은 걸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 조심해야겠다는 내용도 있었고.

영의는 그때 문득 로버트는 보상으로 받는 것이 대부분 돈이라는 것을 수상하게 생각했다.

“쓰읍, 너무 돈만 밝히는 것 같은데? 아니, 보상이 원래 이렇게 단순하게 하나만 주는 거였나?”

물론 배달하는 것도 다 돈 때문에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거야 세상천지에 돈으로 안 될 게 별로 없을 만큼 돈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경우에는 내 주요 관심사가 들어갔었고.’

일라이저는 여러 가지 폭이 있었지만, 독고휘나 혁련무강의 경우에는 확실히 영의에게는 돈보다 매력적일 무공을 보상으로 줬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영감님한테 돈으로 달라고 난리 쳤었는데, 나 참.’

영의는 로버트의 일기를 자신과 비교하며 더 읽기 시작했다.

한참을 노인과 귀부인을 오가며 돈을 더 많이 벌던 로버트.

처음에는 마을 귀퉁이의 작은 식료품점을 하던 그는 어느새 큰 도시의 식료품점 사장까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결혼까지 해서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었고.

-2월 3일. 오늘도 노인에게 찾아갔다. 이번에도 예전처럼 보석 세공품을 하나 잘 받으면 데메스 백작 부인에게 팔고 큰돈을 받을 수 있겠지.

-백작 부인을 만나다 보니 문득 든 생각인데, 노인은 백작 부인만큼 말투나 행동거지에 기품이 있었고 그 비싼 것들을 쓰는 데에도 별 망설임이 없었다.

-어딘가의 귀족이 몰락한 걸까? 날 처음 봤을 때 두려움에 떨던 것을 보아 아마 영지를 걸고 전쟁을 했다가 패배하고 도망친 것일 수도.

‘흐음, 이렇게 객관적인 사실로만 봤을 때는 어디의 왕족이 도망갔거나 하는 게 아니려나?’

영의는 어느새 일기장을 읽는 것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렇게 노인의 정체가 궁금해진 그는 뒷내용을 읽어 보았지만, 노인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돈이 급하게 필요한데, 오늘따라 노인은 날 보자마자 먹을 것부터 찾았다. 금이나 보석은 없냐고 물었더니 노인은 더 이상 줄 것이 없다고 다만 그동안 봐 왔던 관계와 보물들의 값어치를 조금만 더 제대로 생각해서라도 그냥 주면 안 되겠냐고 사정해 왔다.

이 대목을 읽을 때, 영의는 묘한 불길함을 감지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해서 집을 샅샅이 뒤졌고, 이내 노인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했다. 노인도 내 시선을 눈치챈 건지 이것만은 안 된다며 두 손으로 감쌌다.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돈이 급하니까. 식료품점의 장사만으로는 제법 오랜 기간을 필요로 했으니까. 결국 노인은 한참의 고민 끝에 내게 반지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 반지를 넘겨주는 노인에게서는 허탈함과 후련함이 함께 느껴졌다.

-대신, 그동안 봐 온 시간이 있으니 사과의 의미로 가지고 왔던 모든 음식을 넘겨주고 돌아왔다. 그만한 양이면 배불리 먹어도 한 달은 먹겠지.

브로치처럼 반지도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상당히 큰 크기에 용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다음 장을 넘겨 보자, 일기는 한참을 건너뛰었는지 3월달의 일기가 써져 있었다.

-3월 2일. 가게에 누군가 찾아왔다. 아니, 내가 그 누군가에게 간 건가? 어쩌면 그 누군가가 날 데리고 어디론가 간 걸지도.

노인에 대한 이야기가 한동안 써지지 않은 것을 보니, 아마 로버트가 노인에게 다시 가진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된 건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누군가가 나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날 들고 있는 남자의 눈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고.

영의는 여기서 갑자기 등장한 사내의 정체를 살짝 의심하기 시작했다.

‘혹시, 이 남자라는 게 베키를 구해 줬던 그 사람인가?’

-남자는 나를 잡고 땅바닥에 패대기를 치고는, 내 가슴을 발로 밟았다. 비록 내가 기사나 천인장급의 인재는 아니었어도, 전장에서 십인장 정도는 했었는데 나를 어린아이 다루듯이 했다.

-그 남자는 나에게 에드워드를 죽게 놔두어선 안 됐다고 했다. 그리고, 돈에 눈이 먼 벌레 같은 놈이라고도 했고. 그 말을 듣고 나는 깨달았다. 노인이 죽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 남자는 그 노인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뭐야, 한 달 만에 죽었다고? 아까 한 말에 따르면 못해도 두 달은 살았을 텐데?’

로버트가 썼던 내용이 정확하다면, 노인이 음식을 적당히 먹었어도 3월이라면 살아 있을 때였다.

-나의 더러운 탐욕이 그가 스스로 창밖으로 음식을 갖다 버리고 죽음을 택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남자의 기세와 힘이 너무 무서웠던 나머지, 나는 거기서 무릎 꿇고 빌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다만 나에게 기회가 주어졌고, 이번에 뭔가 잘못하면 내가 죽을 거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았다.

그다음부터, 로버트의 일기는 날짜를 훌쩍 건너뛰기 시작했다.

-나의 머릿속에 무슨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것도 그 남자가 해 놓은 수작일까 봐 두려워서 거절하지 못하겠다. 난 죽기 싫어서 전장을 떠나 식료품을 파는 거란 말이다.

‘아마, 저게 알림이와 비슷한 거겠지.’

로버트는 감각과 자신의 추론에만 의존했던 예전과 달리, 머릿속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기 시작한 듯했다.

일기장에도 아내가 임신했다든가, 예쁜 딸이 생겼다든가 하는 중요한 글은 짤막하게 적혀 있었고 새로운 인물을 만났다거나 하는 글은 인물의 분석이나 나름의 배경 추측까지 상세하게 써져 있었다.

숲속에서 지내는 수행자, 산꼭대기에서 바위에 앉아 명상만 하는 인물, 그리고 험준한 산맥에 덩그러니 있는 고성이나 바닷가의 탑에 사는 정체불명의 인물들까지.

목소리의 지시에 따라 그들 모두에게 음식을 갖다 주거나, 때로는 각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구해다 갖다 주기까지 했다고 써져 있었다.

‘몇 명은 비슷한 걸 본 것 같기도 하고, 산꼭대기에서 명상만 하는 건 무림인인 건가?’

물론 그때도 보상이 생기긴 했으나 로버트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7월 5일. 돌림병이 인근까지 퍼졌다. 여름이라 그런가, 시체 썩는 냄새가 집 안까지 들어온다. 그래도 가족들이 아무도 안 만나게 한다면, 아마 괜찮겠지.

그렇게 큰 변화 없이 진행되던 일기가, 갑자기 이상해졌다.

내용이 이상해지진 않았지만 글씨가 뚜렷하지 못하고 곳곳에 잉크가 번진 자국이 있는 것을 보아, 아마…….

‘울면서, 쓴 건가?’

-7월. 8일. 동굴 속의 고행자에게 음식을 갖다 주고 왔을 때, 아내와 딸이 병에 걸려 앓아누운 걸 발견했다. 대체 어째서 내가 없을 때 이런 일이? 누굴 만난 거지?

로버트는 미신을 믿지 않았기에 병이 사람 간의 접촉으로 퍼진다는 건 어렴풋이 아는 듯했다.

-다행히 몸 상태를 호전시켜 줄 약은 구했다. 이럴 때만큼은 벌어 둔 돈이 도움이 됐지만, 다른 누군가를 만나게 해서 병을 더 악화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때문에 간호를 해 줄 누군가를 고용할 마음이 없었던 건지, 자신이 간호를 한 것 같았다.

-7월 9일. 고민이다. 지금 머릿속에서 절벽의 첨탑으로 가라고 속삭인다. 내가 지금 갈 수 있겠냔 말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가지 않아서 일이 잘못되어 죽는다면, 아내와 딸은 누가 돌봐 주지?

엎친 데 덮친 격이라 했던가? 아내와 딸을 간호해야 하는 상황에서 배달을 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 로버트.

-하지만 이 상황에서 누가 자리를 비울 것 같아? 그 남자가 찾아와도, 사정을 잘 설명하면 이해라도 해 주겠지.

그는 처음에 안 가려고 버텼지만, 이내 강제력이 작용한 듯 보였다.

-머리가 아프다. 첨탑으로 가라는 목소리에 점점 머리가 울려서 더욱 아파 오기 시작한다.

그러다 이내 차마 버티지 못한 건지, 휘갈겨 쓴 글씨가 적혀 있었다.

-미안, 여보. 최대한 빨리 다녀올게. 약이 있으니, 조금은 더 버틸 수 있겠지?

그 글을 쓰고 난 뒤에는 일기를 쓰지 않았는지, 다음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여백이 로버트가 어떻게 된 건지 추측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아마 아내와 딸이 다녀오는 사이에 악화되어서 죽었, 겠지?”

그렇게 추측을 한 다음, 영의는 다음 내용을 찾기 위해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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