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3)
여러 가지로 엄청난 재주를 지닌 사내가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 사내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비슷한 재능을 가진 애가 하나 더 있긴 한데, 걔는 성격이 좀 특이해서. 종합적으로 보면 얘가 더 좋을 거야.
자신의 무공 재능에 대한 칭찬을 들은 혁련운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장면들.
-미안하다, 이 어미가 조금만 더 재능이 있었더라면.
힘없이 축 늘어진 팔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는 어린 소년을 바라보며 안타깝다는 듯 말하는 한 여성.
-이 어미가 죽거든, 벽장 속의 편지를 가지고 마교로 가거라.
여성은 아이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를 내버려 둘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큰 짐을 맡겼다.
타오르는 열기를 뿜어내는 사막을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 지나고, 마침내 도착한 성에서 만난 것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였다.
어머니를, 죽게 만든 아버지. 아니, 어머니를 구해 주지 못했던 아버지.
그리고, 조금씩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기억들.
-엄청납니다! 이 정도의 재능이라면 필시 환갑 이전에 절대경을 이룩할 것입니다!
-참으로 명석한 두뇌로구나!
-흘흘흘, 애송아. 본녀에게 의술을 본격적으로 배워 볼 생각은 없느냐?
먼 과거부터, 지금까지.
어떤 것이든 간에 손에 잡아 보면 대부분 재능이 있다고 칭찬을 해 주었다.
처음에는 그저 아부인 줄로만 알았기에 손을 뗐으나, 손재주를 필요로 하는 일을 배워 보자 확실히 체감했다.
아, 나는 재능을 타고났구나.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무공에 대한 재능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어머니는 아마 돌아가시지 않았을 텐데.
아니, 돌아가시더라도 적어도 더 오래 사셨을 텐데.
그 이후로 혁련운은 자신의 재능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그 누가 와서 물어보더라도 침묵했고, 아버지인 혁련무강에게도 거리를 두었다.
물론 나이를 먹고 조금 차분하고 지혜로워지자 어릴 적만큼 앙금이 강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에 강하게 각인된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유일하게 마음이 놓일 때는 새들과 함께 있을 때와 누이를 만날 때뿐.
아버지의 다른 부인들은 자신을 묘하게 견제하는 눈으로 볼 때가 많았고, 마음 놓을 만한 인물이 없을 때 선뜻 다가와 준 것이 누이인 연화.
그가 어릴 때에만 해도 후계에 관심이 있어 무공을 익히던 누이였건만, 자신을 보면 웃으면서 반겨 주었다.
자신의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정말 어린 동생을 아끼는 건지 몰랐지만 그저 좋았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여성이, 자신을 조건 없이 받아들여 준다는 것이. 그저 좋았었다.
그렇게 누이에게 마음을 터놓고 나이를 먹으며 조금씩 철이 들었다.
하지만 점점 지식이 늘어 가고, 지혜를 얻을수록 자신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그런 와중에 자신을 버티게 해 준 것은 의외의 재능들.
대장일에도, 재봉에도, 그림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재능들은 자신을 실망시켰던 무공이나 공부에 대한 재능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주는 선물을 받고 웃어 주는 누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으니까.
누이 말고 자신의 동생인 와룡도 어느 정도 정은 있었다.
다만, 와룡과 어울리다 보면 언젠가 잃는 것이 두려워져 미래를 감당하지 못할까 싶은 마음에 다시 거리를 두게 되었지만.
그래, 사실 잃는 게 두려웠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자신을 반겨 주는 아버지를 만났다.
그리고 어째선지 교의 사람들도 나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미 가깝고 중요한 사람을 잃어 봤으니까, 나의 미래는 어디에서 끝날지도 알고 있으니까.
그들이 가는 곳에 내가 가지 못하고, 나의 최후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그들과 함께 맞이하는 것이 무서웠다.
내가 느낀 감정을 느끼게 될 이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나의 죄책감도 커졌으니까.
그래서 새들을 벗 삼아 지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몇 년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니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것보다 나았고.
다만, 사람 중에서도 누이만큼은 거리를 두기 힘들었다.
나의 죄책감과 두려움보다 누이의 옆에 있을 때 느끼는 따뜻함이 더욱 컸으니까.
그러나 누이에겐 절대로 나의 병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누이라면 아마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나를 도우려 하겠지? 다만 그렇게 하려면 반드시 나의 병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고.
그래서 나는 누이에게만큼은 절대로 나의 병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오늘. 새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의문의 인물이 그것을 발설해 버렸다.
거기에 이어 나의 재능까지 거론하자, 무능했던 과거의 나와 무재가 더 좋지 못했음을 탓하며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 바람에 그에게 화가 나 곧바로 언성을 높였지만, 그는 엄청난 속도로 나를 집어 탁자 위로 던져 버렸다.
그렇게 탁자가 박살 나고, 기절하기 전에 그의 말이 들려왔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는 살아 계시잖아. 그런 아버지도 부모 아니냐?
부모라, 그래.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날 보는 눈빛은 어머니가 날 보던 눈빛과 꼭 닮았었다.
왜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10년이 긴 시간은 아니지만, 짧지도 않아. 더 살 마음 없으면 솔직하게 마음 터놓고 추억이라도 만들든가. 뭘 살 만큼 산 노인네처럼 그러냐?
지금까지 살아오며 헛되이 보낸 시간만 모았어도 충분히 연수로 5년은 나올 것 같았다.
그 시간만큼 무공을 수련하거나 의술을 공부했더라면, 나도 조금은 더 살지 않았을까?
아아, 그래. 나는 먼 미래의 죽음을 걱정하며 현재와 과거를 모두 쓰레기로 만들어 버렸구나.
어떻게든 살라고 교로 가라 하셨을 터인데. 이렇게 못난 아들이 되어 죄송합니다, 어머니.
그리고 아들이 귀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보여 드려 걱정을 끼쳐 드렸습니다, 아버지.
당신께서 조금만 모질게 구셨더라면, 아마 지금쯤 뭐라도 열심히 몰두하였을 텐데.
아니, 저의 의지였기에 지켜보신 거겠지요. 제가 조금이라도 노력하고 있었다면 숙적에게 무릎 꿇을 생각은 하지 않으셔도 되었을 텐데.
그리고, 참으로 미안합니다. 누이.
누이는 매번 나에게 웃어 주며 저를 와룡 녀석보다 더 가까운 동생처럼 대해 주셨지요.
“운아야!”
그래, 매번 나를 그렇게 불렀었지. 옛날보다 나이를 먹고 커져서 이젠 아이가 아님에도 누이는 꼭 나를 운아라고 불렀었지.
“운아야, 괜찮니?”
누이? 누이가 이런 말은 한 적 없었던 것 같은데.
영의가 떠나가자, 문득 혁련운이 생각나 급하게 달려온 연화는 쓰러진 그를 급하게 깨우려 했다.
“운아야! 정신 차려 봐!”
그녀는 동생을 깨우기 위해 세차게 흔들었고, 그게 효과가 있었던 건지 그녀의 부름에 응한 건진 몰라도 혁련운은 금방 눈을 떴다.
“누, 님?”
“깨어났구나, 다행이다.”
연화는 자신의 동생이 별로 크게 다치진 않은 듯하자 안심한 듯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혁련운은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법 튼튼했었는데, 부서졌군요.”
부서진 탁자의 파편을 적당히 옆으로 밀어내는 혁련운.
“운아야, 다친 데는 없니? 괜찮아?”
“괜찮습니다. 다만, 큰 충격을 받았을 뿐입니다.”
동생의 대답에 전전긍긍하며 이리저리 살펴보던 연화는 전문가에게 가기로 했다.
“그럼, 마의 어르신한테 가 보자! 내가 부탁하면 직접 봐줄지도 모르니까.”
“마의 어르신이라면, 백천정 노파를 말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럼 달리 누구겠니?”
연화의 말에 고개를 젓는 혁련운.
“아닙니다, 누님. 몸이 아니라 마음이 충격을 받았어요.”
“뭐?”
혁련운은 뭔가를 깨달은 듯, 공허한 눈빛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하아, 지금껏 수많은 것들을 배워 오고 이런저런 책과 경전들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서도 얻지 못한 명쾌한 해답을 방금 얻어맞으면서 깨쳤지요.”
갑자기 뭔가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한 혁련운을 보며, 연화는 문득 애가 맞으면서 머리가 이상해진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혹시, 귀인께서 남기고 가신 말은 없었습니까?”
방 안에서 냉담하게 나오던 때와는 달리, 영의를 방으로 데려올 때처럼 귀인으로 지칭하기 시작하는 혁련운.
“어, 그게 말이지.”
연화는 영의가 남기고 간 말을 그대로 전해 주었고, 그 말을 듣고 잠깐 생각에 잠기는 혁련운.
“그렇군요. 그럼, 마의 어르신께 가 봐야겠습니다.”
혁련운이 갑자기 마의에게 간다고 하자 정말로 어디 다친 건가 싶어 걱정하기 시작하는 연화.
“운아야, 너 정말 어디 다친 거니? 그래도 직접 마의 어르신께 간다고 하는 걸 보니 다행이긴 한데.”
“아뇨, 다치진 않았지만 갈 일이 있습니다.”
혁련운은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자신의 방을 나서 의약당을 찾아갔다.
약 냄새와 비릿한 혈향이 섞여 묘하게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 의약당 앞.
그곳에 한 사내가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댄 채 큰 소리로 외쳤다.
“마의 어르신! 일전의 약조를 기억하십니까!”
의약당이 떠나가라 외치기 시작하는 사내는 다름 아닌 혁련운.
그는 지금 마의에게 부탁을 하러 온 것이었다.
그렇게 무릎 꿇고 소리치자 그의 귓가로 전음이 들려왔다.
-애송아. 그때가 언제인데 왜 이제 와서 주접이냐? 주접이. 썩 돌아가라.
“어르신! 부디 부탁드립니다! 어르신이 약조를 지키지 않을 정도의 인물은 아니시잖습니까!”
혁련운의 외침에 잠시 침묵하던 마의, 백천정은 이내 다시 전음을 보냈다.
-애송아, 나는 한 말은 지키는 편이다. 하지만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포기할 줄도 아는 편이지.
백천정은 혁련운의 상태를 안다는 듯, 의미심장한 말을 했지만 혁련운은 거기에 굴하지 않고 외쳤다.
“상관없습니다! 하다가 제가 죽으면 그게 제 팔자인 걸로 알겠습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는 거냐? 진작 찾아왔다면 더 쉬웠을 텐데.
백천정의 물음에, 혁련운은 고개를 들어 의약당의 한구석을 노려보며 진중하게 말했다.
“20년을 불효자로 살았습니다. 앞으로의 10년, 30년 치 효를 행해 보려 합니다.”
혁련운의 말에, 그가 노려보던 의약당 한구석에서 검은 옷을 입은 노파가 걸어 나왔다.
“30년 치 효라. 애송아,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느냐?”
“쉬운 줄 알았다면, 어르신을 찾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백천정은 혁련운의 패기가 마음에 든다는 듯, 미소 지으면서 외쳤다.
“좋다, 너에게 본녀의 무공과 의학! 그 모든 걸 다 전수해 주마! 하지만 그 길이 절대 순탄치는 않을 게야!”
“예! 이미 각오한 바입니다!”
자신 있게 외치는 혁련운을 보며, 백천정은 문득 십이 년 전, 자신을 찾아왔던 혁련무강을 떠올렸다.
-마의, 혹시 이립 전후로 몸이 서서히 굳으면서 숨을 거두는 병에 대해서 아는 게 있나?
‘그래, 생전 약한 모습을 안 보이던 녀석이 딱 한 번 안절부절못해하던 때를 잊을 리가 있나. 그보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게지?’
백천정은 갑작스러운 혁련운의 결정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쓸 만한 제자가 생겼다는 마음에 일단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나중에 생각하는 게 낫겠군. 이제부터 저 녀석을 최대한 쥐어짜야 할 테니 말이야. 끌끌끌.’
혁련운은 갑자기 음산하게 웃기 시작하는 백천정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으나, 음산한 웃음을 본 생리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한편, 뇌영과 함께 하늘을 가로지르는 영의는 지금 큰 의문을 품고 있었다.
“대체, 왜 집으로 갈 수가 없는 거지?”
지금 영의는 무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