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1)
사실 조금 전, 혁련무강은 모두를 내보낸 뒤 영의에게 혁련운과 자신의 비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제가 알 거라고요?”
“그래. 본좌의 정보력이 중원의 거지 놈들이나 하오문의 잡것들보다 뛰어나진 못해도, 서역의 정보만큼은 확실하게 얻을 수 있지.”
혁련무강은 영의의 차림새와 말투, 그리고 다른 특징들을 모두 최대한 기억해내 조사해 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자네에 대한 건 하나도 일치하는 게 없었네. 단 하나, 적당히 붙는 하의와 짧은 상의로 이루어진 의복 구성이 서역의 것과 비슷하단 것만 뺀다면.”
결론은 관련된 정보를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알아낸 건 없었다고요?”
고개를 젓는 혁련무강.
“아니, 오히려 나온 정보가 없었으니 알아낸 게 있는 거지. 자네가 서역의 인물이든, 중원의 인물이든. 아니, 하다못해 저 머나먼 남해나 북해 너머 외딴곳에서 온 인물이든 그건 중요치 않네.”
“중요하지 않다고요?”
자신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 저렇게 열심히 조사한 게 아니었단 말인가?
“중요한 건 자네가 전혀 다른 지식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 교에서는 물론이고 저 중원에서도 천마의 이름을 듣고 겁을 먹지 않는 자는 없다. 본좌는 만마의 정점이며 힘의 상징으로 군림하였으니.”
혁련무강의 말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는 영의.
“다른 지식과 가치관이라.”
“방금도, 자네가 만약 뭔가 알고 있었고 의도적으로 그 사실을 숨기려 했다면 본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단 걸 먼저 생각했겠지.”
영의는 이쯤하면 충분히 말을 들어 줬다 생각했고,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말 자꾸 돌리지 마시고, 본론을 말해 보시죠. 일단 나쁜 의도가 없는 건 알겠으니까.”
“좋네. 사실, 본좌도 확신은 없지만 갑작스럽게 생긴 기회이니 한번 걸어 보도록 하겠네.”
혁련무강은 영의에게 자신과 운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 주기 시작했다.
“병이요? 불치병?”
혁련운에게는 모계가족 대대로 내려오는 불치병이 있다고 했다.
“그래. 처음에는 세맥에 노폐물이 쌓이다가 나중에는 굳기 시작해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이내 근맥까지 뻗어 가 점차 온몸이 굳는 병일세.”
처음에는 근육에 힘이 안 들어가는 수준에서, 이내 마비가 된 것처럼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거다.
영의는 그 말을 듣고 현대의 희귀병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몸의 근육이 점점 굳는 그런 거죠?”
“비슷하네. 온몸이 굳어 가며 나중에는 장기가 굳고, 이내 심장이 굳으면서 죽는 병일세. 마의에게 물어 조사해 보니 그런 병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있더군.”
‘루게릭병이랑은, 다른 건가?’
영의가 기억하는 사망 원인은 근육이 굳어 호흡을 하지 못해 사망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심장이 멈추는 얘기는 처음 듣는 것 같았다.
‘아니, 여긴 다른 세계니까 다른 희귀병이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문득 의문이 들었다.
혈관에 노폐물이 쌓이는 걸 극도로 꺼리면서 임맥과 독맥을 어떻게든 뚫으려고 난리 치는 게 무림인들인데, 그걸 해결할 수 없다고?
“근데, 다른 것도 아니고 노폐물이 쌓이면서 굳는 거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아요? 막 맥 뚫고 그러는 거 전문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냥 어중간한 시골 문파의 제자도 아니고, 무려 천마의 아들이다. 그것도 상당히 아끼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아들인데 뭘 해 줄 방법이 없다고?’
하지만 혁련무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후우. 그게, 내부의 노폐물을 태워 봐도 효과가 없었다고 하네. 아무리 비워 내고 태우더라도 맥 자체가 굳어 버리기 시작했다더군.”
“으음, 그건 어떻게 안 되는 건가요?”
“모르지, 온몸을 새로 바꿔 버리지 않는 이상은. 운의 모친도 환골탈태를 해 보기 위해 평생을 무공에 매진했지만 어느 순간 포기를 한 것 같네. 그리고 혹시 모를 희망을 안고 나에게 왔던 거겠지.”
혹여나 혁련무강쯤 되는 인물이라면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 왔겠지만, 아직까지 그녀가 왜 떠났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환골탈태를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아니, 어쩌면 환골탈태를 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변할지도 모르지. 적어도 이립 이전에 화경에 다다르기만 해도 희망은 있겠지만.”
혁련무강이 추가로 말해 준 바에 따르면, 그런 병을 얻게 된 것이 일종의 저주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대대로 한 분야의 재능을 타고났던 혁련운의 조상들은 백방으로 병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누구도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나마 성과를 본 것이 의술을 배운 이와 무공을 배운 이였다고.
“그렇게 결국, 이립 전후로 몸이 굳기 시작하면서 1년 안에 죽게 되는 걸세. 의술을 배웠던 이는 3년을 더 버텼고, 무공을 배운 그녀는 5년을 더 버티다 죽었다고 했지.”
그렇게 모친을 잃고 마교로 온 혁련운이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는가에 대해 말해 주자 영의는 문밖을 쳐다보았다.
“그럼, 영감님 아들이 저렇게 지내는 이유가…….”
“그래, 삶에 대한 희망을 이미 놔 버린 거지.”
영의는 문득, 혁련운이 뭔가를 배우며 재능을 발휘하면서도 중간에 멈추는 것에 의문이 들었다.
“근데도 이것저것 배워 봤다면서요? 그건 왜 그런대요?”
“본좌도 그건 모르겠네. 하지만 모든 면에서 재능을 발휘하는 것을 보면, 아마 저 아이가 마지막 후손일 거라 생각한 조상들의 모든 재능을 받은 걸지도.”
이내 혁련무강은 영의의 손을 잡았다.
“본좌가, 아니. 내가 이렇게 부탁함세. 살려 달라고는 하지 않을 거고, 어떻게든 치료법을 찾아 달라고도 하지 않겠네. 다만, 단서라도. 아니면 조그만 정보라도 어떻게든 찾아봐 줄 수 없나? 자네는 적어도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을 다녀오잖나.”
지금 영의의 눈앞에서 자신의 손을 잡고 부탁하는 사람은, 천마도 아니고 천하제일인의 자리를 노리는 무림인도 아니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 모든 걸 포기한 아들을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한 명의 아버지일 뿐.
“네, 찾아볼게요. 일단 제 지식선에서는 모르겠지만. 알 만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사람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은 영의였기에 혁련무강의 간절한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참으로 고마워.”
“하지만 저도 처음 듣는 거라 어떤지를 모르겠네요. 세상에 치료할 수 없는 병이란 것도 있는 법이니까.”
영의는 혹시나 싶은 불안감에 섣부른 희망을 가지지 않게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죽는 것보다는 하다못해 그 병이 뭔지라도 알고 죽는 게 더 후련하지 않겠나.”
하지만 이곳은 마교이기 이전에 가혹한 사막. 죽음에 대해서는 초연한 곳이었다.
“음, 죽는 것 자체는 별 상관이 없으신 건가요?”
“아니지, 발버둥을 쳐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게 원통하고 안타까울 뿐이지. 하다못해 절맥이나 천음지체 같은 특수한 신체를 타고났으면 본좌가 북해든 남만이든 힘으로 밀어 버리면 될 것을.”
혁련무강의 패기 넘치는 말에, 영의는 방금 전 부탁하던 그의 모습에서 감동이 조금 빠져나갔다.
‘아, 그냥 손쓸 방법이 없어서 절박해진 거구나.’
그러고 보니 이 양반은 천마였다. 천마.
독고휘만 없었으면 진작 중원을 다 밀어 버렸을 양반이었지, 참.
“그럼, 정보만 찾아 주면 되는 거죠?”
“그래, 사실 자네가 해결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독고휘에게 부탁할 것까지 생각해 봤었지.”
독고휘에게 부탁이란 걸 하려 했다는 혁련무강의 의외의 말.
“독고휘 영감님한테 부탁이요?”
“싸워서 이긴 다음, 운을 제자로 삼거나 뇌기로 전신 세맥을 청소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었지.”
이긴 다음에 뭔가를 요구하는 건, 부탁이 아니라…….
“그거, 부탁이 아니라 승자의 권리나 요구 같은 거 아닌가요?”
“이겼으면 말했던 대로 진행하고, 만일의 경우 졌을 때를 대비해 준비한 게 바로 뇌령조의 내단이었다.”
그 말을 듣자 문득 영의는 예전에 비고에서 봤던 뇌령조의 내단과 그걸 구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기억해 냈다.
“아, 그래서 그걸 그렇게 열심히 구한 거였어요?”
“다른 건 몰라도 뇌령조의 내단이라면 녀석도 자신의 무공을 후인에게 계승하기 위해 부탁을 들어줬겠지. 자신과 같은 뇌전지체가 세상에 다시 나오긴 힘들 테니까.”
혁련무강은 독고휘의 후계 문제를 거론하며 거의 확실한 거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뇌전지체란 게 귀한가 봐요? 번개 맞고 살아남아야 한다고는 했는데.”
“무공을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번개를 맞고 살아나고, 몸에서 뇌기가 뿜어져 나와야 성공이지. 그게 안 되면 뇌기를 띤 영물의 내단을 이용하거나.”
“이용을 어떻게 하는 거죠?”
“간단하다. 내단을 먹인 다음, 그 안의 뇌기로 몸 안의 내력을 전부 대체하는 거지.”
간단하지만 간단하지 않아 보이는 이야기에 당황하는 영의.
“어, 그거 죽는 거 아닌가?”
온몸의 기를 빼내고 대신 뇌기를 채우다니? 몸의 피를 다 빼내고 그걸 물로 채우겠다는 거랑 다른 게 뭔가?
“독고휘쯤 되는 고수…… 아니지, 그 정도 작업이면 그 아래 녀석들도 능히 해내겠지. 내단의 뇌기를 풀어냄과 동시에 몸의 내력을 바깥으로 보내 균형을 맞추면 되는 일이니.”
혁련무강은 그 뒤로 물론 전신의 내력을 뇌기로 만드는 것은 힘들겠지만, 대부분의 내력을 뇌기로 바꾸는 정도는 어렵지 않다고 설명했다.
“흐음, 자네의 뇌령조도 그 정도 크기면 이미 내단이 생겼을 텐데. 혹시 뇌령조를 팔 생각은 없나? 비고의 물건 정도는 제시해 줄 수 있다만.”
견물생심이라 했던가, 이미 뇌령조의 내단이 있음에도 상당히 큰 덩치의 뇌영을 보자 영의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혁련무강.
“휘야악(날 팔아)?!”
“아, 안 팔아. 진정해.”
푸드덕, 푸드덕!
뇌영은 자신을 팔지 않겠냐는 혁련무강의 제안에 깜짝 놀라 날개를 마구 휘저으며 혁련무강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흠, 농담일세. 물론 강한 기가 느껴지긴 하지만 태어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어린 영물에게 내단이 있을 리가.”
영의는 문득 뇌영이 집어 먹은 마정석만 따져 봐도 내단 두 개는 나오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했지만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기로 했다.
“네, 뭐. 일단 얘기는 알겠어요. 정보 좀 알아 오고, 가능하면 독고휘 영감님 설득. 맞죠?”
“그래.”
“뭐, 쟤 재능만 보면 가능할 것도 한데. 그보다 진짜 저 정도 재능에, 영약 지원받고 무공 지원받으면 30살 전에 경지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요?”
“본좌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겠다고 한 적은 있었지만, 운 스스로가 싫다고 했네. 자신이 목숨을 건져도,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이 병은 끝나지 않을 거라고.”
본인이 스스로 싫다고 하는데, 주변인이 뭘 어떻게 하겠는가.
“나 참, 자기 목숨이나 챙기지 뭐 하러 미래를 걱정하는 건지.”
영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부모님이 걱정해 주는데 치료를 거부하다니, 무슨 생각인 건지.’
“본좌의 말이 그 말일세. 자신의 조상들마저 부정하는 말 아닌가.”
그러나 문득, 어린 시절에 아버지 없이 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걸 직접 봤던 8살의 마음은 어땠을까를 떠올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어머니가 죽는 걸 봤으니 그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해 주려는 나름의 배려일 수도 있겠죠.”
늘 살리려는 생각만 하다 보니 아들의 심정은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혁련무강은 무언가에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건, 생각지 못했군.”
“아무튼, 저는 가 볼게요. 반쯤 심심풀이로 온 건데, 조금 무거운 얘기를 들어 버렸네.”
“잘 살펴 가도록 하게. 그리고 다음에는……. 아니, 아닐세.”
영의는 방을 나서며 곧바로 알림이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